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안게임 통해 본 미들블로커 역할에 관한 재고

조훈희 / 기사승인 : 2018-11-09 16: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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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남자배구대표팀은 지난 9월 2일 폐막한 2018 지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 은메달을 획득함으로써 최근 수년간 이어진 국제대회 성적부진을 다소나마 만회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한국배구가 이번 대회를 통해 얻은 진짜 자산은 2위라는 성과보다 오히려 결승까지 이르는 과정에서 겪은 '새로운 경험(혹은 생소함)'일 것이다. 이제까지 '한국적 배구 개념'에 충격을 가하는 여러 장면들과 잇달아 맞닥뜨려야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소함은 이미 여러 부분에서 비판이 가해지고 있던 공격측면에서보다, 오히려 수비쪽 특히 미들 블로커의 운용방식과 관련해서 훨씬 크게 느껴졌을 가능성이 높다. 월드리그나 발리볼네이션스리그(VNL)에서 만났던 팀들과 달리, 이번 대회에서 맞붙은 상대국의 미들블로커들 대부분은 한국에 비해 체격과 탄력 등 태생적인 운동 능력면에서 큰 장점을 지닌 선수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 각팀 미들블로커 및 신장(cm)
대만 Lin Yihuei(195), Liu Hongjie(189)
파키스탄 Sheraz Sheraz(192), Muhammad Idrees(195)


인도네시아 Mahfud Nurcahyadi(191), Yuda Mardiansyah Putra(192), Hernanda Zulfi(198)


이란 Ali Shafiei(190), Seyedmohammad Mousavi Eraghi(203)


한국 김재휘(201), 김규민(197), 최민호(198)



그러나 선천적 조건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아시아 각국은 속도와 기술, 시스템과 전술 등 여러 가지 요소들을 복합적으로 활용하여 높이의 열세를 극복하려는 시도를 거듭하고 있다. 요컨대 다른 시각, 다른 패러다임에서 배구가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시간과 공간 개념의 개입을 통해 미들블로커에 대한 인식이 입체적으로 형성되고 있던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 달리 한국이 상하(上下)의 종적인 공간에만 머문 까닭은, 미들블로커를 활용하는 방식이 개별적인 개인능력의 단순 합이 아니라 팀 전체의 수비시스템과 전술의 유기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는 점, 즉 '템포'라는 요소에 의해 초래된 배구관(觀)의 변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번 대회에서 제기된 '미들블로커의 경쟁력 저하'라는 이슈는, 현대배구에서 미들블로커에 대한 역할 및 기능 확대에 대한 인식부족(혹은 부재)이 수비 시스템 및 전술구축의 실패로 이어진 결과에서 비롯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미들블로커를 어떻게 팀 조직내에 온전히 포섭하여 시너지를 만들 것인가?
이번 글을 통해 미들블로커를 중심으로 한 몇 가지 시스템과 전술들의 검토를 통해 위의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보고자 한다.



미들 블로커는 전위 로테이션에 선 세명의 블로커 중 양쪽의 아웃사이드 블로커들 사이에 위치한 선수를 일컫는다. A나 B퀵 등 직접 공격에 가담하기도 하지만, '미들블로커'라는 명칭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이 포지션의 선수는 블로킹을 통한 상대 공격수에 대한 1차 저지선 형성을 주 임무로 삼는다.


그러므로 미들블로커의 역할은 공격보다 상대적으로 수비 시스템에서 크게 부각된다. 대표적 수비 시스템에는 Player-Down(=White defense 또는 Perimeter Defense), Player-Up(=Red Defense), Two-Blocker, One-Blocker등이 있는데, 정도와 방식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든 시스템은 미들블로커와의 관계를 토대로 한다. 여기에서는 보다 직접적으로 미들블로커의 역할을 강조하는 'Two-Blocker'와 'One-Blocker', 두 가지 시스템에 관해서만 다루고자 한다. (본편에 기재되는 각 시스템의 분류 및 호칭은 미국 배구협회의 방식을 따른다.)



#1 투 블로커(Two-Blocker)시스템




투 블로커 시스템은 상대 공격이 어느 지점에서 이루어지든, 그 지점에 두명의 블로커를 배치하여 대응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퍼스트 즉 미들블로커는 코트내의 모든 블록시도에 참가하는 것이 전제되며, 세컨드 블로커는 상대팀 세트가 이루어지는 지점에 따라 결정된다.


예를 들어 오른쪽 공격에 대해서는 왼쪽 사이드 블로커가, 왼쪽에서 이루어지는 세트에는 오른쪽 사이드 블로커가 퍼스트 블로커와 조합을 이루는 방식. 속공을 포함한 중앙에서의 공격은 양 사이드 블로커 중 보다 블록에 능한 선수가 세컨드 블로커를 맡는 것이 일반적이다. 다만 상대 속공수의 공격방향과 기량이 뛰어난 아웃사이드 블로커가 로테이션 상 반대편에 위치해 있을 때 전술적 딜레마가 발생할 수 있으므로, 이러한 경우 세컨드 블로커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선수는 경기 전 미리 결정해 두어야 할 것이다.



