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대회가 경험의 장이 되길 원했던 토미 틸리카이넨 감독다운 라인업이었다. 마지막 경기까지도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시도했다.
2023 아시아배구연맹(AVC) 남자 클럽 배구선수권이 시작되기 전, 토미 틸리카이넨 감독은 계속해서 ‘경험’을 강조했다. 모처럼의 국제대회인 만큼 당연히 성적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도 새로운 것들을 시도하고 젊은 선수들에게 기회를 주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실제로 틸리카이넨 감독은 산토리 선버즈(일본)전 패배로 우승 도전이 좌절된 뒤 계속해서 다양한 시도를 했다. 바양홍고르(몽골)와의 상위 라운드 E조 경기에서는 정진혁을 처음으로 선발 출전시켰고, 손현종을 아포짓으로 기용했다. 쿠웨이트 스포르팅 클럽(쿠웨이트)과의 5~6위 결정전 진출전에서는 손현종의 포지션을 아웃사이드 히터로 바꿔 공격적인 라인업을 가동했다.
그렇게 찾아온 대한항공의 이번 대회 마지막 경기는 이틀 만에 다시 만난 바양홍고르와의 7~8위 결정전이었다. 마지막인 만큼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 검증된 라인업을 가동할 수도 있었지만, 틸리카이넨 감독은 또 한 번 실험실을 개장했다. 강승일을 처음으로 선발 리베로로 기용했고, 정한용, 곽승석, 이준을 동시에 선발 출전시켰다.
세 명의 아웃사이드 히터가 동시에 코트에 서는 모습을 보면서 현장에서는 ‘누가 아포짓일까’에 대한 궁금증이 커졌다. 우선 '표면상으로는' 이준이 아포짓이었다. 이준은 리시브를 면제받으면서 오른쪽에서 공격을 자주 구사했다. 그러나 사실상 고정된 아포짓은 없었다. 세 선수는 공격 위치나 점유율, 연결 가담 등에서 거의 동등하게 역할을 분담했다.
사실상 아포짓 없이 아웃사이드 히터 세 명을 쓰는 전술의 장점은 뚜렷했다. 리시브나 수비, 2단 연결 같은 기본기의 측면에서 팀적인 안정감이 더 올라갔다. 아포짓 자리에서 뛰는 선수도 언제든 리시브나 수비에 가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는 자연스럽게 공격 패턴의 다양화로도 연결됐다. 실제로 직전 경기였던 쿠웨이트 스포르팅전에서 임동혁에게 지나치게 의존했던 정진혁은 한결 여유롭고 다채로운 경기 운영을 선보였다.
V-리그가 개막되면 이 전술은 쉽게 보기 어려울 가능성이 높다. 아포짓인 외국인 선수 링컨 윌리엄스가 다시 합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석석 듀오’곽승석과 정지석을 필두로 정한용, 이준, 손현종에 아시아쿼터 외국인 선수 마크 에스페호까지 양질의 아웃사이드 히터들을 보유한 대한항공이라면 언젠가는 한 번 쓸 기회가 있을 전술이기도 하다.
꼭 이 전술을 실제로 쓰지 않더라도, 정한용과 이준 같은 젊은 선수들에게 새로운 자리와 전술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됐다는 것만으로 이날의 실험실 개장은 유의미했다. 거기에 셧아웃 승리(25-21, 25-23, 25-18)라는 결과까지 동시에 챙겼으니 일석이조다.
틸리카이넨 감독의 뚝심 아래 대한항공 선수들은 마지막 경기까지도 소중한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이제는 한국으로 돌아가 그 경험들을 실력으로 승화시킬 차례다.
사진_한국배구연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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