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이인, 그가 있어 세계 4강이 가능했다 ②

정고은 / 기사승인 : 2016-04-29 09: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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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1부 리그 진출
이인에게 잊을 수 없는 경기 가운데 하나는 19801월 불가리아에서 열린 모스크바올림픽 예선전에서 맞붙은 일본과 경기였다. 한 해 전인 1979년 바레인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으로 여겼던 일본에 사상 처음으로 3-1로 승리하며 우승한 뒤 두 번째 일본과 공식대결이었다. 당시 일본은 한국에 패한 뒤 재수가 없어졌다며 자만 했을 정도로 그 전까지 뚜렷한 실력 차를 보였었다.

따라서 불가리아에서 펼쳐진 한일전은 말 그대로 두 나라 자존심이 걸린 경기였다. 일본이 우세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우리나라는 다나까 등 세계적인 스타들이 즐비한 일본에 첫 세트를 15-0, 퍼펙트 승을 거두는 등 3-2로 승리하며 일본 콤플렉스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계기가 됐다.

첫 세트에서 우리가 퍼펙트로 이기자 일본이 무척 당황을 했습니다. 이 때부터 심판들 판정이 일본에 유리하게 나오기 시작해 오히려 우리가 고전을 했습니다. 당시 세계 배구계에 일본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거든요.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우리는 실력으로 일본을 압도했습니다. 우리 스스로도 우리 잠재력을 과소평가하고 있었습니다.”

이인은 이 대회를 끝으로 국가대표 은퇴를 결심한다. 28세로 국가대표로 충분히 뛸 수 있는 나이였으나 후배들에게 길을 터주기 위해 결단을 한 것이다. 사실 이인은 1978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낸 뒤 쿠웨이트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대표팀 사퇴 의사를 전한 적이 있지만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 예선전을 앞두고 차마 대표 팀을 떠날 수 없어 그대로 머물렀다.

이인은 그야말로 팀의 든든한 대들보이자 맏형으로서 100% 이상 역할을 해냈다. 온순하면서도 의지가 강하고 화려하지는 않지만 말없이 자신의 임무를 수행해 나가는 모습에 많은 배구인들은 “10명 스타보다 더 필요한 선수라고 입을 모을 정도였다.

이렇기에 그를 쉽게 국가대표에서 내보낼 수가 없었다. 이 해 8월 대한배구협회가 이인을 국가대표 코치 겸 선수로 선임해 조배호 감독과 호흡을 맞추도록 배려했다. 스타플레이어에다 대표 팀 주장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한 만큼 장기적으로 대표 팀 코치-감독의 수순을 밟는 것은 당연하지만 아직까지 현역선수인 이인을 국가대표 코치로 기용한 것은 너무나 파격적이었다. 당연히 첫 사례였다.

이인의 국가대표 코치는 오래가지 않았다. 불과 3개월 여 뒤인 12월 초 이인은 진준택 종합화학 코치를 추천하고 이탈리아 1부 리그 시실리의 카타니아 클럽에 입단하기 위해 11년 동안 영광과 아쉬움으로 가득 찬 태릉선수촌을 떠난다.

이인의 이탈리아 프로배구팀 입단은 1년 앞서 이탈리아 팀에 입단한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 동메달 주역이었던 여자 배구 조혜정의 주선으로 이루어졌다. 3천 달러에 숙소제공 조건이었다. “이탈리아에 가기 전에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만약 실리만 생각했다면 이탈리아보다 훨씬 조건이나 대우가 좋은 아랍 쪽을 택했을 겁니다. 무엇보다 선진 배구를 배워 세계로 시야를 넓히고 기술을 익혀 후배들을 돕겠다는 마음이 앞섰습니다.” 이인의 배구에 대한 애정이 그대로 느껴지는 대목이다.








배구 행정인으로 후배들 돕는다
이탈리아에서 2년을 보낸 이인은 19833월 현대자동차서비스 창단과 함께 선수 겸 코치로 국내로 복귀, 본격적인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다. 한때 국가대표로 한솥밥을 먹었던 강만수, 김호철을 스카우트해 1982년부터 1985년까지 라이벌인 고려증권을 제치고 실업무대를 평정했다.

당초 1~2년 뒤에 감독을 한다는 조건이었으나 2년 선배인 송만기 감독과의 의리로 1988년까지 코치로 지내다 이 해 두바이로 자리를 옮겼다. 두바이 알 왓쌀 클럽에서 2년 동안 감독을 마친 뒤 1990년 현대팀 감독으로 복귀해 1991년과 1992년 대통령배 백구의 대제전에서 2연패를 했다.

특히 1992년에는 월드리그와 바르셀로나올림픽 대표팀 감독 영예를 안았다. 이인 감독, 신치용 코치로 진용을 구축하고 하종화, 마낙길, 노진수, 신영철, 오욱환, 임도헌, 박종찬, 진창욱, 강성형, 김세진 등으로 세계의 문을 두드렸으나 월드리그에서 57,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는 12개국 가운데 9위에 그치면서 세계의 높은 벽만 실감한 채 입상은 하지 못했다.

대표 팀에서 물러난 이인은 잠시 배구와 인연을 끊고 현대자동차서비스 영업소장으로 6년을 보낸 뒤 1998IMF 와중에 다시 아랍으로 건너가 쿠웨이트와 두바이에서 5년을 클럽팀에서 감독을 맡아 이들을 상위권으로 끌어올렸다. 이후 귀국해 2006년 대한배구협회 전무이사에 이어 한국배구연맹(KOVO) 경기위원장 2년을 마치고 중국 산동성 청소년대표 코치로 2년을 보냈다.

이인은 1966년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시작해 1980년까지 현역선수로 14, 1983년부터 1993년까지 국내 지도자로 10, 이탈리아에서 선수로 2, 두바이와 쿠웨이트, 중국에서 해외 지도자로 9년 등 35년이라는 세월을 선수와 지도자로 배구와 함께 호흡했다.

선수들 스스로 자신만의 기술을 개발해야 합니다. 단조로운 오픈 공격과 외국인선수에 의존하다보니 개인기가 약해져 이제는 올림픽에도 출전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러 안타깝습니다. 지금 세계 배구 추세는 빠른 배구를 구사하고 있습니다. 선수나 지도자들이 함께 연구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후배 선수들과 지도자들을 향한 따끔한 충고에는 배구에 대한 사랑과 국제무대에서 빛을 잃어가고 있는 남자배구에 대한 안타까움이 그대로 녹아있었다.

그러면서도 이인은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질문에 현대캐피탈 최태웅 감독이나 OK저축은행 김세진 감독처럼 젊은 지도자들이 잘하고 있다이제는 나이도 있는 만큼 지도자로서의 욕심은 없고 다만 후배들을 위해 행정적으로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오기를 바랄 뿐이다고 소박한 바람을 보였다.

/ 정태화 한국체육언론인회 사무총장
사진/ 문복주 기자

(본 기사는 더스파이크 4월호에 게재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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