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스파이크=이호근 KBS N 아나운서] 새해가 밝았다. 올해도 어김없이 보신각 타종행사를 TV로 시청하며 새해를 맞이했고, 인정하긴 싫지만 우리는 나이를 한 살 더 먹게 됐다. 당연한 듯이 1월 1일 아침상엔 떡국이 올라왔고, 여기저기 한복을 차려입은 사람들도 눈에 띈다. 밀레니엄 버그를 걱정하던 세기말을 지나 어느새 2016년. 어릴 적 우상과도 같았던 H.O.T.가, 데뷔한 지 벌써 20년이 되었다. 어찌됐든 양의 해를 지나, 이제 붉은 원숭이의 해를 맞이했다. 예로부터 원숭이띠는 밝은 성격으로 사교적이고 감각이 뛰어나며, 움직임과 눈치가 빠르고 재주가 좋아 지혜로운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코트 안에서 원숭이와 가장 성향이 비슷한 포지션은 어디일까. 민첩한 움직임과 빠른 판단이 필요한 선수들. 아마 세터가 아닐까. 이에 2016년 첫 이야기는, 올해를 손꼽아 기다려 온 원숭이띠 세터들로 채워보고자 한다.
(본 기사는 더스파이크 1월호에 게재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트레이드는 윈윈(win-win)? 노재욱 & 권영민
지난해 유니폼을 바꿔 입은 띠동갑, 노재욱(현대캐피탈)과 권영민(KB손해보험). 팀을 옮길 때 마음이야 착잡했겠지만, 이제 그들은 팀에 꼭 필요한 선수가 되었다. 노재욱은 스피드배구 핵심으로, 권영민은 팀 리더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누구보다 마음고생이 심했던 2015년을 보낸 권영민. 2002년 현대캐피탈에 입단해 줄곧 한 팀만 바라봤지만, 한 번의 트레이드 해프닝에 이어 결국 KB손해보험으로 팀을 옮겨야 했다. 의외로 그는 담담했다.
“제가 잘했다면 이런 일이 없었겠죠. 다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처음엔 많이 힘들었다는 권영민. 그러나 시간이 흘러, 서운함은 ‘나라도 그랬을 것’이란 이해로 바뀌었다고 한다.
팀 리더가 필요했던 KB손해보험. 시즌 초반 부진도 있었지만, 권영민이 합류하면서 점차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아직은 격차가 나지만, 플레이오프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는 권영민. 인터뷰 내내 그는 팀 이야기뿐이었다.
“예전엔 저도 제 자신을 내세웠어요. 그런데 나이를 먹을수록 배려가 생기는 것 같아요. 원래 세터란 포지션도 다른 선수들을 살려주는 포지션이잖아요. 이젠 무조건 팀이 먼저예요.”
그래도 개인적인 소망을 묻자, 가족 이야기를 꺼냈다.
“요즘엔 아내에게 아이들 데리고 경기장에 자주 오라고 이야기해요. 아이들과 집에서 자주 놀아주긴 하지만, 배구 열심히 했던 아빠 모습도 기억해줬으면 좋겠어요.”
권영민과 달리, 어린 노재욱에게 트레이드는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다시 운동을 할 수 없을 것 같은 마음까지 들었다는 노재욱. 그러나 ‘인간만사(人間萬事) 새옹지마(塞翁之馬)’란 고사성어처럼, 현대캐피탈에서 ‘스피드 배구’의 중심이 되었다.
처음엔 스피드 배구가 그저 힘들고 어려웠다는 노재욱. 지금껏 해왔던, 많은 부분을 바꾸는 게 쉽지 않았다는 그는, 최태웅 감독의 개인 지도 아래 수 없는 연습을 반복했다. 힘들었던 순간도 잠시, 실력이 향상되고 공격수들과 호흡이 맞아가면서, 배구의 또 다른 재미를 느꼈다.
그러나 잘 나가던 노재욱에게 찾아온 불청객. 바로 부상이었다.
“처음엔 허리가 아팠어요. 2~3일 정도 쉬고 뛰려 했는데, 발목에도 부상이 왔죠.”
마음은 조급해지고, 그 동안 해온 연습들이 떠올라 억울한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코칭스태프와 많은 선배들의 격려로 이겨낼 수 있었다. 특히 임동규가 참 고마웠다. 임동규는 자극과 격려를 동시에 주는 좋은 선배란다.
“아직 만족할 단계도 실력도 아니란 걸 알아요. 그렇지만 스피드 배구를 이 정도 해내고 있다는 점에는 의미를 두고 싶어요.”
불안했던 입단 첫 해를 지나, 이제 자신의 해를 맞는 노재욱의 새해 목표는 무엇일까.
“새해에는 무조건 팀 우승이 목표에요. 물론 개인적으로 국가대표란 꿈도 언젠가는 이루고 싶어요. 그렇지만 일단은 팀을 우승시킬 수 있는 세터가 되고 싶어요.”
팀 안에도 경쟁은 있다! 이나연 & 정지윤
GS칼텍스에는 원숭이띠 세터가 두 명이나 있다. 이나연과 정지윤. 둘은 묘하게 얽혀있다. 2013~2014시즌을 앞두고 이나연이 팀을 떠나면서, 당시 양산시청에서 뛰던 정지윤이 급하게 GS칼텍스 유니폼을 입었다. 자칫 한 팀에서 뛰지 못할 뻔했다. 그러나 이나연이 다음해 다시 팀에 합류하면서 이제는 GS칼텍스 살림을 함께 책임지고 있다.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다시 입은 GS칼텍스 유니폼. 정지윤은 돌아온 프로에서 벌써 세 시즌째를 맞고 있다. 좋은 환경에서 다시 배구할 수 있다는 것에 그저 감사하다. 그러나 현재 아쉬운 팀 성적에는 누구보다 큰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그녀에게 이나연은 어떤 존재일까.
