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여자 배구 V리그 사이타마 아게오 메딕스라는 팀이 있다.
사이타마에 연고를 둔 종합병원이 팀을 운영한다. 일본 전국에 8개의 대형 병원을 둔 거대 의료 기업이다. 1978년부터 배구단 운영을 시작해 2001년 정식으로 실업 배구단을 만들었다. 2003년 일본 V리그 2부 리그에 승격 했다. 이후 1부 리그 도전만 4차례였다. 좌절 끝에 마침내 2014년 JT 마블러스를 꺾고 1부 리그 팀이 됐다. 이후 다시 2부 리그에 떨어지는 등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1부 리그에 복귀했다. 지난 시즌 5위를 기록한 탄탄한 전력이다.
아게오에는 아시아쿼터 선수로 필리핀 국적의 산티아고 알리야 다프네가 있다. 신장 195cm의 미들 블로커다. 에이전트는 한국인 진용주 유나이티드 스포츠 대표다. 필리핀의 국민 스타였던 그가 배구를 하는 모습을 담은 U튜브 영상을 보고 직접 현지로 날아가 계약했다.
필리핀의 각종 연령대 대표 선수로 활약했던 산티아고는 2018년 아게오에서 2박 3일간 입단 테스트를 받은 끝에 유니폼을 입었다. 최근 새 시즌을 앞두고 구단과 계약을 연장했는데 여기에는 구단이 내건 조건이 큰 역할을 했다. 산티아고에게 일본 대표팀으로 뛸 기회를 책임지고 만들어주겠다는 구단의 약속에 군말 없이 도장을 찍었다.
산티아고의 소원은 2024파리올림픽 출전이다. 하지만 필리핀 대표팀은 아시아권에서도 상위권에 들지 못한다. 일본 중국 태국 대한민국을 누르고 올림픽에 출전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래서 그는 일본 대표팀 소속으로 올림픽에 나가려고 한다. 한 국가의 대표 선수로 뛰면 최소 2년이 지나야 다른 나라의 대표 선수가 될 수 있다. 산티아고는 이를 위해 결단을 내렸다.
일본에서 4년째 거주 중인 산티아고는 5년을 채우면 일본인으로 귀화를 신청할 수 있다. 산티아고는 다른 길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최근 그는 아게오의 3번째 코치이자 일본 대표팀의 막내 코치와 약혼을 발표했다. 올해 26세로 사랑하는 남자와 장래를 약속했을 것이라고 믿고 싶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몽골 출신의 어르헝이 한국인 아버지의 양녀가 되는 과정을 거쳐 V리그 페퍼저축은행의 선수가 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행보다.
일본 배구계는 그의 신장과 기량을 탐낸다. 산티아고의 소원도 물론 잘 알고 있다.
세계 정상급의 수비 능력과 빠른 플레이를 자랑하는 일본이지만 최근 국제 대회 시상대에 서지 못하고 있다. 가장 최근의 올림픽 메달은 2012년 런던올림픽이었다. 3~4위 결정전에서 우리를 이겼다. 배구는 잘하지만, 결승 토너먼트에서 무너지는 일본의 약점은 높이다. 단신의 선수들이 아무리 빠르게 움직이고 상대의 모든 공격을 다 받아낸다지만 결국 중요한 경기에서는 높이와 힘이 승패를 좌우했다. 2022세계선수권대회에서도 일본 여자 대표팀은 브라질에 먼저 2세트를 따내고도 패해 4강 행이 좌절됐다. 경기는 잘했지만 졌다. 2년 앞으로 다가온 파리올림픽도 큰 변화가 없이는 메달이 힘들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낀 일본은 변화를 준비 중이다.
일단은 자국에서 신장이 좋은 유망주를 찾아내 육성하려고 한다.
이런 시도를 보여준 것이 최근 바레인에서 벌어졌던 제21회 AVC 아시아청소년남자선수권대회(U-20)에 출전했던 일본 대표팀이었다. 이 대회에 국제 심판으로 참가했던 최재효 심판은 일본 배구의 변화를 확인했다. “일본의 플레이가 달라졌다. 그동안 우리가 알던 조직력과 스피드 위주의 배구에 장신화를 접목했다. 장신 위주로 뽑은 과정까지는 구체적으로 모르겠지만 키 큰 선수들을 선발하고 육성하는 과정을 치밀하게 준비해온 것은 확실하다”고 했다.
