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가 작아서라고 단정지을 수 없다. 재주가 많아 멀티 플레이어가 됐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으면 하는 선수. 코트에선 활활 타오르지만 체육관 밖에서는 사랑스러운 복숭아꽃 같다. 수원전산여고 한수진이다.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체육인 피
한수진이 처음 배구를 접한 건 아버지 영향이 컸다. “아빠가 운동을 좋아하세요. 저도 주말마다 배구 동호회를 따라다녔는데 공을 만지다 보니 재미있더라고요. 그래서 초등학교 3학년 때 배구 해보겠다고 했어요. 아빠가 시작하는 건 좋은데 대신 힘들어도 포기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때는 그 한 마디가 너무 무서워서 바로 안 하겠다고 말을 바꿨어요(웃음).”
그러나 한수진은 운명처럼 배구에 끌렸다. “계속 배구 생각이 나더라고요. 저도 아빠 닮아서 운동을 좋아했거든요. 포기 안 할 테니 시켜달라고 했죠. 제가 부모님을 많이 닮았어요. 어머니는 대학 때까지 핸드볼을 했거든요. 두 분 다 승부욕이 아주 강하세요. 유전인지 저도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에요. 경기에서 지면 너무 분해요. 운동에 욕심도 많은 편이에요. 원하는 플레이가 안 되면 그날 경기 끝나고 야간 훈련하러 나와서 될 때까지 해요.”
한수진에게 스스로 배구선수로서 장단점을 꼽아보라고 했다. “장점은 우선 수비력이요. 초등학생 때 선생님께서 기본기를 정말 잘 가르쳐주셨어요. 덕분에 지금까지 수비는 자신 있게 잘하고 있어요. 제 목소리가 많이 쉬었잖아요. 저는 팀에 에너지를 줄 수 있는 선수라고 생각해요. 경기가 잘 될 때나 안 될 때나 팀원들에게 파이팅을 해주는 거예요. 특히 경기가 안 풀릴수록 더 격려해주고요. 단점은 아무래도 키가 작다는 것이죠. 경기 중에 가끔 평정을 잃기도 해요. 저도 모르게 급해지니 플레이에 기복이 생기는 것 같아요.”
역시 한수진 발목을 잡는 것은 신장이었다. 그는 키 크기 위해 본인보다 아버지가 더 고생했다며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저 때문에 아빠가 많이 뛰어다녔죠. 저는 아빠가 해주는 대로 하기만 하면 됐거든요. 아빠가 지인들에게 키 크는 데 좋은 음식, 스트레칭 방법 등을 물으며 정보를 구하러 다녔어요. 이것 저것 배워오시더라고요. 죄송하고 감사했어요.”
주장, 책임감 넘치는 윙스파이커
한수진은 수일여중에 재학 중이던 2014년, 아시아유스여자선수권대회 대표팀에 발탁됐다. 당시 주 포지션이었던 세터로 태극마크를 달았다. 수원전산여고 2학년생이 된 지난해에는 아시아청소년여자(U19)선수권대회에 출전했다. 이번에는 리베로로 출전해 안정적인 리시브와 디그를 선보였다. 덕분에 경기를 지켜본 많은 배구 팬들에게 눈도장을 찍었다. 흔히 선수들은 국제대회를 경험한 후 무언가를 깨닫는다고 입을 모은다. 한수진은 어땠을까?
“보고 배운 게 많은데 말로 설명하기 어렵네요. 그동안 배구를 너무 정해진 틀 안에서만 하지 않았나 싶었어요. ‘좀 더 넓게 생각해야겠구나’라고 깨달았어요. 물론 우리 선수들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외국 선수들은 어떤 팀을 만나도 자신감이 넘치더라고요. 그 중에서도 일본팀이 기억에 남아요. 정말 팀이 하나처럼 보였어요.”
여러 자리를 돌아가며 맡았던 한수진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윙스파이커를 책임진다. 그렇다면 본인이 가장 애착을 갖는 포지션은 무엇일까?
“성격에 맞는 건 공격수예요. 그러나 수비하는 것도 좋아해서 리베로도 괜찮아요. 리베로라는 포지션이 주목은 덜 받아도 보람차거든요. 제가 공을 정성스럽게 받아서 올리면 공격수들이 편하게 때릴 수 있으니까요.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보다는 팀에 좀 더 필요한 선수가 되고 싶어요. 눈에 띄지 않아도 자기 역할을 묵묵히 해주는 그런 선수요.”
