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세가 심했던 2012년 런던올림픽 최종예선
김형실 KOVO 경기운영위원장은 여자배구의 터줏대감이다. 국가대표 감독만 3번 했다. 각각 2번 올림픽과 아시안게임 사령탑을 역임했다. 그가 치른 수많은 한일전 가운데 가장 기억나는 경기를 묻자 2개를 꼽았다.
첫 번째가 1997년 그랑프리대회였다. 두 번째가 2012년 런던올림픽 예선전과 3, 4위전이다. 그랑프리 대회 때는 3위를 놓고 일본과 격돌했다. 먼저 세트를 내주고 끌려갔던 한국은 주전세터를 강혜미에서 강미선으로 바꾸면서 흐름을 돌려놓았고 결국 역전승했다. 당시 멤버가 김남순 장소연 등이었다.
두 번째는 런던올림픽이었다. 여자대표팀을 세 번째로 맡은 김 감독이 대회를 앞두고 선수들에게 가장 먼저 한 것은 동기부여였다. 합숙훈련을 시작하면서 내건 구호가 ‘런던 고(London Go)였다. 밥 먹기 전이나 훈련시작 전, 얼굴을 마주칠 때마다 감독이 먼저 “런던”을 외치면 선수들이 “고”를 외쳤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 참가하지 못했던 여자대표선수들에게 우리가 왜 런던에 가야 하는지 목표의식을 심어주는 것이 중요했다. “우선 선수들 마음을 하나로 뭉치게 했다. 소속 팀은 달라도 모두 같은 목표를 향해 뛴다는 생각을 가지게 했다. 우리가 성공해야 내가 성공하고 우리가 실패하면 나는 없다고 세뇌시켰다. 차츰 선수들끼리 뭉쳐지는 것이 보였다. 그렇게 마음이 모이니까 정말 무서웠다”고 기억했다.
이번 올림픽 최종예선은 2012년 5월 19일부터 27일까지 일본 도쿄에서 벌어진 올림픽 예선전과 판박이이다. 일본은 교묘하게 텃세를 부렸다. 한국에 가장 힘든 상대와 2경기를 먼저 배정해놓고 한일전은 그 다음으로 조정한 것이나 오전 10시, 낮 12시 경기로 일정을 들쭉날쭉하게 짠 것도 똑같았다.
당시 한국은 19일 쿠바(3-0 승) 20일 러시아(0-3 패) 22일 세르비아(1-3 패)에 이어 23일 일본과 경기를 했다. 일본은 집요하면서도 사소한 것을 놓치지 않고 훼방을 놓았다. 숙소에서 경기장까지 가는 버스도 10분이면 도착하는 거리였지만 어떤 때는 30~40분 이상 돌아서 갔다. 경기를 앞두고 한 시간 밖에 몸을 풀지 못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한일전이 끝난 뒤에야 김치가 제공될 정도였다.
하지만 한국 선수들은 기죽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기에 더욱 선수들끼리 뭉쳤다. 일본전을 앞두고 김 감독은 예감이 좋았다. 당시 각국 선수단이 묵던 숙소에서 페루 대표팀 박만복 감독이 “뭐가 좋아 그렇게 웃냐”고 할 정도였다. 김 감독은 우리 선수들의 마음가짐에서 좋은 기운을 감지했다. “전혀 긴장되지 않았다. 경기 내내 그랬다”고 했다.
김 감독은 “한일전이야말로 심리전이다. 경험 많은 선수가 유리하다. 특히 한일전은 심리싸움에서 이겨야 한다”고 했다. 그날 일본 선수들이 더 긴장했다. 반드시 우리를 이겨야 한다는 부담감이 컸다. “일본배구가 기본기 특히 리시브와 디그에서 우리를 앞섰는데 그날은 우리보다 조직력이 떨어졌다. 일본의 블로킹이 김연경을 전혀 잡지 못했다”고 감독은 기억했다.
일본은 그날 23개 범실을 했다. 한국은 13개였다. 반드시 런던에 가야 한다는 목표로 뭉쳐 있었던 선수들은 일본 관중들의 일방적인 응원 속에서도 잘 견뎌냈다. 김연경이 34득점으로 에이스 역할을 해낸 덕분에 3-1 승리를 거뒀지만 수훈선수는 따로 있었다. 김 감독은 “김희진”을 꼽았다.
