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의 에이스를 틀어막기 위한 고희진 감독의 변칙수가 통했다. 직접 코트 위에서 뛴 것은 아니었지만 셧아웃 완승에는 분명히 그의 지분이 있었다.
배구 경기에서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는 코트 위에 있는 선수들이 좋은 경기를 펼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선수들의 경기력 외에도 승패에 영향을 끼치는 요소는 다양하다. 감독의 전술 구사 역시 그 중 하나다. 상황에 맞는 적절한 전술 구사는 전력의 열세를 극복하거나 경기의 흐름을 바꾸는 역할을 하곤 한다.
29일 대전 충무체육관에서 치러진 정관장과 현대건설의 도드람 2023-2024 V-리그 여자부 1라운드 경기는 감독의 전술 구사가 경기 결과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던 경기였다. 이날 고희진 감독은 현대건설전을 위한 맞춤형 용병술을 꺼내들었고, 이것이 효과적으로 작용하며 정관장은 현대건설을 세트스코어 3-0(25-22, 25-21, 25-16)으로 꺾었다.
고 감독은 경기 전부터 양효진을 견제하는 것이 현대건설전의 핵심 요소임을 강조했다. 그는 “정호영과 양효진을 전위에서 붙이고자 한다. 오더 싸움을 준비해둔 게 있다”며 양효진을 막기 위한 비책을 준비해왔음을 미리 밝혔다.
그 비책은 이른바 ‘위장 선발’이었다. 1세트를 따낸 뒤 고 감독은 2세트 선발 오더에 신인 강다연과 곽선옥을 포함시켰다. 그러나 두 선수의 자리는 자신들의 본 포지션이 아닌 미들블로커 자리였다. 이후 2세트가 시작하자마자 이다현이 먼저 전위에 나온 것을 확인한 고 감독은 전위에서 출발하는 강다연 대신 박은진을 투입했다. 이후 곽선옥이 전위에 올라오자 고 감독은 곽선옥을 빼고 정호영을 투입했다.
이 전술의 핵심은 현대건설의 미들블로커들이 어떻게 나서는지를 확인한 뒤, 양효진과 정호영이 전위에서 맞붙도록 만드는 것에 있었다. 각 팀의 오더는 세트가 시작되기 전에 미리 제출되기 때문에 세트 시작 전에는 양효진과 이다현 중 누가 먼저 전위에 나설지를 확실히 알 수 없다. 따라서 신인들을 먼저 투입해서 교체 횟수 2회를 희생하는 대신, 불확실한 오더 싸움을 피하고 양효진과 정호영을 100%의 확률로 맞붙이는 선택을 한 것.
전술은 적중했다. 1세트에 공격으로 4점을 올리며 50%의 공격 성공률을 기록했던 양효진은 위장 선발에 의해 견제를 당한 2세트에 1점의 공격 득점을 올리는 데 그쳤다. 공격 성공률도 33.33%로 떨어졌다. 이날 양효진은 최종 공격 성공률 46.67%를 기록하며 이번 시즌 들어 가장 낮은 공격 성공률을 기록했다.
고 감독이 ‘위장 선발’ 전술을 꺼내든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는 지난 시즌 3라운드에 펼쳐진 현대건설과의 맞대결에서도 양효진을 견제하기 위해 같은 전술을 구사했다. 당시에는 이예솔과 이지수가 2~5세트까지 선발 명단에 이름을 올렸고, 양효진과 전위에서 맞물리는 선수의 자리에 정호영이 바로 교체로 투입됐다.
그 경기에서도 정관장(당시 KGC인삼공사)은 현대건설을 풀세트 접전 끝에 꺾었지만, ‘위장 선발’ 전술 자체가 양효진을 확실하게 견제하는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양효진은 해당 경기에서 51.72%의 공격 성공률로 20점을 퍼부었고, 전술이 활용된 2~5세트 동안 올린 점수만 총 17점이었다. 그러나 이번 경기에서는 그때보다 더 성장한 정호영이 양효진의 공격 위력을 성공적으로 떨어뜨리며 ‘위장 선발’이 보다 성공적인 전술로 기능했다.
정관장이 현대건설을 상대로 거둔 셧아웃 승리의 가장 큰 요인은 정관장 선수들의 고르고 빼어난 활약이었다. 그러나 고 감독의 절묘한 변칙수 활용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승리의 요인 중 하나였다. 앞으로 다가올 현대건설과의 다섯 차례, 혹은 그 이상의 맞대결에서도 이 변칙수가 계속 나올지 지켜볼 일이다.
사진_KOV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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