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고 나면 뒤바뀌는 1위
2005년 출범이래 V-리그 남자부에서 정규리그 타이틀을 차지한 팀은 삼성화재 현대캐피탈 대한항공뿐이다. 그런데 대한항공이 정상에 오른 것은 2010~2011시즌 한 차례뿐이다. 삼성화재와 현대캐피탈이 트로피를 양분한 셈이다. 상위권이 정해져 있으니 순위표에서 나머지 칸을 채우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전문가들과 팬들이 내놓는 시즌 전 예상은 늘 높은 적중률을 자랑했다. 올해는 과거와 전혀 다른 형국이다. 3라운드까지 나타난 이번 시즌의 가장 큰 특징은 새로운 3강 구도 등장이다. 현대캐피탈과 대한항공 한국전력이 그 주인공. 현대캐피탈은 지난해 장착한 스피드 배구를 앞세워 순위표 상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신영석-최민호로 이어지는 강력한 미들블로커진과 토종 아포짓스파이커 문성민의 분전, 여기에 세터 노재욱의 안정적인 경기 운영은 외국인 선수 톤 밴 랭크벨트의 기량 미달까지 잊게 할 정도다. 대한항공은 국가대표 급 라인업을 갖춘 효과를 톡톡히 누리고 있다. 선발로 출장한 선수가 부진할 때면 비슷한 기량을 갖춘 다른 선수를 투입해 흐름을 바꾼다. 가용 인원이 많으니 쉽게 연패에 빠지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트라이아웃 1순위로 합류한 미차 가스파리니 존재도 든든하다. 그 동안 하위팀 이미지가 강했던 한국전력이 보인 환골탈태도 흥미롭다. 2011년 배구계를 강타한 경기 조작 사태 당시 유망한 선수들을 대거 잃고 한동안 고전했지만 전광인과 서재덕을 중심으로 팀 재건에 성공하면서 당장 대권까지 바라볼 수 있게 됐다. 12월 중순 벌어진 순위 변화를 보면 이들 3개 팀이 벌이는 순위 다툼이 얼마나 치열한지를 단번에 알 수 있다. 한국전력이 12월 13일 KB손해보험전에서 승리를 거두며 선두에 오르자 대한항공은 하루 뒤 우리카드를 제물로 1위를 탈환했다. 이에 질세라 현대캐피탈은 15일 삼성화재와의 V-클래식 매치를 가져가며 두 팀을 밀어냈다. 사흘간 모두 1위가 바뀌는 보기 드문 진풍경이었다.
우리카드는 크리스티안 파다르라는 복덩어리의 등장과 함께 다크호스로 떠올랐다. 파다르는 이제 21살이 된 젊은 선수다. 한국 일반학생들과 견주면 대학 신입생에 불과한 나이이지만 기량만큼은 결코 어리지 않다. 1라운드에서는 우리카드의 초반 돌풍을 이끈 공로로 MVP 영예를 안기도 했다. 반면 전통의 강호인 삼성화재와 3연패에 도전하는 OK저축은행은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다. 삼성화재는 공익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박철우라는 새로운 엔진을 장착했지만 주 공격수를 제외한 다른 포지션에서의 한계를 드러내며 상위권에서 자취를 감췄다. OK저축은행은 외국인 선수의 부상으로 최하위까지 미끄러졌다. V-리그가 시작된 이래 단 한 번도 3위 이상에 오르지 못한 KB손해보험은 올해 역시 그저 그런 성적으로 시즌을 마칠 확률이 높다. 물론 지난해 3라운드까지 선두에 승점 10점이나 뒤졌던 현대캐피탈이 막판 뒤집기에 성공한 것을 떠올려보면 아직 포기할 단계까지는 아니다.