“나연이는 제게 경쟁자가 아니에요. 저는 나연이 조력자라고 생각해요. 나연이가 잘 안될 때 제가 도와줄 수 있는 그런 사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정지윤은 이나연을 보며 내심 부럽기도 하다. 조금만 더 어렸었다면, 자세와 폼을 더 정확히 바꿔 멋지게 배구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든다고 한다.
팀 내 최선임이 되어 맞는 2016년. 원숭이띠인 그녀는 어떤 새해 소망을 가졌을까.
“팀 성적이 좋지 않아요. 올해는 팀이 좋은 성적을 냈으면 좋겠어요. 언제까지 운동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때까지 멋지게 마무리하고파요.”
정지윤과 달리 이나연은 앞으로 팀을 이끌어 가야 할 미래다. 그러나 부담감보다는 조급함이 든다. 주축 선수로 자리를 잡아가는 동기들 활약을 보며, ‘과연 나도 잘해낼 수 있을까’ 많은 걱정이 든다고 한다.
나이 이제 스물하고 다섯. 밖에 있는 친구들의 자유로운 모습이 부러울 법도 한데, 오히려 돌직구 같은(?) 대답을 내놨다.
“저 (임의탈퇴로) 나가봤잖아요. 놀아보니 별 것 아니더라고요. 오히려 나가서 고생해보니, 배구하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알게 됐어요. 제가 할 줄 아는 게 배구뿐이고, 배구를 할 때 많은 분들이 좋아해주시니 자존감이 높아져 행복한 것 같아요.”
2016년은 ‘기량 향상의 해’가 되었으면 한다는 이나연. 어떤 선수가 되고 싶냐는 말에 표승주가 해준 말이라며 입을 열었다.
“‘묵은지’ 같은 세터가 되고 싶어요. 세터는 동료들과 오래 호흡할수록 좋잖아요. 저도 앞으로 열심히 배우고 노력해서, 성숙하고 깊은 맛을 내는 선수가 되고 싶어요.”
최고 자리를 지켜라! 이민규 & 이효희
등산의 묘미는 정상에 오르는 순간에 있다고 한다. 땀을 흘리며 산을 오르는 과정은 힘겹고 고되지만, 정상에 올라 시원한 바람과 탁 트인 전경을 바라보는 순간, 모든 것을 보상받는 느낌이란다. 팀을 창단 2년 만에 정상에 올려놓은 이민규(OK저축은행)와 2년 연속 정규리그 MVP에 오른 이효희(한국도로공사). 이제는 정상을 지켜내야 하는 두 선수가 새해를 맞는 기분은 어떨까.
이민규는 지난해 우승팀 세터가 되었다. 김세진 감독의 리더십, 송명근과 시몬 활약도 분명 빛났지만, 코트 안에서 선수들을 이끈 이민규의 조율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리그에서 활약을 발판 삼아, 월드리그에서도 대표팀 주전 세터로 도약했다.
그러나 성장통일까. 최근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에게 직접 이야기를 듣고 싶었지만, 정중하게 양해를 구했다. 대신 한 인터뷰를 통해 생각을 들어볼 수 있었다.
“스스로 자만을 많이 한 것 같아요. 시즌 초반부터 ‘이 정도면 되겠지’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게 쌓이다가 확 무너져버린 것 같아요.”
붙박이 주전세터에서 웜업존에 있는 시간이 늘어난 이민규. 그러나 힘든 만큼 성숙해진다고 했다. 코트 밖에서 경기를 바라보며 조금 더 큰 그림을 볼 수 있지 않았을까. 김세진 감독도 이민규를 다그치지 않고,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시간을 주고 있다.
누구도 슬럼프가 길어질 거라고 생각지 않는다. 더 높게 뛰어오르기 위해 몸을 웅크리는 것 뿐. 그리고 여기 그를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는 ‘누나’가 있다.
“이민규 선수가 저랑 띠동갑이에요?”
흠칫 놀란 이효희. 이민규 이야기를 잠시 듣던 그녀는 12년 전 원숭이띠 해를 회상했다. 프로 출범 직전인 2004년, 이효희는 담배인삼공사팀 후보 선수였다. 당시 주전 세터는 안혜정. 98년에 입단한 이효희는 신인도 아니었고, 이미 6년 시간이 흘러 있었다. 미래를 장담할 수 없었지만, 그녀는 묵묵히 참아냈고, V-리그 출범과 함께 화려하게 날아올랐다.
“저는 후배들에게 항상 참아내라고 이야기해요. 12년 전 저는 주목 받는 선수가 아니었는데, 지금은 원숭이 띠라고 인터뷰도 해주잖아요.”
지난해 이효희는 도로공사로 팀을 옮겼다. 10년 만에 도로공사를 정규리그 우승으로 이끌었고, 2년 연속 정규리그 MVP에도 선정됐다. 최근엔 선수들이 뽑은 스포츠대상도 받았다. 어렸을 땐 상복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최근엔 인복이 많다는 생각이 든단다.
“기록상이 아니라, 사람들이 투표해서 주는 상이잖아요. 그저 감사하고, 항상 더 모범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앞으로 얼마나 배구를 더 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는 이효희. ‘이제 그만둬야 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자주 든다고 한다. 그래서 새해에 꼭 이루고 싶은 그녀의 소망 ‘챔피언결정전 우승’.
“도로공사가 아직 챔프전 우승이 없잖아요. 제가 은퇴하기 전에 팀에 큰 선물을 안겨주고 싶어요.”
# 사진 : KOVO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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