“2세트 중반 위기가 있었다. 경기가 넘어갈 뻔했는데 황연주를 빼고 김희진을 투입했다. 그때부터 김희진이 뒤로 돌아가면서 때리는 공격을 했는데 일본 레프트가 그 것을 전혀 막아내지 못했다. 그 공격이 터지자 일본은 균형이 무너졌다. 반대편에서 김연경이 편하게 공격을 성공시켰다. 김희진(13득점)이 그날부터 국제용 선수가 됐다”고 회상했다.
러시아, 세르비아, 태국, 쿠바, 페루, 대만, 일본, 한국이 참가한 최종예선에서 한국은 러시아에 이어 2위를 했다. 일본은 아시아 1위로 본선행 막차를 탔다. 우리 선수들은 26일 태국전에서 3-0으로 승리하면서 런던행을 확정하자 준비했던 세리머니로 글자가 적힌 유니폼 속의 티셔츠를 보여줬다.
사연 많았던 2012년 런던올림픽 4강
런던올림픽은 12개 팀이 A, B 2개조로 나뉘어 상위 3개 팀이 본선 토너먼트에 오르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한국은 미국(1위), 브라질(2위), 중국(3위), 세르비아(6위), 터키(8위)가 있는 B조에 속했다. 당시 한국 대표팀 세계랭킹은 15위. 6개 팀 가운데 최하위 랭킹이었다. 지옥의 조에 떨어진 것이다.
올림픽을 앞둔 출정식에서 많은 배구인들이 김형실 감독에게 “가서 딱 1승만 하고 오라”고 말할 정도였다. 어느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대표팀이었다.
선수들은 똘똘 뭉쳤다. 그리고 깜짝 놀랄 행보를 시작했다. 7월 28일 미국전 1-3 패, 7월 30일 세르비아전 3-1 승, 8월 1일 브라질전 3-0 승, 8월 3일 터키전 2-3 패, 8월 5일 중국전 2-3 패로 예선일정을 소화했다. 특히 금메달을 땄던 브라질을 3-0으로 이긴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였다. 2승 3패를 기록했지만 풀세트 패배 2경기 덕분에 조3위를 차지했다.
8강 토너먼트 상대는 이탈리아(4위). 8월 7일 벌어진 경기에서 우리 선수들은 이탈리아를 3-1로 누르고 4강에 올라갔다. “8강전을 앞두고 또 한 번 좋은 예감이 왔다. 5월 일본과 예선전 당일 아침과 같은 기분이었다.” 마음이 이상하리만큼 홀가분했다. 홍성진 코치에게 “‘오늘도 일을 낼 것 같다’고 했다”고 김 감독은 기억했다.
이탈리아전에서 우리 선수들은 안 되는 것이 없었다. 정대영 속공과 양효진 이동공격이 잘 풀렸다. 세터 이숙자가 예상도 못한 속공을 만들어내는 바람에 이탈리아 블로킹이 당황했다. 필요할 때마다 김연경이 점수를 뽑았다. 김연경 한송이 블로킹은 이탈리아 이동공격을 잘 막아냈다.
그 경기까지였다. 우리 선수들의 마음은 신바람이 났지만 갈수록 몸은 수많은 펀치를 맞은 권투선수처럼 무거워졌다. 터키 중국과 풀세트 경기를 치르느라 몸은 점점 무거워졌다. 이탈리아 전을 앞두고 처음으로 선수들이 “하루는 쉬고 싶다”고 했다. 훈련을 생략했다. 경기 당일 가벼운 산책과 근육운동만 하고 경기장으로 갔다.
8월 9일 준결승전 상대는 은메달을 딴 미국이었다. 아무리 정신력이 강하다고 해도 몸은 정직했다. 한계가 왔다. “경기 도중에 선수들을 교체 시키는데 몇몇 선수들은 사시나무 떨 듯이 오한을 했다. 워낙 쌓인 체력소모가 커서 그랬다. 힘든 경기를 많이 한 바람에 준비했던 체력이 바닥난 상태였다.”
한국은 미국에 0-3으로 패해 3, 4위전으로 밀려났다. 상대는 공교롭게도 일본이었다. 5월 도쿄에서 벌어진 올림픽최종예선전에서 3-1로 이기고 4위로 밀어낸 기억이 있었기에 내심 승리를 기대했다.
