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쉬쉬 해오던 페퍼 저축은행의 뇌관이 마침내 터졌다.
2023-2024시즌부터 팀을 이끌기로 한 아헨 킴 감독이 돌연 한국을 떠났다. 양측은 연봉 30만 달러에 3년 기한의 계약을 맺었지만, 24일 출국으로 계약은 파기됐다. 구단은 결별 이유를 “가족 관련 개인적인 사정 때문”이라고만 했다. 워낙 갑작스러운 결정이라 결별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 지를 놓고 나중에 치열한 공방을 벌일 가능성도 크다.
구단은 공식 발표문에서 “AI페퍼스의 아헨 킴 감독이 가족과 관련한 개인 사정으로 사임 의사를 밝혔고, 구단은 심사숙고 끝에 불가피한 결정임을 이해해, 6월 23일 자로 계약을 종료하기로 하였습니다. 아헨 킴 감독은 믿고 응원해 주신 팬들과 구단 및 선수에 죄송하고 감사한 마음을 전해왔으며, 구단도 아헨 킴 감독의 앞날에 좋은 일이 가득하길 기원합니다. AI페퍼스는 신임 감독이 선임 되기 전까지 이경수 수석코치를 중심으로 훈련을 이어 나갈 것이며, 현재 적합한 후보군을 국내외에서 검토해 조기에 신임 감독을 선정해 시즌 준비에 차질이 없도록 할 계획입니다”라고 했다.
하지만 세상 어느 구단도 보도자료에 모든 진실을 다 밝히지 않는다. 당연히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믿는 사람은 많지 않다. 구단이 진짜 이유를 밝히지 못하는 가운데 양측이 결별을 앞두고 어느 정도 조율을 마친 것으로만 보인다. 이미 새로운 감독도 후보를 정하고 팀의 최고 책임자가 인터뷰까지 마친 것으로 알려졌다. 인터뷰한 2명은 외국인 감독이다.
2022-2023시즌 도중인 2월 17일 페퍼저축은행은 시즌 도중에 사퇴한 김형실 창단 감독의 후임으로 한국계 미국인인 그를 선임했다. 구단은 미국 NCAA(전미대학체육협회) 산하 아이비리그에서 능력을 발휘한 육성 전문가라고 자랑했지만, 그는 V-리그에서 단 한 경기도 뛰어보지 못하고 도망치듯 팀을 떠나는 사상 초유의 결과만 남겼다. 이제 페퍼 저축은행은 시즌 개막을 3개월여 남겨두고 새 감독을 서둘러 물색해야 한다. 누구도 이해하기 힘든 황당한 상황이다.
2022-2023시즌 도중에 한국을 찾았던 그는 선수들과 동행하며 다음 시즌을 준비해왔다. 시즌을 마치고 미국으로 휴가를 떠났을 때만 해도 큰 문제가 없어 보였지만, 아니었다. 이후 FA보상 선수 결정 등의 중요한 사안에서 새 감독의 목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보상선수로 이고은을 빼앗겼다가 다시 데려오는 과정에서 신인드래프트 1순위와 유망주 미들 블로커를 넘겨주는 상식 밖의 결정이 나왔던 배경이다. 이런 가운데 아헨 킴 감독의 입국이 예상 외로 늦어진다는 얘기만 간간이 흘러나왔다. 구단은 “별다른 문제가 아니다”고 했지만, 대형 법률 회사를 고용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는 소문이 좁은 배구계에 퍼졌다.
페퍼 저축은행은 지난 시즌에도 외국인 선수 니아 리드가 입국 당시 액상 대마초를 몰래 들여오다 출입국관리소에서 걸려 큰 문제가 되자 쉬쉬하면서 대형 로펌을 사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결국 니아 리드는 외국인청에서 국외추방을 하기 전에 도망치듯 한국을 떠났다. 팬과 V-리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저지른 범죄행위에 직접 사과한 적도 없다.
