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리그 개막을 앞둔 9월, IBK기업은행 김호철 감독은 이례적으로 많은 팀과 연습경기를 했다. 이유가 있었다. 외국인 선수 아나스타시야 구르바노바의 기량이 실전에서 어느 정도 통하는지 확인이 필요했다. 새 시즌을 앞두고 선택했던 러시아 국적의 선수는 많은 의문 부호를 남겼다. 애당초 외국인 선수 선발에서 지난 시즌 교체 선수로 좋은 활약을 했던 산타나를 지명하자는 얘기도 있었지만, 김호철 감독은 모험을 택했다. 아쉽게도 감독이 원했던 2명의 아웃사이드 히터가 지명을 앞두고 빠져나가면서 계획이 틀어져 버렸다. 우여곡절 끝에 전체 4순위로 아나스타시야를 선택했다. 33세로 여자부 역대 최고령 외국인 선수였지만 그 만큼의 경험을 기대했다.
막상 훈련을 시작해보니 손을 봐야 할 점이 많았다. 190cm의 신장은 마음에 들었지만, 파괴력이 떨어졌다. 무엇보다 리시브를 잘하지 못했고 원하는 곳으로 공을 때리는 기술이 모자랐다. 어릴 때 체계적으로 배구를 배운 선수가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다. 동료 선수가 맨투맨을 하면 공이 여기저기로 튀었다. 코치가 대신 전담할 정도였다. 그래도 감독은 팀에 필요한 퍼즐로 사용할 수 있는지 다양한 포지션으로 테스트를 했다. 그 과정에서 김희진이 리시브도 가담했다. 그는 GS칼텍스와의 연습경기 뒤 “내가 리시브를 한다니까 상대 선수들이 아예 서브를 넣을 때부터 나만 보고 있더라”고 털어놓았다. 아나스타시야는 리시브 능력이 김희진보다 더 떨어졌다. 아포짓으로 기용해봤지만 2단 연결을 때리는 해결 능력이 아쉬웠다. 신장을 이용한 블로킹 능력은 좋았는데 미들블로커로 쓰기에는 사이드 스탭이 느렸다. 고민은 깊어만 갔다.
설상가상 함께 뛰는 선수들의 반응도 좋지 못했다. 연습경기를 마칠 때마다 선수들은 감독에게 “우리 용병 어떻게 해요”라고 입을 모았다. 한두 번이 아니었다. 외국인 선수에게 많은 것을 의지하려고 토종 선수들의 기준으로 봤을 때 기대치 이하라는 판단이 서자 그들은 내심 교체를 원했다, 김호철 감독은 “선수 교체는 구단이 판단할 일이다. 너희들은 조용히 하라”며 더 이상 이 문제에 관여하지 말라고 했다.
선수들은 이런 반응을 당사자도 모르지는 않았다. 오랜 선수 경력으로 눈치는 있었다. 게다가 지난 시즌의 외국인 선수 산타나와는 달리 친화력도 떨어졌다. 그는 훈련이 끝나면 혼자 방에 틀어박혀 있는 시간이 많았다. 구단은 “아무리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인 선수라도 너희들이 따뜻하게 대해주지 않으면 다 안다. 서로 위치를 바꿔서 생각해 보라”며 아나스타시야를 따뜻하게 대하라고 선수들에게 당부했다. 그날 이후 모든 선수는 아나스타시야와 하루에 한 번씩 다정한 인사말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결국 시즌을 앞두고 운명의 시간은 왔다. 한 경기도 뛰지 않고 선수를 바꾸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던 구단도 마침내 교체를 결정했다. 연습경기 결과, 공격 성공률과 효율, 리시브 성공률 등에서 토종 선수보다 떨어진 숫자가 모든 것을 말했다. 10월 4일 구단이 교체를 통보하던 날 그는 “나를 위해서도 팀을 위해서도 내려야 하는 결단이라고 생각한다”면서 되려 고마워했다. 그가 이런 말을 했던 결정적인 경기가 있었다. 바로 현대건설과의 연습경기를 마친 뒤였다. 상대 야스민과의 맞대결 뒤 아나스타시야는 팀을 떠날 결심을 굳혔다. 계약 해지를 통고하던 순간 군말 없이 받아들인 그는 “그동안 잘 대해준 구단과 선수들에게 감사한다”고 했다. 구단 입장에서는 가장 힘든 업무인 계약 해지 서류 작성을 잘 도와준 뒤 뒤끝 없이 떠난 선수가 두고두고 고마울 것이다. 구단은 규정대로 45일치 연봉, 약 3500만원을 지급했다. 다음 행선지는 인도네시아 팀이 될 가능성이 크다.