2018 남자 세계선수권 블로킹 1위 벨기엔 시몬 반 데 부어드(10번)



투 블로커 시스템은 상대팀의 공격역량과 함께 같은 팀 디거(Digger)들의 능력도 세심히 평가하여 채택해야 한다. 상대 공격수가 세트를 효과적으로 처리할 기량이 부족하거나 볼 컨트롤 및 디그 능력이 뛰어난 선수들을 보유한 팀의 경우, 블로커 수의 증가가 도리어 수비효율을 낮출 수 있다. 따라서, 수비수들은 블로킹이 시도되지 않을 때에 취할 행동들을 사전에 숙지해 둘 필요가 있다.



한편 블로커들의 초기 위치(Base Position)는 후위 디거의 배치에 크게 영향을 끼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보통 네트 너머의 사이드 공격수에 대응하는 아웃사이드 블로커의 위치는 상대 공격에 빠르게 반응할 수 있도록 이동 폭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정해지는 것이 원칙이다. 이와 달리 미들블로커는 볼이 공격이 이루어지는 코트내의 모든 지점에 빠르게 도달할 수 있도록 네트 중앙 부근에 서게 된다.


#2 원 블로커(One-Blocker)시스템



원 블로커 시스템은 일반적으로 경쟁력을 갖춘 블로커가 팀에 두 명(또는 그 이하)이거나, 두 명의 블로커를 투입해야 할만큼 상대팀 공격수들이 뛰어나지 않을 때 선택되는 시스템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주로 상대팀의 중앙속공을 저지하기 위한 용도로 활용된다.



언제나 전위에 한명의 유능한 블로커가 있게끔 두 명의 가용 블로커를 로테이션 상의 대각(Opposite Position)에 배치한다. '로테이션상의 대각'이란, '오른쪽 후위-왼쪽 전위', ' 중앙의 전?후위', 그리고 '오른쪽 전위-왼쪽 후위'를 의미한다.




이들 블로커는 네트의 좌·우 폭 전체를 커버하는 미들블로커에서 역할을 수행하거나 상대방의 주 공격수 앞에 초기 위치를 잡고 블록에 의한 직접 득점, 혹은 상대팀 공격을 둔화시킨다. 그러나 앞서 소개된 '투 블로커 시스템'과 마찬가지로, 이들의 초기 위치는 엄격히 고정된 것이 아니라 상대팀의 세트가 예상되는 지점(주로 측면)에 따라 조정될 수 있다.



블로커는 선호도와 우선순위가 가장 높은 공격옵션의 차단에 집중하도록 하며, 이를 통해 기대되는 효과들은 다음과 같다.



① 상대 공격의 블로킹을 통한 포인트 획득
② 상대 스파이커의 범실유도
③ 블록 바운드를 통한 상대 공격의 둔화?완화
④ 스파이크의 진행 범위와 각도를 좁혀 디거들에게 연결될 수 있도록 지원
한편 디거로서의 역할을 맡는 전위 두 선수(미들블로커를 제외한)의 위치는 디거 배치의 원칙(by Bill Neville) - 디거는 상대의 공격확률이 가장 높은 지점에 배치되어야 한다- 에 의해 정해진다.



블로커의 전술 3가지



위의 두 가지를 포함해 배구의 여러 가지 시스템을 작동시키기 위해서는 블로커와 디거들에게 적용되는 개별적이고 구체화된 행동지침, 즉 전술이 요구된다. 블로커의 대표적 전술 3가지에 관해 알아보도록 하자.



첫 번째 대표적 전술은 리드 블로킹(Read Blocking)전술이다. 이 전술은 블로커가 블록 시도에 앞서 상대 코트의 움직임을 파악(Read)하는데 일정시간을 할당하도록 요구한다. 블로커들은 ㉠ 상대 세터가 어떤 공격옵션을 활용할 수 있는 상황인가 ㉡ 세트가 어떤 공격수에게 향할 것인가 ㉢ 어떤 종류의 세트가 ㉣ 어느 지점으로부터 시작될 것인가 등을 자문(自問)하고, 그 답에 따라 자신의 위치를 결정한다.



리드 블로킹은 블로커들에게 상대 팀의 패스·세트와 진행루트, 디거들의 위치 및 역량 등 경기진행 상황을 총체적으로 파악하게 하여 그들을 상대공격의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지점으로 이끈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이 전술은 볼이 상대편 세터로부터 공격이 시작되는 지점까지 이동하는 시간이 비교적 긴 상황 즉 상대공격이 빠른 템포에서 진행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 활용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빠른 템포로 이루어지는 공격에 대해서도 미들 블로커의 파악과 반응이 가능하다면, 리드 블록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리드 블로커들은 상대공격을 예상할 수 있는 시간과 기회를 많이 갖는다는 장점에 반해, 언급된 바와 같이 빠른 템포의 공격에 대한 취약점도 함께 지닌다. 아울러 예측(Read)의 실마리를 감추는데 능숙한 세터를 상대할 경우, 리드 블록으로부터 얻어지는 효과가 크게 하락할 수 있다는 위험성도 존재한다.



