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9월 28일 이탈리아 로마에서 기대치도 않았던 희소식이 국내로 전해졌다. 세계남자배구선수권대회 4강. 말 그대로 쾌거였다. 그 이전에도 없었고 그 이후 3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없는 남자 배구의 거대한 족적(足跡) 가운데 하나다. 한국은 세터 김호철을 키 플레이어로 이인, 강만수, 정강섭, 강두태, 장윤창으로 이루어진 베스트 6의 정교하고 빠른 콤비네이션 플레이를 앞세워 사상 처음으로 체코에 이어 루마니아, 미국까지 격파하며 세계 배구계에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다.지금과는 모든 면에서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세계 4강 신화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그 중심에 국가대표팀의 리더 이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당시 우리 대표 선수들은 정말 엄청난 훈련을 소화했습니다. 아마 지금 이렇게 훈련을 한다면 아무도 대표 팀에 오지 않을 겁니다. 해외원정 경험도 없고, 세계 강호들이 경기하는 모습은커녕 작은 정보조차 없는 상태에서 세계 4강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대표 선수 전원이 박진관 감독을 중심으로 한마음으로 똘똘 뭉쳤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때는 그만큼 가슴에 단 태극마크 무게가 무거웠습니다.”
그 때 지금처럼 세계 강호들에 대한 정보가 많고 경기 경험이 풍부했다면 세계 4강 이상 성적뿐만 아니라 올림픽 메달도 가능했다고 아쉬움을 토로하는 이인은 어느새 아련한 추억의 세계 속으로 빠져 드는 듯했다.
한국남자배구 황금기를 열다
이인은 대경상고 2학년을 거의 마무리하던 1969년 12월 청소년대표로 발탁돼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제3회 아시아청소년배구대회에 처음으로 출전했다. 이선구, 이춘표, 김충한, 이용관, 정문경과 호흡을 맞춰 처음으로 일본과 중국을 누르고 5전 전승으로 우승하는 개가를 올렸다.
이후 고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인 1970년 12월 수도경비사령부에 입대한 이인은 이듬해인 1971년부터 본격적으로 태극마크를 달고 국가대표 선수로 활약한다. 수도경비사령부에 근무하면서 한양대(1971년)에 입학하는 등 소속 팀은 육군보안사령부(1973년), 한국전력(1974년~1979년)으로 바뀌면서도 1980년 12월 이탈리아 1부 리그에 선수로 진출할 때까지 10년 동안 단 한 차례도 국가대표에서 빠지지 않았다.
그 동안 1972년 뮌헨올림픽,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을 비롯해 많은 국제대회에 나섰고, 이인의 기량은 원숙미를 갖추며 국가대표 주장으로 뛰기 시작했고 덩달아 한국 남자배구는 황금기를 맞았다. 1978년 이탈리아 세계선수권대회 세계 4강, 이해 방콕아시안게임에서 첫 우승을 하고 1979년 멕시코 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도 금메달을 따냈던 것. 세계적 거포 강만수와 세터 김호철이 있었지만 이들을 함께 다독이고 이끌고 간 리더 이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인은 말 그대로 ‘주머니 가운데 송곳’으로 바로 낭중지추(囊中之錐)나 다름없었다. 상대 블로킹을 따돌리는 절묘한 볼 배급을 하는 세터 김호철이나 호쾌한 강타로 화려한 플레이를 펼치는 후배 강만수에 견주어 팬들 인기에 있어서는 뒤떨어졌던 것은 사실이다. 본인도 스스로 “강만수가 공격 60%를 차지한다면 나는 40%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토로할 정도지만 그 효과 면에서는 천양지차였다.
이인과 강만수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강만수가 메가톤급 폭탄이 떨어지는 것처럼 폭발적인 스파이크가 장기라면 이인은 날카로운 면도날 같이 상대 수비 허를 찌르는 다양한 공격이 일품이다. 188㎝로 배구선수로는 크지 않은 키이지만 서전트 점프 80㎝, 러닝 점프 1m에 이르는 높은 점프력에다 긴 체공시간을 활용한 중앙돌파, 속공, 페인팅, 트릭 플레이에다 이동공격까지 그야말로 팔색조의 공격으로 서구 팀 장신 벽을 한순간에 무너뜨려 버린다.
무엇보다 강만수, 장윤창, 강두태 등의 강타가 상대 장신 블로킹에 막히면 순식간에 힘을 잃는 기복이 심한 경기로 자주 교체를 당하지만 이인은 다양한 기술을 바탕으로 기복이 거의 없는 경기를 펼침으로써 실제 팀 공헌도에서는 이들보다 훨씬 높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 원로 배구인은 “배구는 강타만으로는 이길 수가 없다. 강만수가 공격 일변도라면 이인은 재치와 기지가 넘치는 공격을 펼치는데다 어려운 볼도 잡아내는 탁월한 수비 능력까지 겸한 1인 2역을 해 내는 유일한 선수다. 이인이 없었다면 우리나라가 세계선수권대회 4강이나 1978 방콕아시안게임, 1979년 멕시코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사상 첫 금메달의 꿈도 꿀 수 없었을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정도다.
