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VNL(발리볼네이션스리그) 3주 차가 태국-브라질의 방콕 경기를 끝으로 종료됐다. 16개 팀이 예선 리그를 마친 결과 폴란드, 미국, 튀르키예, 브라질, 중국, 이탈리아, 일본, 독일이 8강 토너먼트에 진출했다. 지난해 세계선수권 우승팀 세르비아(9위)와 처음 8강에 올랐던 태국(14위)이 탈락한 것이 눈에 띈다. 최하위 대한민국은 참가팀 가운데 유일하게 승리가 없다. 2주 차 때부터 상대 팀은 한국과의 경기에 2진 혹은 3진을 투입하면서 체력을 비축했다. 대표팀은 그런 팀을 상대로도 이기지 못하고 한 세트만 따도 마치 우승한 듯 기뻐했다.
언제부터 한국 여자대표팀의 목표가 한 세트를 따내는 것으로 바뀐 것인지 지금의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다. 그런데도 세자르 감독은 7월 1일 중국과의 1-3 패배 뒤 “팀이 성장했고 선수들이 자랑스럽고 노력을 보상받았다”고 말했다. 고생한 선수들을 위한 립 서비스라면 이해하겠지만 그렇게까지 좋아할 일은 아니었다. 중국은 전날 도미니카공화국과 오후 7시에 경기를 시작해 풀세트 혈투를 치른 뒤 다음날 오후 2시에 다시 경기에 나섰다. 체력이 떨어져 허덕이던 팀을 상대로 하루를 충분히 쉰 팀이 한 세트를 간신히 따낸 것이다.
2023 VNL에서 대표팀은 지난해와 같이 12연패(9차례 0-3, 3차례 1-3)를 기록했다. 따낸 세트는 모두 0-2로 뒤진 3세트 듀스에서 힘들게 얻어냈다. 2년간 세트 득실(0.083)은 같다. 득점은 701점에서 730점으로, 실점은 978점에서 982점으로 조금 늘었다. 점수 득실률은 0.716에서 0.743으로 조금 높아졌다. 이것이 감독이 말해온 발전과 성장인지 궁금하다.
VNL에서 세자르 감독이 24연패를 당하는 동안 FIVB(국제배구연맹) 세계 랭킹도 급추락했다. 2020도쿄올림픽 직후 14위, 226점이었던 순위가 7월 3일 현재 35위, 108.46점으로 내려앉았다. 순위는 21계단 하락, 랭킹포인트는 117.54점을 까먹으며 대한민국 여자대표팀 사령탑 가운데 누구도 겪어보지 않은 미지의 세계로 들어갔다. 이를 놓고 다양한 분석과 매스컴의 지적, 책임감이 심각하게 모자란 외국인 감독의 변명이 이어졌지만, 결론은 확실하다. 지금 여자대표팀은 VNL에 참가할 수준이 아니고 2년간 대한민국 배구는 귀중한 시간만 낭비했다. 지난해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참패를 당했을 때가 그나마 다시 팀을 재정비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지만, 계속 지휘봉을 준 것이 두고두고 뼈아픈 악수가 됐다.
제대로 배구를 보는 사람들이었다면 당시 크로아티아전 승리가 상대의 자중지란으로 얻어 걸린 결과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대표팀 내부에서 흘러나오는 다양한 불협화음과 감독의 통솔력 부족은 충분한 교체 사유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승리에 현혹돼 누구도 현실을 직시하지 않았다. 그 바람에 일을 수습할 황금 기회도 놓쳤다. 만일 지난 2년간 국내 감독이 지휘하는 대표팀이었다면 어떤 선택과 결정을 했을 것인지 반문해보면 답은 이미 나와 있다.
사실 이제는 감독을 교체해 봐야 중요한 국제대회(아시아선수권대회, 파리올림픽 최종예선전, 항저우 아시안게임)를 코앞에 두고 얻을 효과조차 많지 않다. 비난 여론이 만만치 않은 감독이기에 여론 무마용으로는 경질이 가능하겠지만 누적된 여자배구의 근본적인 문제를 치료하기에는 후임 감독이 짊어져야 할 짐과 현재 여자대표팀의 현실이 너무 막막하다. 어떤 명장이 팀을 맡아도 지금으로서는 백약이 무효인 수준의 경기력이다.