두 번째는 릴리스 블로킹(Release Blocking)전술이다. 릴리즈 블로킹은, 미들블로커로 하여금 세트 가능성이 가장 높거나 블록 혹은 공격의 강도·속도를 늦추는데 상당한 기술을 요하는 특정한 상대 공격수(또는 공격옵션)를 막을 수 있도록 고안된 전술이다. 이 전술 하에서 미들블로커는 스카우팅 리포트나 통계, 상황인식 및 직감 등에서 얻어지는 정보를 기반으로 공격시도 확률이 가장 높은 대상을 따라 움직이게(Release) 된다.


릴리스 블록은 어떻게 상대팀을 파악하는가에 따른 '하이 리크스 하이 리턴(High Risk, High Return)'의 성향이 강한 전술이다. 블로커가 정확히 상대 패턴을 예측한다면 결정적인 상황에서 블로킹에 성공할 수 있겠지만, 그 반대라면 완전히 무용지물이 될 위험 또한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상대 세터가 의도적으로 릴리스 블로커에 견제받지 않은 공격수(또는 공격옵션)의 세트비율을 높인다면 이 전술의 약점은 더욱 두드러진다. 많은 이동거리로 인한 미들블로커들의 피로 누적 역시도, 쉽사리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전술은 상대 세터로 하여금 팀내 주 공격수를 전담하는 블로커의 존재를 의식하게 함으로써 상대적으로 기량(효율)이 떨어지는 다른 공격수로 세트를 유도하는 방식으로도 수비에 기여할 수 있다.



세 번째는 커밋 블로킹(Commit Blocking)전술이다.
상대팀에 블로커의 전담(Commit)을 통해서만 무력화(또는 블록)할 수 있을 정도의 뛰어난 속공수가 한명이상 있을 때 쓰이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전위 3명의 블로커 누구나 커밋 블로커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음에도 주로 미들블로커에 의해 활용되는 전술이다.



빠른 템포로 이루어지는 상대 공격을 막아내야 하기 때문에, 커밋 블록은 종종 상대 세터의 속공 활용여부를 알지 못한 채 시도된다. 커밋 블로커는 상대의 속공 세트가 시도하기 직전에 이미 점프해 있어야 하는데, 이는 토스가 시작된 시점에 블로커의 손이 상대편 네트 너머에 있거나 적어도 네트 위쪽에 도달하게끔 하기 위함이다.



커밋블록 전술의 가장 큰 메리트는 상대 속공시도에 대한 가능성을 잠재적으로 낮춘다는데 있다. 커밋블록에 기반한 수비전술은, 상대팀 세터에게 속공 세트시에 고려해야 할 요소들이 많아진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잦은 속공시도에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줄 수 있는 까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팀들은 커밋 블록 전술을 자주 활용하지 않는다. 실제 경기에서 속공비중이 크지 않고, 많은 경우 블로커가 공격과 무관한 장면에서 낭비된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보상없는 희생의 가능성'이 커밋 블록 전술의 난점으로 지적된다. 그러나 상대 세터의 공격옵션 선택이 커밋 블록에 의해 플랜 B로 대체된다면, 이를 커밋 블로킹 전술의 효과로 여겨질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수비측면과 관련된 미들블로커의 시스템과 전술들을 간단히 정리해 보았다. 물론 위에 기술된 극히 일부의 내용들만으로 미들블로커가 팀 차원의 수비시스템과 전술에서 어떠한 가치를 지니며 어떠한 상호작용을 통해 역할을 수행하는지를 명확히 파악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미들블로커에 대한 가치를 재고(再考)하고 나아가 현대배구에 관한 이해를 넓힐 수 있는 작은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이 글을 썼다.



2018 세계선수권 대회가 3주간의 열전을 치르고 지난달 9월 30일 막을 내렸다. 베르나르두 헤젠지에 의해 정립된 템포배구 패러다임을 넘어 '포스트 템포배구'를 모색하는 배구 열강들의 노력들은 이번 대회에서도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그리고 2년 뒤 도쿄올림픽에서도 이러한 추세는 계속될 것이다.


반면 여전히 '템포'의 개념조차 정립되지 않은 채인 한국배구의 낙후된 인식, 그 한 가운데에 '미들 블로커'가 놓여있다. 세계와의 배구시차(時差)가 계속 벌어져가는 지금, 과연 우리는 그리고 한국배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글/ 조훈희 배구칼럼니스트 사진/ AVC, FIVB 제공


(위 기사는 더스파이크 10월호에 게재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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