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이호근의 발리뷰' 우리는 공부하는 선수예요!

권민현 / 기사승인 : 2016-03-31 10: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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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스파이크=이호근 KBS N 아나운서] 3월. 봄이다. 얇은 옷을 입기는 조금 부담스럽지만, 옷장에서 겨울 옷을 꺼내기는 싫다.



그러나 겨우내 추위에 떨던 꽃과 나무는 형형색색 옷을 꺼내 벌거벗은 몸을 치장하기 시작한다. 벚꽃이 피기엔 조금 이르지만, 개나리는 노란 빛을 뽐내기 시작하는 시기. 그게 봄이다. 무언가 시작하기에 좋고, 무언가 시작해야만 하는 강한 본능을 불러일으키는 시기. 그래서일까. 우리에게 3월은 입학의 시기이자, 새로운 학기의 시작이다.



2월이면 옷과 가방이 불티나게 팔리는 것도,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마음이 아닐까. ‘주경야독(晝耕夜讀)’이란 사자성어는 모두가 알 테지만, ‘주배야독(晝排夜讀)’이란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낮에는 배구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언뜻 생각하기에도 힘들 것 같지만, 상상이 아니라 실제로 이렇게 ‘주배야독’하는 선수들이 있다. 많은 선수들이 있지만, 3월을 맞아 대표(?) 선수 3명을 소개한다.
(본 기사는 더스파이크 3월호에 게재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미래의 선생님을 꿈꾸는 배구 선수' 흥국생명 김혜진
여자 배구의 대표적인 미녀 스타, 김혜진. 그녀는 체육학과 15학번이다. 프로 8년차였던 지난 2015년 봄, 김혜진은 대학에 입학했다. 평소 입던 운동복 대신, 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지하철을 탄다. 지하철로 40분 거리에 위치한 대학교. 그녀는 대학에 다니면서 ‘지옥철’이란 의미를 확실하게 느꼈다고 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꽤 시간이 흘러 결정한 대학 진학. 김혜진이 대학 진학을 결심한 데는 의외로 박미희 감독의 압박(?)이 있었다. 흥국생명 감독이기 전에 여자배구 대선배인 박미희 감독은, 선수 은퇴 후 삶을 설계하는 과정에서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고 한다. 그러나 후배들은 자신처럼 고생하지 않기를 바랐기에, 박 감독은 김혜진에게 대학 진학을 적극 권유했다. 그러나 이후 감독의 배려(?)는 전혀 없었다는 김혜진. 오히려 학교를 다녀오면, 야간에 못 다한 훈련을 채워야 하기에 더 힘들다고 한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대학을 다니게 됐지만, 처음엔 박 감독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배구만 하기에도 정신이 없는데, 왜 대학을 다니라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선수생활을 하는 현재, 무엇보다 운동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대학 1년을 마친 지금도 몸이 힘든 건 변함없다. 그러나 조금 더 일찍 공부를 시작할 걸 하는 생각과, 자신에게 대학을 권유했던 박 감독에게 감사한 마음은 가득하다.



처음엔 대학 동기들과 친해지기가 어려웠다는 그녀. 나이도 다르고, 다가가기도 쉽지 않았다. 배구 선수라는 사실도 숨겼던 김혜진이지만, 배구 광 팬인 동기가 그녀를 알아봤고, 그 계기로 오히려 자연스레 동기들과 가까워지게 됐다. 동기들과 서로 돕는 부분이 많다는 김혜진. 수업을 매일 들을 수 없는 탓에, 동기들에게서 필기 노트를 자주 빌린다. 대신 김혜진은 배구 수업을 듣는 동기들을 위해, 두 팔을 걷어붙이고 선생님이 되어 준다. 김혜진의 학교 성적은 어떨까. 김혜진은 “괜찮은 편”이라고 대답했다. 이영하 사무국장 역시 “운동하며 공부하기 쉽지 않을 텐데, 수업과 과제 모두 소홀함 없이 정말 열심히 한다”고 말했다.



김혜진은 공부를 하며, 오히려 운동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훈련이 끝나고 야간에 기계적으로 하던 치료도, 왜 해야 하는지 이론적으로 알고 나니 조금 더 신경 쓰게 되었고, 스포츠 심리 수업도 선수생활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무엇보다 몸으로 하고 있지만, 용어도, 의미도 모른 채 지나쳤던 많은 부분을 자세히 알게 되어 좋다고 했다. 그러나 김혜진도 대학생. 레포트는 공포 그 자체다. 시험은 범위가 정해져 있어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되지만, 레포트는 엄청난 고민과 스트레스를 안겨준단다. 과제가 주어질 때마다 정말 힘들지만, 그래도 흥국생명 여재기 트레이너가 김혜진의 레포트를 위해 논문이나 자료를 많이 찾아주며 도와준다고 한다.



김혜진은 단순히 정해진 공부만 하고 있지 않다. 비시즌과 휴가 중 짬을 내서 공인행정관리사 3급 자격증을 땄고, 올해 2급을 취득할 예정이다. 교육대학원에 진학하고 싶다는 김혜진. 그녀는 교사 자격증을 따고 싶다는 소망도 밝혔다. 후배들도 꼭 공부를 했으면 좋겠다는 김혜진.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훗날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그녀 모습을 응원한다.