야구가 좋았던 어린 시절 꿈을 접고
이인은 어린 시절 달리기를 잘했다. 1952년 충북 청주에서 태어나 청주 청남초등학교 4~6학년까지 육상 단거리 선수로 활약하면서 충북 대표로 선발되기도 했다. 육상 선수로 활약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동네 친구들과 야구에 빠졌다. 제대로 된 야구공이나 글러브도 없고 야구장도 있을 리가 없지만 논밭이나 냇가에서 동네 아이들과 야구를 하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널빤지로 만든 배트에 말랑말랑한 공이었지만 또래 아이들보다 키가 컸던 이인은 공을 맞추는 재주가 뛰어났다. 어깨가 강해 빠른 볼을 던지면 제대로 볼을 맞추는 친구가 없었다. 반대로 팔 힘이 좋아 볼을 맞히면 그냥 홈런이 될 정도였다. 이처럼 어릴 때부터 운동이 좋았고 소질도 있었다. 어느 날 밤 두런거리는 소리에 잠을 깨어 보니 옆에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인이가 육상보다 야구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아 야구를 시켜야겠다”고 상의하는 소리를 듣고 속으로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른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운명은 그에게 야구를 허락하지 않았다. 중학교에 가야 하는데 야구부가 있는 학교에는 가기가 싫었다. S중학교에 야구부가 있었지만 소위 충북에서 하위급 학교여서 진학하기가 꺼려졌던 것이다. 당시에는 중학교에 가기 위해서는 시험을 봐야 했는데 S중학은 원서만 내면 거의 합격이 되는 학교였던 것. 이 바람에 이인은 대성중학교로 방향을 틀고 말았다.
대성중학교에 입학해 그토록 좋아하던 야구와는 인연이 멀어졌지만 대신 운명적으로 배구와 조우하게 된다. 이미 중학교 2학년 때 키가 178㎝나 되는데다 운동에 소질이 있었던 이인을 눈여겨 본 나병희 체육교사의 권유로 배구를 시작하게 된 것.
그러나 이마저도 오래가지 않았다. 이인이 3학년이 될 즈음 대성중학교 배구팀이 해체되었다. 할 수 없이 충주 충일중학교로 전학을 했고 그 해 제48회 전국체육대회에 출전해 남자 중등부에서 동메달을 따내는 수훈을 세우면서 단숨에 서울의 고등학교 팀에서 눈독을 들이는 유망주로 떠올랐다. (당시에는 소년체전이 생기기 전으로 중학교는 전국체육대회에 참가했다 - 편집자 주)
대신고와 대경상고에서 동시에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망설이던 이인이 연승가도를 달리며 전국 최강으로 군림하던 대신고를 마다하고 대경상고를 택한 사연은 아주 단순했다. 대신고는 팀 규율이 엄해 선배들이 후배들을 엄하게 다뤘지만 대경상고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이유였다. 하지만 정작 대경상고로 진학을 하고 보니 여기도 대신고 못지않았다고.
이인은 대경상고에서 배구 인생행로에 큰 영향을 끼친 이규소 코치와 2년 선배인 고(故) 송만기를 만나게 된다. 이인은 한국전력과 대경상고 코치를 겸했던 이규소 코치의 권유로 군에서 제대한 뒤 국가대표이면서도 단 한 푼 계약금도 받지 않고 1974년부터 1979년까지 절정기를 한국전력에서 보냈다. 국제무대에서 한국 남자배구를 세계 정상권으로 이끌던 바로 그 즈음이었다.
송만기와는 1983년 3월 현대자동차서비스 남자배구팀 창단 감독과 코치로 다시 만나 1988년까지 함께 했다. 당초 이인은 현대 선수 겸 코치로 부임하면서 감독 자리를 약속받았으나 선배인 송만기 감독이 “1년만 더…”라며 양해를 구하는 바람에 이인이 감독 지휘봉을 물려받기까지는 1990년으로 무려 7년이 지난 뒤였다.
이처럼 이인은 선후배, 그리고 주변 인물들과의 인연을 중히 여겼다. 그 바람에 많은 손해(?)도 보았지만 배구계에 넓은 인맥을 쌓는 계기도 되었다.
글/ 정태화 한국체육언론인회 사무총장
사진/ 문복주 기자
(본 기사는 더스파이크 4월호에 게재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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