한수진은 본인이 윙스파이커로 전향한지 얼마 되지 않아 라이벌은 꼽을 수 없다고 했다. 대신 롤모델을 수줍게 밝혔다. “이번 시즌 뜨고 있는 언닌데요, KGC인삼공사 (김)해란 언니요. 아, 언니는 항상 떠있었죠? 언제나 잘하는 언니! 해란 언니가 팀에서 맏언니잖아요. 경기 중에 자기가 맡은 몫을 해내면서 동생들까지 챙겨주더라고요. 많이 힘들 텐데요. 팀이 어려운 상황일수록 동료들을 격려해주고, 중요한 순간에는 끈질기게 공을 쫓아가서 걷어 올리잖아요. ‘언니는 지금도 저렇게 열심히 하는데 나도 더 분발해야겠다’라고 각오를 다져요. 모든 걸 본받고 싶어요. 사실 만나본 적은 없어요. 경기 보러 가면 관중석에서 지켜보는 게 다예요(웃음).”
이야기를 듣는 내내 한수진에게서 깊은 책임감이 엿보였다. 그럴 것이 올해 3학년이 된 그는 수원전산여고 주장으로 코트에 나선다. “어렸을 때부터 위에 언니들이 있어도 스스로 책임감을 많이 가졌어요. 졸업한 언니들이 잘해준 만큼 저도 더 좋은 주장이 되고 싶었거든요. 팀원들을 다독이면서 한 해를 잘 보내고 싶어요.”
낭랑 18세, 발랄한 여고생의 꿈
코트 밖으로 나오면 영락없는 여고생이었던 한수진. 사진 촬영을 구경하는 후배들에게 “보지마! 여기 쳐다보지마!”라며 울부짖는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엄마 미소’를 짓게 했다. “엄청 활발한 성격이에요. 애들이랑 놀 때는 분위기 메이커고요. 낯은 가리는 편이라 처음 본 사람과는 금방 친해지기 어려워요”라고 한다. 그러나 말과는 달리 그는 초면인 기자를 오래된 죽마고우처럼 맞아줬다.
쉬는 날엔 평소에 하지 못 했던 것들을 하나씩 해본다. 특별하기보다는 소소한 일상에 가까웠다. “일단 집에 가면 학교에 있을 때 쌓여 있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하루 종일 잠만 자요. 알게 모르게 피곤이 쌓이거든요. 어느 정도 충전이 됐다 싶으면 친구들과 만나서 놀아요. 맛있는 거 먹으러 다니는 거죠. 학교에서 숙소 생활을 하다 보니 가족들을 자주 못 보잖아요. 쉴 때는 엄마랑 같이 쇼핑 다니면서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나눠요. 또, 아빠가 취미로 골프도 하시거든요. 아빠 따라서 골프도 치러 가봤어요. 재미있었어요!”
공부에는 소질이 없다고 고백한 한수진. 그래도 책과는 친해지려 했다. “부모님께서 공부는 못해도 책은 많이 읽으라고 하셨어요. 시간 나면 틈틈이 책을 읽긴 해요. 기억에 남는 책은 ‘김연아의 7분 드라마’예요. 김연아는 세계적인 스타잖아요. 그런 김연아가 그냥 만들어진 게 아니구나, 이런 과정과 시련들을 거쳐왔구나 싶었어요.”
한수진 목표는 오로지 프로를 향해 있다. “아직 더 크게 바라보고 세운 목표는 없어요. 프로 팀에 가는 게 첫 번째고요, 다음은 빨리 적응을 마치고 잘하는 언니들을 보고 배우는 거예요. 그 다음엔 잠깐이라도 경기에 출전하는 거죠.”
본인이 원해서 시작한 배구. 일찍이 선택한 이 길을 후회한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마음은 어두웠다. “운동이 힘들어서 그만 두고 싶었던 적은 없었어요. 다만 제가 단신이잖아요. 어렸을 때는 열심히 하면 프로에 갈 수 있을 거라고 믿었거든요. 하지만 현실적으로 키가 많이 작으니까 걱정도 되고 이런 저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도 더 열심히 하면 프로 유니폼도 입고, 가서도 잘할 수 있겠죠?”
그때는 이 질문에 막연히 그럴 것이라고 공감해줬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현재 여자부 6개 구단 리베로들을 살펴보면 김연견(현대건설)과 나현정(GS칼텍스)은 163cm, 김혜선(흥국생명)은 164cm, 노란(IBK기업은행)은 167cm다. 심지어 한수진의 우상인 김해란도 168cm다. 바꿔 말하면 실력만 갖춘다면 한수진에게도 충분히 기회가 올 수 있다는 뜻이다.
인터뷰를 마치며 그에게 각오 한 마디를 부탁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라는 틀에 박힌 대답이 아닌 당찬 무언가를 요청했다. “이거 언니들이 다 보잖아요”라며 울상이던 한수진이 쭈뼛쭈뼛 입을 열었다. “프로에 꼭 갈 거고요. 가서 생활할 때는 막내답게 행동하되 운동할 때만큼은 언니들도 봐주지 않고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내 해맑은 미소로 마무리했다.
글/ 최원영 기자 사진/ 문복주 기자
* 배구 전문 매거진 <더스파이크> 3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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