'형들과 이야기가 통해서 좋아요!' 대한항공 정지석
이번 시즌 눈부신 발전을 보여주고 있는 대한항공 레프트 정지석. 정지석은 남자배구에 보기 드문 고졸 선수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신인드래프트에 참가하는 여자선수들과 달리, 남자 선수들은 대학을 거쳐 프로로 향한다. 다른 선수들보다 3~4년 일찍 프로생활을 시작하긴 했지만, 대학 생활에 대한 갈증과 호기심을 떨칠 수는 없었다. 결국 정지석은 2014년 11월,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렀고, 이듬해 우석대학교 스포츠지도과에 입학했다.



정지석 역시 처음엔 친구들과 어떻게 친해져야 하나 막막했다. 그러나 교수님의 거창한(?) 소개 덕에 친구들은 단번에 프로선수 정지석을 알아보게 되었고,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학교에 의외로 형들이 많아 편하다는 정지석. 그러나 여학생이 몇 명 없어 아쉽단다.



친구들에게 밥을 자주 산다는 정지석은, 친구들 필기 노트뿐 아니라 실기수업 때는 운동복도 빌려 입는다. 친구들이 많은 도움을 주고 있지만, 정지석은 마냥 고맙지는 않다고 말했다. 이유를 물으니, 친구들이 대한항공에 있으니 자꾸 승무원을 소개시켜달라고 조른단다. 자신을 도와주는 것이 그저 순수한 의도가 아닌 것 같다며 웃었다.



지난해 소속팀과 대표팀을 오가며 정신 없는 한 해를 보냈던 정지석. 때문에 학교 수업은 거의 듣지 못했다. 수업 참석이 힘들다 보니, 어쩌다 듣는 수업에선 진도를 따라가지 못했고, 당연히 학점은 기대할 수가 없었다.



“사실 F가 몇 개 있는데요. 이번 학기에는 F를 하나도 안 받는 게 목표예요.”



정지석이 대학 입학을 결심하게 된 몇 가지 이유가 있지만, 사실 그 중 하나는 동질감이었다. ‘대학’이라는 공통분모가 없다 보니, 가끔 대화에서 공감하지 못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었다.



중고등학교 시절, 운동에 묻혀 다른 것을 전혀 보지 못했다는 정지석. 그는 대학 생활을 통해 배구 이외의 다양한 것들을 알아간다는 것이 기쁘다. 외국어에 관심이 많다는 그는, 잘하는 것보다 배운다는 것에 큰 의미를 두고 있다고 한다.



“당장 노는 건 편하고 즐겁죠. 하지만 언제까지 배구 선수를 계속 할 수는 없으니까요. 배구 선수가 아닌 제 2 인생에 대해서도 많이 고민하고 준비해야 할 것 같아요.”



'16학번 신입생입니다! 필기도구 사주세요!' GS칼텍스 배유나
웃는 모습이 아름다운 GS칼텍스 핵심전력 배유나. 89년생인 그녀는 16학번 새내기로 대학 입학을 기다리고 있다. 지난해 수시 전형으로 배재대학교에 합격한 배유나. 현대건설 한유미 선수가 대학 진학에 큰 도움을 줬다고 했다. 대학 합격 사실을 알렸을 때, 사실 선후배들 모두 대학공부와 선수생활을 병행하는 것은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배유나 역시 너무 늦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새 팀 선배 선수가 되었고, 선수생활을 언제까지 할 수는 없기에, 미래를 위해서라도 대학공부는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 조언도 큰 몫을 했다. 결국 그녀는 고민 끝에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그래도 24~25살에 가는 게 가장 좋은 것 같아요.”



막상 결심을 하고 나니, 조금 더 일찍 마음을 정할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후배들에게도 대학 진학을 권하지만, 아직 후배들은 엄두가 나지 않는 것 같단다. 언제나 자신감 넘치는 배유나지만, 그녀도 대학 공부를 떠올렸을 때 두려운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레포트. “사실 레포트가 너무 걱정돼요. 다른 건 어떻게 하면 된다는데, 다들 레포트 쓰는 게 정말 어렵다고 말하더라고요. 그게 제일 힘들 것 같아요.”



나중에 대학원까지 가고 싶은 생각도 있다는 배유나. 그러나 일단은 눈앞에 있는 대학 공부에 충실할 예정이라고 했다. 입학을 앞둔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없는지 물었다. “입학선물이요? 사주시려고요? 사실 노트북을 받고 싶긴 한데 비싸잖아요. 필기도구 선물 받았으면 좋겠어요.”



‘올해는 꼭 운동을 열심히 해야지!’
새해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회사 일은 많았고, 회식 자리는 피할 수 없었다. 때로 운동할 수 있는 시간이 생기면, 피곤해 잠을 자는 시간으로 바꿔 사용했다. 밥을 먹으며 TV를 보는 것조차 버거운 순간이 있는 것처럼, 일반적인 사람들은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기 어려운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하다.



눈을 떠서 잠자리에 드는 순간까지 운동에 전념하는 선수들. 그러나 프로선수들에게 주어진 선수로서 삶은 길어야 20년. 그들의 노력과 투자된 시간에 비해 선수로서 주어진 시간은 짧기만 하다. 은퇴 후 삶에 대해 선수들은 끊임없이 고민한다. 그 고민의 결과로 책가방을 메고 펜을 꺼내든 선수들. 쉽지 않은, 그러나 용기가 필요한 큰 결심을 행동으로 바꾼 당신들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3월, 우리 공부합시다!



# 사진 : 신승규 기자, 김혜진 본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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