2년간 VNL에서 속절 없는 연패를 당하는 동안 세자르 감독은 꿈 같은 얘기만 했다. 결과로 책임지는 감독임에도 불구하고 패배를 마치 남의 팀처럼 얘기했다. 다른 의도를 가진 소수의 팬은 특정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그를 옹호했지만, 그 결과는 지금 모두가 봤다. 자신의 일터인 한국 배구와 지도하는 선수들을 무시하는 듯한 유체 이탈 화법은 결국 불가리아와의 수원 3주 차 경기 뒤 인터뷰로 대중에게 노출됐다. 협회는 다음날 느닷없이 세자르 감독의 경기 뒤 인터뷰를 라이브로 내보내면서 그를 옹호하는 극성 팬덤의 지원을 기대한 눈치다. 세자르 감독은 문제가 됐던 발언을 나중에 뒤집었지만, 현장에서 통역했던 협회 직원과 취재진은 진실을 안다. 인터뷰 원문과 통역의 메모장이 공개되면 누구의 말이 맞는지 드러날 것이다.
현재의 대표팀 전력이라면 9월 폴란드에서 열리는 2024 파리올림픽 최종예선전에서 좋은 성적을 기대할 수 없다. 기적이 없다면 우리에게 남은 마지막 기회는 내년에 열리는 VNL이다. 다행히 우리는 2년 연속 꼴찌를 했지만 2024년까지는 VNL 핵심 국가에 들어있다. 파리올림픽 티켓이 걸린 세계랭킹은 2024년 VNL까지의 결과로 정해진다. 쉽지는 않겠지만 일단 내년 VNL을 마칠 때까지 세계랭킹 10위 안에 끌어올려야 마지막 희망을 걸어볼 수 있다.
달라진 국제 배구의 시간표 속에서 이제 여자대표팀은 선택의 갈림길에 섰다. 당장 눈앞에 닥친 대회를 위해 지금처럼 계속 갈 것인지 아니면 더 큰 밑그림을 그리고 새 판을 짤 것인지부터 정해야 한다. 무엇보다 대표팀의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인지부터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다. 지금 많은 구기 종목에서 올림픽 본선 진출이 좌절되고 있다. 그만큼 대한민국 엘리트 스포츠가 흔들린다. 갈수록 태어나는 아이들의 숫자가 줄어드는 현실 속에서 한국 배구만 예외일 수는 없다. 배구선수 자원은 점점 더 줄어들 것이고 그에 비례해 국제 경쟁력은 떨어질 것이다. 김연경처럼 특별한 선수가 하늘에서 또 떨어지기를 기다려봐야 답은 없다. 나무 아래에서 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지 말고 스스로 방법을 어디에서건 찾아내야 한다.
일단 현재 대한민국이 가진 배구 자원을 제대로 활용했는지부터 냉정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KBO(한국야구위원회)는 몇 달 전 WBC 대표팀 선발 때 문제가 있는 선수의 대표팀 발탁을 거부했다. 그 결과 대표팀은 예선에서 탈락했다. 자신들이 내린 선택에 결과로 책임을 졌다. 공교롭게도 대한체육회로부터 1년 징계를 받았던 정지석은 지금 남자대표팀에 있다. 쌍둥이 자매는 배구협회와 대한체육회 어디에서도 징계를 받지 않았다. 제대로 된 조사조차 없었다. 법과 규정보다 무서운 괘씸죄가 그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 공정한 결정이라면 대중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시간도 지났다. 배구협회도 어떤 식으로든 확실한 끝맺음은 필요하다.
이번 VNL에서 확인했듯 세계 배구는 기술적으로 멀리 앞서나간다. 특히 여자배구는 점점 남자배구를 따라가는 추세다. 공격과 블로킹 기술뿐아니라 수비도 점점 더 조직화 하고 있다. 이전에는 동양 배구가 잘했던 수비를 지금은 피지컬이 좋은 선수들이 개인 기량 대신 시스템으로 커버한다. 국제화 바람으로 중남미와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선수들도 점점 더 기술이 좋아진다. 과거에는 국제대회의 경험 부족으로 타고난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다양한 리그에서 뛰면서 경험치가 꾸준히 쌓아가고 있다. 우리만 우물 안 개구리고 외부의 자극 또한 적다.
새로운 국제대회 시간표와 규칙 변경 등을 포함해 국제 배구계는 빨리 변화하고 있는데 한국만 그 흐름에서 멀어진 채 갈라파고스의 섬에 있다. 김연경의 곁에서 오랫동안 꿀을 빨면서 자생력마저 잃어버린 선수들과 풍요로움의 거품에 취한 배구계에게 최근 2년 간의 VNL은 꾸준히 위기 신호를 보내고 있다.
사진 FIV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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