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지션 변경의 어려움도, 끝 모를 연패의 부담감도 정지윤을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그에게는 모든 시련을 견디고 비상하겠다는 의지만이 가득했다.
2023 국제배구연맹(FIVB) 발리볼네이션스리그(VNL)에서 한국은 또 한 번의 12전 전패를 당했다. 변화하고 발전한 부분도 있었지만, 승리를 거두기에는 아직 충분치 않았다. 계속되는 연패는 선수들의 몸과 마음을 지치게 만들었다. 정지윤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포짓과 아웃사이드 히터를 오가며 분전했지만 팀의 연패를 막을 수는 없었다. 이 과정에서 본인의 경기력도 다소 기복이 있는 모습이었다. 대회는 끝났지만 몸도 마음도 휴식이 필요했다.
그러나 정지윤은 1주일 정도의 짧은 휴식만을 취한 뒤 경남 고성 일대에서 진행되는 현대건설의 하계 전지훈련에 합류했다. 훈련 2일차인 11일 <더스파이크>와 만난 정지윤은 “오랜만에 팀 동료들이랑 같이 운동하니까 즐겁다. (합류 이전에) 1주일 정도면 많이 쉰 거라고 생각한다. 다가오는 컵대회도 있고 하니 이 정도면 충분하다. 컨디션도 되게 좋다”며 밝은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정지윤에게 먼저 VNL을 마친 소감을 물었다. 그는 “개인적으로도, 팀적으로도 부족한 부분이 많다는 것을 느꼈다. 어떤 것들이 바뀌어야 할지는 콕 집어 말하기 어렵지만, 모두가 더 노력해서 국제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더 많은 점수를 올리기 위해서는 어떤 것들을 해나가야 하나를 고민해봐야겠다고 느꼈다”는 소감을 들려줬다.
정지윤은 대회 초반에는 아포짓으로 코트를 밟다가, 이후에는 다시 원래 포지션인 아웃사이드 히터로 돌아가기도 했다. 이에 대해 정지윤은 “세자르 감독님이 팀 훈련에 합류하신 뒤에 아포짓으로 급하게 포지션을 변경하게 됐다. 계속 아웃사이드 히터로 훈련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 정신이 없긴 했다. 개인적으로는 오른쪽에서 공격 각이 잘 안 나와서, 이전부터 아포짓 자리에서 때리는 공격이 별로 편치 않았다. 그래서 조금 더 어려움을 느꼈다”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대회 기간 동안 정지윤의 경기력에는 명암이 공존했다. 우선 그간 정지윤을 괴롭혀왔던 리시브는 생각보다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정지윤은 “그 동안은 리시브에 워낙 중점을 두고 준비를 했다보니, 거기에 대한 스트레스도 컸다. 그런데 이번 대회를 준비할 때는 오히려 리시브에 대한 부담을 좀 내려놨다. ‘잘 못 받더라도 공격으로 해결하자, 리시브 때문에 내 장점이 사라지지 않도록 하자’는 마음을 먹은 게 주효했다. 또 감독님도 내가 이해하기 쉽도록 단순하고 간결한 방식으로 리시브를 많이 가르쳐주셨다”며 개선된 리시브의 비결을 밝혔다.
그러나 공격에서는 아쉬움이 남았다. 특히 정지윤의 공격을 분석한 상대의 블록과 수비 위치 선정에 고전하는 경기들이 많았다. 정지윤 스스로도 이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 부분에 대해 느낀 것이 되게 많다. VNL에는 블로킹이 낮은 곳이 하나도 없는 상대 팀도 많아서, 손끝을 보고 밀어치거나 각을 내서 블록을 피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아직 그런 부분에서 부족함이 있었다. 그 순간들을 잊지 않고 계속 연습해야겠다, 안일해지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스스로의 부족했던 점을 돌아봤다.
대회 전패라는 뼈아픈 현실에 선수들의 책임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정지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부족했던 것은 선수들의 기량이었지 절실함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내 경기력이 안 좋았던 날보다는 팀의 연패가 계속 길어질 때가 더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꺼낸 정지윤은 “3주차에 한국에서 경기가 열렸음에도 승리를 못 가져왔을 때는 죄책감을 느꼈다. 정말 힘들었다.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을지 계속 생각하고 고민했는데 쉽게 답을 찾지 못했다”며 3주차에 느꼈던 무력감과 슬픔을 솔직하게 밝혔다.
그러나 정지윤은 이조차도 발전의 시간으로 여기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는 “이런 힘든 시간을 보내는 것도 쉽게 할 수 없는 경험이고,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는 시간이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했다”며 씩씩한 모습을 보였다. 또한 소속팀에서 자신의 약점을 보완해줬던 황민경과 김주하의 이탈에 대해서도 “처음에는 걱정도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감을 잃기보다는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 시기다. 새로 들어온 선수들도 다 잘하는 선수들이니까, 다시 좋은 팀을 만들어 가면 된다고 생각한다”며 의젓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정지윤에게 조심스럽게 마지막 질문을 건넸다. 만약 지금 소속팀이나 대표팀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본인의 마음이 가는대로 포지션을 고를 수 있다면, 아웃사이드 히터에 남고 싶은지 미들블로커로 돌아가고 싶은지를 묻는 질문이었다. 그는 “이 자리를 빌려 확실하게 말씀드리고 싶다. 미들블로커로 돌아가고 싶지 않고, 포지션을 변경한 것에 대해 후회하지도 않는다. 분명 아웃사이드 히터는 어려운 자리다. 할 것도 많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는다. 하지만 나는 이 자리에서 더 성장하고 싶은 생각뿐이다. 전혀 돌아가고 싶지 않다”며 굳은 의지를 드러냈다.
인터뷰를 마치며 정지윤은 “응원해주시는 분들에게 정말 감사드린다. 그분들 덕분에 힘들 때도 금방 이겨낼 수 있는 것 같다. 앞으로도 위를 바라보며 계속 나아갈 것이고,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분명하게 약속하겠다”고 결연한 각오를 다진 뒤 “믿어 주세요”라는 선수들의 인터뷰에서 쉽게 듣기 힘든 부탁을 덧붙였다. 분명 한국 배구는 변화하고 발전해야 한다. 그리고 그 첫 걸음은 발전을 향한 의지를 갖는 것이다. 정지윤의 진심이 담긴 말을 들으며 그가 비록 먼 길일지라도 옳은 방향으로 첫 걸음을 딛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사진_고성/박진이 기자, 더스파이크DB(박상혁 기자)
영상_고성/박진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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