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여자배구는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지고 있다. 대한민국 구기종목 최초로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따냈다. 그 덕에 여자배구는 대한민국 최고 인기 종목으로 군림했다. 매년 겨울 백구의 대제전, 슈퍼리그에 수많은 관중이 몰린 배경에는 국제대회에서 올려준 빼어난 성적 영향도 컸다.
국제배구연맹(FIVB)이 리베로 제도, 랠리 포인트 시스템, 스파이크 서브 등으로 배구의 모습을 바꾸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세계무대에서 강자 자리를 꾸준히 지켜왔다. 인정하긴 싫지만 우리가 배구 강국으로 자리한 것은 일본 덕분이었다. 그들은 우리보다 먼저 배구를 받아들였다. 시간차 공격과 속공을 처음 시도해 세계정상에 섰다.
비슷한 체형을 가진 일본이 세계무대를 제패하자 우리도 지리적 이점 덕분에 새로운 배구를 빨리 받아들였다. 단순히 모방에만 그치지 않았다. 수많은 배구인들이 노력과 열정으로 새로운 것을 창조했다. 좋은 성과도 많이 만들어냈다. 우리보다 한 발 앞서가는 일본을 따라잡으려고 노력했던 결과였다.
1964년 도쿄올림픽에서 처음 벌어진 한일전 이후 우리 여자배구는 성인대표팀 경기에서 통산 48승86패를 기록하고 있다. 올림픽만 놓고 본다면 본선에서 9차례 만나 2승7패를 기록 중이다. 1964년 도쿄올림픽 이후 4차례 올림픽에서 모두 0-3으로 완패했던 한국 여자배구는 1984년 LA올림픽에서 처음으로 일본에 한 세트를 따냈다.
일본을 올림픽 본선에서 처음 이긴 것은 1996년 애틀랜타 대회였다. 우리 여자배구가 일본을 앞섰던 최고 시기였다. 그 전조는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서 나왔다. 사상 처음으로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따냈다.
2000년 초반까지 한국 여자배구는 일본을 앞섰다. 이후 대표팀 체질을 개선한 일본과 승패를 주고받으며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한 경기를 이기면 다음 경기는 패하는 식이다. 우리로서는 2014년 런던올림픽 동메달 결정전에서 일본에 패한 것이 아쉽다. 프로골퍼 박세리 아버지 박준철 씨는 “한일전이라면 제기차기에서라도 이겨야 한다”고 했다. 그만큼 한일전에는 좋은 결과를 보여줘야 한다. 국민들이 모두 기대한다. 대한민국 운동선수가 한일전을 앞둔 숙명이다. 5월 17일 또 한 번 여자배구 한일전이 예고됐다.
2016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 출전권이 걸린 세계최종예선전이 도쿄에서 벌어진다. 중국이 지난해 월드컵에서 상위 2개 팀에게 주는 올림픽 본선티켓을 확정한 가운데 아시아 대륙 빅4 한국 일본 태국 카자흐스탄이 참가해 올림픽 본선 티켓을 겨룬다. 아시아대륙 1위는 자동으로 본선에 나간다. 세계 최종 예선전도 겸해 유럽 남미 북중미카리브해의 랭킹 2, 3위 등도 참가한다. 총 8개국 가운데 3위 이내에 들어도 본선 티켓을 받을 수 있지만 네덜란드 이탈리아 도미니카공화국이 강한 전력이라 쉽지는 않다.
결국 반드시 숙적 일본을 꺾어야 올림픽 본선진출이 가능하다. 2012년 런던에서 흘린 눈물을 씻어낼 기회다. 역대 한일전 가운데 가장 팬들이 기억할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주전세터 이도희 SBS해설위원과 2012년 런던올림픽 대표팀 감독 김형실 한국배구연맹(KOVO) 경기운영위원장을 통해 한일전의 기억을 더듬어 봤다.
1994년 히로시마 금메달의 주역 , 이도희의 기억
우리가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부터 시작해 2000년대 초까지 김철용 감독이 대표팀을 맡고 있는 동안에는 일본에 앞섰다. 당시 일본 여자배구는 지금 우리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프로출범을 앞두고 과도기였다. 각 팀에 외국인선수가 뛰었다. 일본 대표선수들에는 큰 키와 파워를 가진 선수들이 많았다. 반대로 우리는 키는 작았지만 빨랐고 테크닉이 좋은 선수들이 있었다. 호남정유 선수가 주축이었다. 베스트6 가운데 라이트 김남순(한일합섬)을 제외하고 센터 홍지연, 박수정, 레프트 장윤희, 정선혜 등 5명이 같은 팀이었다.
그 때는 실업배구 시절이라 대표팀 관리도 지금과는 달랐다. 3월에 태릉선수촌에 들어가면 10월에 월드컵을 마칠 때까지 계속 대표팀에 있었다. 11월에야 국내대회를 앞두고 2주 전에 소속 팀으로 돌려보냈으니 모든 선수들이 소속팀보다 대표팀에 더 오래 있었다. 당연히 조직력이 좋아질 수밖에 없었다.
김철용 감독은 한일전을 앞두고 선수들에게 많은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정신력을 많이 강조했다. 그 때문인지 일본전에는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당시 일본은 라이트 오바야시, 센터 요시하라(현 JT감독) 다치미, 레프트 후쿠다 등이 뛰었다. 세터 나가타(현 히사미쓰 감독)가 은퇴하기 전까지는 가끔 우리를 이겼는데 세터가 세대교체 되면서 계속 우리가 이겼다. 지금 생각해보면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때 우리가 했던 배구가 스피드배구였다. 이번 시즌 V-리그에서 현대캐피탈이 했던 것과 같았다. 공격 때 높이보다는 폭을 이용했다. 낮고 빠르고 긴 세트를 주로 했다. 모든 공격수들이 빠르게 움직여 공격준비를 하고 뛰어 들어왔다. 체력소진이 심하기는 했지만 선수들이 모두 작고 빠르고 테크닉이 좋아서 가능했다.
세계에서 처음 시도했던 배구로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땄고 그 해 브라질 세계선수권대회에서도 4위를 했다.(김철용 감독은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에도 같이 가자고 했는데 1996년 초까지만 하고 대표팀을 은퇴했다.) 2000년 초반까지는 우리가 일본에 계속 앞섰다. 일본은 그 결과에 자극을 받아 대표팀 운영체제를 대폭 바꿨다. 전임감독 체제를 도입했고 마나베 감독이 빠르고 테크닉이 좋은 선수들로 대표팀 체질을 바꿨다.
한일전하면 특히 기억나는 것은 수비다. 다른 것은 몰라도 절대로 수비에서 지지 말라고 김 감독은 강조했다. 일본과 경기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수비 대결이다. 일본이 받으면 우리도 받아야 했다. 상대가 무너질 때까지 받다 보면 승패가 결정됐다. 수비가 되지 않으면 일본을 절대로 못 이긴다. 일본은 경기 초반 페인트와 연타 공격을 많이 하는데 이때 우리 수비가 버티고 받아내서 랠리를 통해 반격하면 그 경기는 무조건 이겼다. 초반에 그 싸움에서 이기면 승산은 우리에게 있었다.
(2편에 계속)
글 / 김종건 스포츠 동아 기자
(본 기사는 더스파이크 5월호에 게재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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