3강 구도가 자리를 잡은 것은 여자부도 마찬가지다. 여자부 경우 IBK기업은행이 일방적 독주를 벌일 것으로 예상됐다.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했던 지난해에 비해 주전 선수 자리 변화가 거의 없었고, 이에 견줘 다른 팀들은 전력 보강 또한 활발히 이뤄지지 않으면서 일찌감치 ‘공공의 적’으로 지목됐다. 막상 뚜껑이 열리자 흥국생명과 현대건설 기세는 예상보다 강했다. 흥국생명은 리그 최강 공격 듀오로 꼽히는 타비 러브-이재영 콤비를 앞세워 ‘김연경 시대 영광’ 재연을 꿈꾸고 있다. 현대건설은 주전 미들블로커 양효진 부상에도 차곡차곡 승점을 쌓으며 1위 경쟁에 가세했다. 전년 대비 가장 도드라진 행보를 보이는 팀은 KGC인삼공사다. KGC인삼공사는 지난 2년간 글자 그대로 ‘악몽’같은 시절을 보냈다. 2014~2015시즌 30경기에서 8승(22패)을 얻는데 그쳤던 KGC인삼공사는 2015~2016시즌에는 7승 23패로 더욱 부진해 회복 불능한 수렁으로 빠져드는 듯했다. 동네북이나 다름없던 이들은 올 시즌 13경기 만에 지난해 승수와 같은 7승을 벌써 수확했다. 지난해 3라운드까지 2승 13패에 머물면서 일찌감치 경쟁에서 이탈했지만, 이제는 ‘봄 배구’까지 겨냥하고 있다. 반면 GS칼텍스와 한국도로공사는 사정이 좋지 않다. GS칼텍스 이선구 감독은 성적 부진으로 지휘봉을 반납하면서 올 시즌 1호 중도 퇴진 사령탑이 됐다. 가뜩이나 분위기가 어수선한 한국도로공사에서는 외국인 선수 따돌림 논란까지 터졌다. 케네디 브라이언이 득점에 성공한 뒤 아무도 환호해 주지 않은 장면이 전파를 타자 팬들 사이에서 비난 목소리들이 흘러나왔다. 당사자들이 적극적인 해명에 나서 사태는 일단락됐지만 브라이언은 결국 시즌을 다 채우지 못한 채 미국으로 돌아갔다.
트라이아웃 여파? 공격 종합 상위권 싹쓸이한 토종들
남자부 평준화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올해부터 도입된 외국인 선수 트라이아웃 제도다. 트라이아웃이 시행되기 전 남자 팀들은 거액을 투자해 세계적인 선수들을 모셔오기에 바빴다. 한국 행 비행기에 오른 선수들 면면은 화려했다. 국내 선수들에 비해 한 수 혹은 그 이상 실력을 지닌 외국인 선수들에게 공격 기회가 쏠렸고 개인 기록 순위 상위권은 자연스레 이들 차지가 됐다.
올해는 분위기가 조금은 다르다. 특히 공격 성공률 부문에서는 국내 선수들 약진이 눈에 띈다. 지난해 3라운드까지 공격 종합 1~2위는 현대캐피탈에서 뛰던 오레올과 OK저축은행의 괴물 시몬이 차지했다. 두 선수는 각각 57.71%와 57.25%의 공격성공률을 기록했다. 올 시즌 12월 18일 기준 공격종합 1위는 최홍석(우리카드)이다. 최홍석은 343번 공격 기회 중 193번을 득점으로 연결해 56.27% 성공률을 찍었다. 2~3위도 국내 선수들 몫이다. 김학민(대한항공)이 55.70%(377회 중 210회 성공)로 최홍석 뒤를 이었고, 전광인이 55.47%(375회 중 208회 성공)로 3위를 차지했다. 반면 다른 선수들보다 두 배 이상 많은 863회 공격을 시도한 타이스 덜 호스트(삼성화재)는 476회(성공률 55.16%)만 득점으로 연결하며 4위에 랭크 됐다. 과거 외국인 선수들에 비해 파괴력이 떨어진다는 분석이 가능한 대목이다.
초특급 선수들의 이탈은 상위 선수들 기록 하락으로 이어졌다. 현재 서브 1위인 가스파리니의 세트당 서브 에이스는 0.606개(66세트 40개)인데 이는 지난해 3라운드까지 1위를 달렸던 그로저의 0.770개(61세트 47개)보다 0.164개가 적다. 변화의 폭은 블로킹에서도 심하게 나타나고 있다. 블로킹 부문 1위인 윤봉우(한국전력)는 세트당 0.712개(66세트 47개)로 지난해 시몬이 비슷한 시기에 기록했던 0.826개(69세트 57개)에 훨씬 못 미친다.
무한 경쟁 구도에 돌입한 팀과 무한 도전 체제를 갖춘 개인 기록싸움이 V-리그 후반기를 기대하게 하는 이유이다.
글/ 권혁진 뉴시스 기자 사진/ 더스파이크
* 배구 전문 매거진 <더스파이크> 1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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