선수들이 원했던 결정이 나온 뒤부터는 구단의 일이었다. 시간과의 싸움이 시작됐다. 이미 이심전심으로 마음이 통했던 산타나가 미국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즉시 연락했다. 마침 산타나는 푸에르토리코 리그를 마친 뒤 쉬고 있었다. 통역에게 자주 연락하며 자신의 상황을 업데이트해온 산타나였다. 김호철 감독도 만일을 대비해 “몸을 잘 만들고 있으라”고 당부했다.
지난 시즌 IBK기업은행에서 너무나 행복한 시즌을 보냈던 산타나는 한시라도 빨리 한국에 오고 싶어 했다. 그는 비 시즌에 결혼해 유부녀가 됐다. 사무국은 하루라도 빨리 산타나를 입국시키려고 발 벗고 나섰다. 지원팀장이 외국인 선수의 출입을 담당하는 출입국 관리소를 매일 찾아가서 읍소하다시피 했다. 그 정성과 노력이 통했다. 애당초 “입국 허가가 나오는데 4주 가량 걸릴 것”이라고 했지만 담당자가 내 일처럼 도와준 덕분에 시간이 훨씬 줄어들었다. 마침내 미국에서 취업 비자를 받기 위해 대기하던 산타나에게 들어오라는 사인이 떨어졌다. 그런데 마지막 관문이 남았다. 항공편이 없었다. 코로나19가 만든 여행 규제가 풀리면서 해외여행 수요가 엄청나게 늘었다. 오고 싶어도 올 방법이 없었다.
그가 타고 와야 할 한국행 비즈니스 좌석이 하나도 없었다. 남은 좌석은 프레스티지석이었다. 비용 차이가 어마어마했다. 다시 사무국에서 총력으로 매달려서 방법을 찾아냈다. 그런 면에서 대한민국은 역시 인연으로 맺어진 사회였다. 평소 맺어둔 좋은 관계가 큰 힘이 됐다. 산타나는 15일 귀국하자마자 팀 훈련장으로 달려갔고 정들었던 선수들을 보면서 눈물을 글썽였다. 그동안 산타나를 오매불망 기다리던 선수들에게는 깜짝 선물이었다. 이 모든 과정이 매스컴에서는 단 한 줄 ‘IBK기업은행 외국인 선수 교체’로 압축됐다.
8일 뒤인 23일 화성에서 시즌 첫 경기를 치른 IBK기업은행은 GS칼텍스에게 0-3 완패를 당했다. 매 세트 초반 앞서갔지만 넉넉한 점수 차이를 지키지 못하고 연속 실점으로 무너졌다. 아직 실전 감각이 부족한 산타나는 1세트만 뛰고 3득점 37.5%의 공격 성공률을 기록했다. 산타나가 시즌 끝까지 어떤 활약을 보여줄지는 누구도 모른다. 떠나보냈던 아나스타시야가 다른 리그에서 엄청난 활약을 할 수도 있다. 다만 이제 IBK기업은행 선수들은 더 외국인 선수 핑계는 댈 수 없다. 그들이 원했던 외국인 선수와 어떤 식으로든 좋은 결과를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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