운명의 동메달 결정전, 김형실 감독의 아쉬움
8월 11일 3~4위 전을 앞두고서였다. 김 감독은 대표팀 단장을 찾아갔다. 선수들 체력이 고갈 난 상태였다. 뭔가 대책이 필요했다. 당시 대표팀에는 유명 병원 내과과장이 대표선수단을 지원하기 위해 나와 있었다. 김 감독은 체력보충을 위해 링거주사를 맞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김 감독은 대회기간 내내 전력분석관과 마사지사가 선수촌에 함께 들어갈 수 있도록 ID카드 발급을 요청했다. 어느 누구도 그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선수들 몸은 엉망진창이 돼가도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은 없었다. 선수들을 위한 사기진작도 없었다.
다른 종목의 풍족한 지원소식을 들은 선수들은 허탈감에 빠졌다. 어떤 종목은 4강전을 앞두고 승리수당으로 전 선수에게 300만 원, 1억 원을 내걸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배구는 출정식 때 나왔던 500만 원이 전부였다. 대회 도중 이춘표 대한배구협회 전무가 김형실 감독을 만나 5000달러를 준 것이 유일했다. 이 전무도 ID카드가 없어 선수촌에 들어오지 못하고 밖에서 만나 돈만 주고 갔다. 선수들 사이에서는 그 돈을 돌려주자는 말까지 나왔다.
물론 링거도 맞지 못했다. 비타민 몇 알씩 나눠줘서 먹은 것이 고작이었다. 선수들은 그래도 이미 예선전에서 완승을 거뒀던 일본이었기에 내심 승리를 기대했다. “선수촌에서 만나 경기장까지 가는 버스를 타려고 하는데 우리 선수들 짐 가방이 평소보다 컸다. 선수들은 이미 마음속으로 3위를 했다고 보고 경기 뒤 폐회식에 참가한다는 생각에 단복을 챙겨온 것이었다. 그래서 불안했다”고 감독은 말했다.
불안했던 예감은 적중했다. 지친 선수들 몸은 생각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게다가 1세트 23-22에서 일본 사코다 사오리 공격 때 심판이 오심했다. 그 심판은 평소 국제대회에서 일본에 유리한 판정을 하는 사람으로 알려졌다. 어느 배구인은 “3~4위전을 앞두고 심판배정을 보고 우리가 쉽지 않겠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그대로 됐다. 일본이 우리에게 연속으로 지는 일이 없는 숨겨진 이유”라고 했다.
우리 여자배구 선수들의 위대한 도전은 거기까지였다. 세계 4강에 만족하며 귀국행 비행기를 탔다. 한국여자팀 선전에 고무된 KOVO는 격려금 1억5000만 원을 지급했다.
역대 올림픽 및 예선전 한일전 결과
년도 | 대회 | 장소 | 경기결과 | 최종 순위 |
1964년 | 도쿄올림픽 | 도쿄 | 0-3 패 | 일본 1위/한국 6위 |
1968년 | 멕시코올림픽 | 멕시코시티 0-3 패 | 0-3 패 | 일본 2위/한국 5위 |
1972년 | 뮌헨올림픽 | 뮌헨 | 0-3 패 | 일본 2위/한국4위 |
1976년 | 몬트리올올림픽 | 몬트리올 | 0-3 패 | 일본 1위/한국3위 |
1984년 | LA올림픽 | LA | 1-3패 (15-8,11-15 2-15, 7-15) | 일본 3위/한국 5위 |
1988년 | 서울올림픽 | 서울 | 1-3패 (15-8, 3-15 11-15,8-15) | 일본 4위/한국 8위 |
1996년 | 애틀랜타올림픽 | 애틀랜타 | 3-0 승 (15-10 15-12 15-10) | 한국 6위/일본 9위 |
2000년 | 올림픽예선전 | 도쿄 | 3-1승 (21-25 25-12 25-18 25-23) | 한국 2위/일본 6위 |
2004년 | 올림픽예선전 | 도쿄 | 0-3 패 (19-25 19-25 15-25) | 일본 1위/한국 2위 |
2004년 | 아테네올림픽 | 아테네 | 3-0 승 (25-21 26-24 25-21) | 한국/일본 공동 5위 |
2008년 | 올림픽예선전 | 도쿄 | 1-3 패 (20-25 19-25 25-21 13-25) | 일본 3위/한국 6위 |
2012년 | 올림픽예선전 | 도쿄 | 3-1 승 (25-18 22-25 25-17 25-13) | 한국 2위/일본 4위 |
2012년 | 런던올림픽 | 런던 | 0-3 패 (22-25 24-26 21-25) | 일본 3위/한국 4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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