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강호 중국과 일본은 예선에서 탈락, 한국은 예선 통과하며 8강에 올랐다. 세 나라의 희비가 엇갈린 2020 도쿄올림픽이다.
2020 도쿄올림픽 개막 전만 하더라도 중국과 일본이 탈락할 거라고 예상한 전문가는 거의 없었다. 중국은 2016 리우올림픽 금메달의 주인공이고, 일본은 도쿄올림픽 모의고사였던 2021 발리볼네이션스리그(VNL)에서 4강에 오른 팀이었다.
반면, 한국은 2021 VNL에서 3승 12패, 15위에 머물렀다. 세계와의 격차를 크게 느꼈다. 최근 국제 대회에서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한 게 사실이었다. 또한 몇몇 선수들의 이탈과 부상으로 제 전력을 구축하지 못했다는 평도 있었다.
하지만 역시 배구공은 둥글었다. 뭐든 뚜껑을 까봐야 안다. 세 팀의 운명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한국의 1차 목표는 8강이었다. 케냐전 승리, 도미니카공화국·일본 두 팀 중 한 팀을 잡아 2승으로 8강에 턱걸이하는 게 현실이었다. 1차전 브라질전에서 0-3 완패를 당하며 불안하게 출발했지만, 2차전 케냐전(3-0승), 3차전 도미니카공화국전(3-2승)에서 승리를 거두며 일단 소기의 목표를 달성했다.
한국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달려갔다. 그리고 숙명의 라이벌 일본전에서 무서움을 보여줬다. '하나의 팀'이 되면 어떠한 것도 무서운 것이 없다는 걸 보여줬다. 5세트 12-14에서 연속 4점을 내며 국민들을 열광의 도가니에 빠뜨렸다. 라바라니 감독을 비롯해 모든 선수들은 기쁨을 주체하지 못했고, 코트에서 8강 진출의 기쁨을 만끽했다.
주장 김연경이 무릎을 테이핑으로 꽁꽁 싸맨 상태로 경기를 뛰었고, 한쪽 다리는 혈관이 터져 붉은 상처가 보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고통을 숨기고 원팀으로 만들었다. 또한 김수지, 양효진, 박정아, 김희진 등도 힘을 냈고 순간순간 비디오 판독을 신청하며 득점을 가져온 라바리니 감독의 '감'도 좋았다. 많은 팬들은 한국 경기를 보며 '이게 원 팀이구나'라는 걸 느꼈다.
2016 리우올림픽 금메달의 팀, 중국은 첫 경기부터 터키에 0-3으로 완패하며 좋지 못한 스타트를 보였다. 당시 세계적인 슈퍼스타 주팅이 4점에 머물렀는데, 중국 대표팀 랑핑 감독은 첫 경기가 끝난 후 "주팅의 손목이 다시 그녀를 다시 괴롭힌다"라고 말했다.에이스 주팅의 고질병이던 오른쪽 손목 통증이 다시 그녀를 괴롭히기 시작한 것이다.
주팅의 공격 효율이 높지 않다 보니 중국의 공격 역시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개막 3연패에 빠졌다. 4차전 이탈리아전과 5차전 아르헨티나전에서 3-0 완승을 거뒀지만 이미 탈락이 확정된 상황이었다. 결국 디펜딩 챔피언 중국은 조별리그 탈락이라는 '이변'과 함께 짐을 쐈다. 아르헨티나전 종료 후 몇몇 선수들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선수들도 예상치 못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주팅은 손목 수술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1차전 케냐전 3-0 승리를 거두며 순조롭게 출발했다. 하지만 코가 사리나가 케냐전을 치르면서 부상을 당했고, 2·3차전을 뛰지 않았다. 일본은 에이스의 공백을 느끼며 연패에 빠졌다. 하지만 일본은 침착했다. 이미 코가의 복귀 및 모든 포커스를 한국전에 맞췄다. 모두의 예상대로 코가는 한국전에 맞춰 복귀했고, 4차전에서 승부를 보겠다는게 일본의 시나리오였다.
하지만 이는 현실이 되지 못했다. 세트스코어 2-2로 팽팽하게 맞선 5세트, 일본은 14-12로 먼저 매치 포인트를 선점했으나 이를 승리로 연결짓지 못했다. 주장 김연경을 축으로 한국은 똘똘 뭉쳐 있었고 연속 4점을 따내며 일본의 승리를 저지시켰다. 일본의 수도 도쿄에서 일본을 울린 한국 선수들의 저력은 대단했다. 일본 선수들은 경기 후 충격에 빠진 듯 한동안 코트를 멍하니 쳐다봤다.
경기 후 일본 ‘닛칸 스포츠’와 인터뷰에서 코가 사리나는 “반드시 이겨야 했던 경기였다. 그래서 패배가 더 실망스럽다”라고 말할 정도로 일본의 충격은 컸다.
이 충격은 5차전 도미니카공화국전까지 이어졌다. 승리를 해야 8강에 진출하는 경기였지만 일본 선수들은 힘이 없었다. 1세트 10점에 그칠 정도로 무기력한 경기력을 보여줬고, 결국 파워 있는 공격으로 힘을 낸 도미니카공화국에 1-3으로 패하며 자국에서 수모를 당했다. 1964년 도쿄올림픽 금메달의 영광을 다시 재현하고자 했던 일본이었지만 그들의 꿈은 현실이 되지 않았다.
기세등등하게 2020 도쿄올림픽에 출전했던 옆나라 일본과 중국은 탈락했다. 반면, 한국은 8강 진출.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국가는 한국뿐이다. 미국과 브라질의 여전한 파워, 유럽(ROC, 이탈리아, 세르비아, 터키) 강세 속에서도 아시아의 자존심을 지켰다.
많은 배구 팬들은 한국 선수들의 투혼과 열정에 많은 박수를 보내고 있다. 이왕이면 메달을 따고 오면 좋겠지만, 메달을 따지 않고 와도 그들이 충분히 잘 했다는 걸 알고 있다. 선수들의 하고자 하는 의지는 이미 조별예선을 통해 안방으로 전달됐다.
또한 라바리니 감독이 일본전 승리 후 코트 위로 달려나와 선수들과 함께 기뻐했다. 그리고는 코트에 주저 앉아 얼굴을 감싸는 장면이 찍혔는데 이는 모든 팬들의 마음을 울렸다. 그간의 마음 고생이 사진 한장으로 모두 표현됐기 때문이다.
아직 올림픽이 끝나지 않았지만 벌써부터 방송계에서는 대표팀 선수들을 섭외하기 위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미 몇몇 예능프로그램에서 구단에 문의 전화를 하고 있는 상황. 이전부터 높았던 여자 선수들의 인기는 더욱 높아져 하늘을 찌르고 있다. 당연한 수순이다.
VNL에서 저조한 성적, 몇몇 선수들의 이탈 등이 있었어도 선수들은 모두 이겨내고 8강 진출에 성공했다. 이제 한국의 다음 경기는 오는 4일 열리는 터키와 8강전이다. 상대 전적 2승 7패 열세다. 터키는 에브라르 카라쿠르트를 비롯해 한데 발라딘, 에다 에르뎀, 메르엠 보즈 등이 스타급 선수들이 즐비하다.
하지만 지금까지 보여준 투혼과 열정이라면 터키도 이기지 못할 상대는 아니다.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 동메달 이후 45년 만에 메달 획득에 도전하는 가운데, 우리의 태극낭자들은 이 고비를 넘고 팬들에게 다시 감동을 줄 수 있을까.
사진_FIV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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