느닷없이 출국한 아헨 킴 감독의 갑작스러운 결별은 병역법 때문이라는 시선도 있다.
이를 알기 위해서는 대한민국의 국적법과 병역법을 살펴봐야 한다. 1985년생으로만 알려진 아헨 킴 감독은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부모가 한국 국적을 소지해 선천적복수국적자다. 복수국적자는 대한민국 법령 적용 때 대한민국 국민으로 병역 의무, 납세 의무 등을 진다. 선천적복수국적자는 피치 못할 사정으로 해외에 오래 머무를 수 있지만 37세까지만 병역 연기가 가능하다. 국내에 돌아오면 반드시 병역을 마쳐야 한다.
페퍼저축은행은 이와 관련해 "아헨 킴 감독은 이미 37세를 넘어서 병역 의무가 없다. 우리가 처음에 감독과 접촉했을 때부터 병무청에 이 부분을 확인도 했다"면서 대한민국 국민으로 한국에서 일을 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강조했다. 구단은 또 일명 유승준 법으로 잘 알려진 "2018년 5월 1일 이후에 대한민국 국적을 이탈하거나 상실한 외국 국적의 동포에게는 40세가 되는 해의 12월 31일까지 재외동포(F-4) 비자 발급이 제한되도록 한 규정에도 아헨 킴 감독은 전혀 해당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페퍼 저축은행은 "외국에서 태어났지만 부모의 국적 때문에 병역 의무를 가진 복수국적자들이 한국에 왔다가 대한민국 국적을 포기하지 않은 사실을 뒤늦게 알고 군에 가는 사례가 많다고 들었다. 많은 해외 동포들이 20세 때 국적을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자라다 보니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되는데 아헨 킴 감독은 이 부분에 해당되지 않는다. 그는 태어난 뒤 미국에서 계속 살았고 중학교 때 단 한 번 사촌을 만나러 한국에 온 것이 전부다. 한국에서 일 하는데 전혀 문제 없다. F-4 비자가 필요 없다"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더욱 의문으로 남는 갑작스러운 계약 해지다.
구단은 "정말로 말 못할 개인 사정이다. 한국인의 정서로는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돈보다는 가족과의 일이 우선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결정을 내렸다. 그동안 이 문제로 구단과 얘기를 나누다 2주 전에 합의를 했다. 개인적인 일이기에 구단에도 구체적으로 이를 밝히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고 설명했다. 페퍼 저축은행의 코칭스태프도 이번 결정이 비밀리에 전격적으로 이뤄진 것임을 확인해줬다. "23일 아헨 킴 감독이 갑자기 함께 일을 못하게 됐다. 가정 문제로 돌아가겠다고 했고 다음날 미국으로 떠났다"고 털어놓았다
구단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아헨 킴 감독이 처음 한국에 왔을 때는 여러 청사진을 펼쳤지만 최근 아내가 미국의 팀과 계약하면서 오래 떨어져야 하는 상황이 되자 페퍼 저축은행의 감독 자리를 스스로 포기했다는 뜻이다. 가족을 먼저 생각하는 미국인의 정서라면 이해가 되겠지만 한국인의 정서로는 그야말로 책임 회피에 지도자로서의 커리어에 스스로 상처를 내는 결정이다. 만일 미국에서 새로운 일자리를 보장 받지 않았다면 쉽게 이런 결정을 내리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여튼 어떤 이유든지 아헨 킴 감독이 다시 V-리그에서 활동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병역 의무와 책임 회피 모두 배구 팬의 감정상 쉽게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V-리그 출범 3년 째를 앞둔 페퍼 저축은행은 팀의 짧은 역사에 비해 다양한 얘기를 만들고 있다. 그런데 관련한 내용이 주로 부정적이고 때로는 다양한 법률 지식마저 필요하다. 앞으로 또 어떤 일이 나올지 기대되고 동시에 걱정된다.
사진 KOV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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