대표팀의 플레이를 하루아침에 그것도 감독만 바꾸면 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우리와는 달리 일본은 이처럼 오랜 준비 시간을 가지고 정밀한 계획을 세워서 움직인다. 대표팀의 장신화를 위해 일본은 밖으로도 눈을 돌리고 있다. 없는 사람을 애써서 찾기보다는, 보다 효과가 빠르고 효율적인 방법이 귀화다. 일본은 이전부터 순수 혈통을 고집하지 않았다. 사회 곳곳에 혼혈인들이 많다. 다른 스포츠 종목에서도 혼혈 선수를 많이 받아들였고 성공적인 결과도 만들었다.
도쿄올림픽에서 여자 대표팀의 주전 세터로 뛰었던 모미 아키는 페루인의 피가 섞였다. 2022세계선수권대회 14명 엔트리에 포함된 미야베 아이리, 아메제 자매는 아버지가 흑인이다. 대표팀 40인 명단에 있는 오쿠무 오바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모두 신장이 180cm를 조금 넘기거나 그보다 못 미친다. 이것으로도 성에 차지 않는 일본은 대표팀의 완벽한 퍼즐이 될 장신의 선수를 찾고 있다. 일본인과 결혼해 일본 국적을 갖게 될 산티아고는 좋은 대안으로 보인다.
이미 아게오는 산티아고의 국적변경을 위해 변호사를 선임했고 일본 대표팀의 마나베 마사요시 감독도 그의 기량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일본은 이처럼 대표팀의 전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다양한 방법을 찾고 있는데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세계선수권대회와 VNL에서 1승 16패에 그친 외국인 감독을 놓고 ‘기회를 더 줘야’ ‘아니다 바꿔야 한다’는 의견이 팽팽한 가운데 대한배구협회는 아직 어떤 움직임도 없다. 내년도 국제 배구 스케줄을 고려한다면 어떤 방식이건 빠른 결론이 나와야 한다.
대한배구협회는 미래를 위한 투자도 하지 않는다. 올림픽과 함께 가장 큰 대회에 대표팀이 출전했다면 기술 전문가를 파견해 우리 대표팀은 물론이고 현재 세계 배구계의 흐름을 분석해서 보고서를 만들어야 한다. 그런 자료가 쌓여서 한국 배구의 자산이 되겠지만 미래를 내다볼 생각조차 못 한다. 게다가 우리 팀이 예선전에서 탈락하자 세계선수권대회를 향한 관심조차 급격히 식어버렸다. 정말 배구를 잘하는 팀의 플레이에서 배우고 세계 배구의 흐름을 알고 싶다면 예선 이후 경기를 누군가는 정확히 보고 자료를 남겨야 하는데 아직 우리는 그런 수준에 가지 못했다. 이번에 폴란드로 출장 간 협회 사람은 오한남 회장과 사무처장, 국제부 직원뿐이다. 예선 탈락 뒤 돌아온 이들에게 기술 분석 보고서를 기대할 수는 없다.
우리보다 훨씬 앞서가는 일본은 2026년 남녀 세계선수권대회도 유치하려고 한다. 선수 출신의 가와이 준이치 일본 배구협회 회장은 FIVB 회장을 만나 일본의 대회 유치에 협조해달라고 했다. 일본의 돈에 자주 휘둘리는 FIVB가 거의 개최를 승인해주는 분위기다. 일본은 필리핀과 중국을 공동 개최국으로 끌어들이려고 한다. 우리는 언제 이런 큰물에서 놀 것인가.
세계선수권대회에서 확인했듯 우리 배구는 끝 모를 밑바닥으로 추락했다. 그곳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은 배구협회와 배구인들이 스스로 찾아야 한다. 제대로 된 계획과 뼈아픈 성찰, 분석, 과감한 투자가 모여야 해답은 나올 것이다. 무엇보다 리더가 현실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사진 FIVB, 아게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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