경기 내내 리듬이 좋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 최고의 리듬에서 자신 있는 한 방을 꽂았다. 그 원동력은 책임감이었다.
선수들이 경기를 치르다보면 일정한 리듬을 유지하기 어려운 날들이 있다. 1세트는 좋았다가, 2세트에 급격히 경기력이 나빠지기도 하고, 그 반대의 경우도 발생한다. 이런 날 선수들이 가장 집중해야 하는 순간은 경기의 흐름을 좌우할 결정적 순간이다. 이 순간만 좋은 플레이를 보일 수 있다면 앞서 보인 기복들은 큰 의미가 없어질 수 있다.
29일 광주 페퍼스타디움에서 치러진 페퍼저축은행과 IBK기업은행의 경기에서 황민경이 보여준 경기 내용은 리듬이 오락가락하는 선수가 결정적인 순간 활약하며 경기를 잘 마무리한 모범적인 사례였다. 경기 초반에는 리듬이 좋지 않았지만, 4-5세트에 확실히 제몫을 하며 팀의 세트스코어 3-2(15-25, 25-14, 22-25, 25-23, 15-7) 승리에 일조했다.
경기 후 인터뷰실에서 황민경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1세트에 내가 너무 안 풀려서, 경기의 시작이 힘들었다. 하지만 선수들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덕분에 승리를 거뒀다. 너무 좋다”며 자책과 함께 승리 소감을 전했다.
현재 IBK기업은행은 부상자가 속출하면서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주장 신연경이 부상으로 자리를 비운 가운데 이번 경기에서는 주전 세터 폰푼 게드파르드(등록명 폰푼)까지 손가락 부상으로 결장했다. 그러나 황민경은 “아픈 선수들의 몫까지 남은 선수들이 해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지금 경기에 나설 수 있는 선수들은 최선을 다하고, 뛸 수 없는 선수들은 밖에서 마음을 모아 응원하면서 함께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것 같다”며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의연한 마음가짐과는 별개로 폰푼의 결장 자체는 황민경의 경기력에도 적잖은 악영향을 끼쳤다. 황민경은 경기 초반의 부진 원인을 묻는 질문에 “시즌 내내 주로 폰푼과 호흡을 맞췄다보니, (김)하경이와는 오랜만에 길게 호흡을 맞췄다. 그렇다보니 경기 초반에 리듬이 조금 맞지 않았던 것 같다”는 이유를 짚었다.
“교체돼서 밖에 나가 있는 동안 하경이의 패스를 보면서 계속 리듬을 조율했고, 경기를 치르면서 점점 맞아갔다”고 경기력 회복의 방법을 소개한 황민경에게 자신 대신 코트에 나서 좋은 활약을 펼친 육서영을 어떤 후배라고 생각하는지도 물었다. 그는 “욕심이 많은 선수다. 그래서 그런지 이번 경기에 대해서도 만족을 못하는 것 같다”고 운을 뗐다.
이후 욕심 많은 후배 육서영에게 황민경은 “이번 경기에서도 잘 버텨줬다고 말해주고 싶다. 큰 도움이 되는 선수고, 앞으로 더 많은 발전을 할 선수다. 지금처럼 계속 열심히 해줬으면 한다”며 진심어린 칭찬과 격려를 건넸다.
기복에 시달리던 황민경이 날아올랐던 결정적 순간이 두 번 있었다. 그중 하나는 4세트 24-23이었다. 반드시 점수를 내야만 경기를 5세트로 끌고 갈 수 있는 상황에서 황민경은 과감한 공격을 성공시켰다. 당시의 생각을 묻자 황민경은 “무조건 내 손으로 끝내겠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육)서영이가 어렵게 수비해서 올려둔 볼인데 거기서 연타를 때리면서 책임을 회피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는 베테랑다운 대답을 들려줬다. 엄청난 책임감을 원동력으로 승화시킨 것.
그렇게 자신의 손으로 얻어낸 5세트는 세트 자체가 결정적인 순간 그 자체인 세트였다. 그런 5세트에 황민경은 이번 경기 최고의 리듬으로 맹공을 퍼부었다. 80%의 공격 성공률로 4점을 올리며 세트 중반까지의 좋은 흐름을 주도했다.
기록을 언급하자 “제가요?”라며 눈을 동그랗게 뜬 황민경은 “기록이 그 정도인지는 전혀 몰랐다. 그저 볼 하나하나를 득점으로 연결시키려고 집중했을 뿐이다. 5세트에는 선수들 모두가 서로를 돕고 있다는 마음이 느껴졌고, 나 역시 동료들을 믿고 볼을 때렸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황민경과 동료들이 하나 된 마음으로 얻어낸 승점 2점은 IBK기업은행의 봄배구 진출을 위한 희망의 불씨가 됐다. 황민경은 “매 경기가 마지막 경기고, 매 점수가 마지막 점수라는 생각으로 경기에 임해야 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좋은 결과가 찾아올 수도 있을 거고, 그렇지 못한다 해도 후회가 남지 않을 것이다. 그저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보고 싶다”며 마지막 순간까지 도전을 멈추지 않을 것임을 강조했다.
끝으로 황민경은 “날씨도 궂고, 거리도 먼데 많은 분들이 찾아와주셔서 큰 힘이 됐다. 남은 경기도 지금처럼 저희에게 힘을 주시면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으로 보답하겠다”며 열성적인 응원을 보낸 원정 팬들에게 감사를 전했다. 황민경과 IBK기업은행의 모든 구성원들은 물론 팬들까지 염원을 한데 모아 계속 전진한다면, ‘화성의 봄’을 향한 작은 희망의 불씨가 넘실대는 화염이 될지도 모른다.
사진_광주/김희수 기자, KOV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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