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서영과 김채원이 컨디션 난조에 시달린 동료들의 빈자리를 깔끔하게 메웠다. 자칫 IBK기업은행에 불리할 수 있었던 경기의 판도를 뒤집는 조커 역할을 수행했다.
30일 광주 페퍼스타디움에서 열리는 IBK기업은행과 페퍼저축은행의 도드람 2023-2024 V-리그 여자부 4라운드 경기를 앞두고, IBK기업은행은 대형 악재를 맞이했다. 팀의 붙박이 주전인 표승주와 신연경이 심한 감기 몸살을 앓으며 컨디션 난조에 시달렸다. 표승주는 아예 경기장에 동행하지 못했고, 신연경은 우선 선발로 나섰지만 결국 경기 도중 코트를 빠져나갔다. 승점 1점을 따기도 쉽지 않을 정도의 악조건이었다.
그러나 IBK기업은행에는 언제 어디서든 팀을 위기에서 구할 수 있는 조커 카드가 있었다. 육서영과 김채원이 그들이었다. 육서영은 표승주의 자리에 선발 출전해 56.67%의 공격 성공률로 18점을 터뜨렸고, 2세트 중반부터 신연경을 대신해 코트를 밟은 김채원은 리시브 효율 50%‧디그 성공률 92.86%를 기록하며 든든하게 팀의 후방을 지켰다. 두 선수의 맹활약 속에 IBK기업은행은 페퍼저축은행을 세트스코어 3-0(27-25, 25-16, 25-12)으로 꺾고 기분 좋게 2023년을 마무리했다.
경기 종료 후 인터뷰실을 찾은 두 선수는 나란히 몸살에 시달리고 있는 동료들의 이름을 가장 먼저 언급했다. 육서영은 “승리로 한 해를 마무리해서 기쁘다. 그러면서도 (표)승주 언니가 이 자리에 함께 하지 못하는 게 아쉽기도 하다”는 소감을, 김채원은 “2023년의 마지막 경기를 승리로 장식해서 좋다. (신)연경 언니의 빈자리를 채울 수 있어서 더 기뻤다”는 소감을 전했다.
두 선수의 소감을 전해들은 뒤, 먼저 육서영과 경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평소에 선발보다는 교체로 코트를 밟는 경우가 많다 보니, 언제든 들어갈 준비는 하고 있는 편이다”라고 밝힌 육서영은 2세트 중반에 강타와 연타를 자유자재로 섞으며 ‘배구 도사’ 같은 면모를 보였던 것에 대해 “솔직히 어제(29일)까지는 오히려 컨디션이 안 올라오는 느낌이어서, 이번 경기가 쉽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폰푼 게드파르드(등록명 폰푼)랑 합을 맞추면서 여러 대화를 나누다보니 컨디션이 좋아진 것 같다”며 폰푼과의 호흡을 잘 다진 것이 주효했음을 밝혔다.
육서영은 지난 시즌에도 김희진이 부상으로 코트에 나서지 못할 때 아포짓으로 나서 준수한 활약을 펼친 바 있다. 이번에는 아웃사이드 히터로 나서 표승주의 공백을 메웠다. 긴 시즌 동안 생길 수 있는 다양한 변수에 대처할 수 있는 유틸리티 플레이어로서의 가치가 크다. 자신의 역할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는지 묻자 “자부심? 그것까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며 멋쩍은 웃음을 지은 육서영은 “다만 언니들의 몸 상태가 좋지 않을 때 대체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게 됐다는 것, 그리고 팀에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됐다는 것 자체가 기분이 좋다”고 씩씩한 목소리로 답했다.
이어서 김채원과도 여러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육서영과 달리 경기 도중에 투입된 김채원에게 더 부담이 크지는 않았는지 묻자 김채원은 “연경 언니가 되게 잘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솔직히 부담이 컸다. 하지만 코트 안에서 언니들이 파이팅을 많이 해줬고, 포기만 하지 말자는 생각으로 경기에 임했다. 너무 많은 생각을 하면 몸이 더 굳을 것 같았다”고 투입 당시를 돌아봤다. 항상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기회를 기다리며 준비해야 하는 제2 리베로로서 그 기회를 잡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묻는 질문에는 “연습도 연습이지만,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심적으로 중심을 잘 잡아야 뭐든 할 수 있다. 나 같은 경우 항상 ‘할 수 있다’고 되뇐다”며 단단한 멘탈을 잡는 것이 핵심이라는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김채원에게 IBK기업은행에서 보내는 커리어는 프로 무대에서의 두 번째 커리어다. 그는 2015-2016시즌부터 2020-2021시즌까지 GS칼텍스 소속으로 총 69경기‧144세트에 출전했고 이후에는 실업 무대로 자리를 옮겼다. 이번 시즌이 V-리그로 돌아온 뒤 치르는 첫 시즌이다. 프로 커리어 2기에 임하는 각오는 어떤지 묻자 김채원은 “예전에는 항상 긴장했고, ‘실수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컸다. 지금은 ‘일단 자신 있게 해보자’, ‘후회 없이 해보자’는 마음으로 임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자신감도 붙고, 나도 하면 할 수 있구나 싶은 생각도 든다. 다들 옆에서 많이 도와준 덕분”이라며 한 층 과감해지고 단단해진 자신을 소개했다.
김호철 감독은 경기 후 인터뷰실에서 “선수들에게 고맙다. 이번 승리는 선수들 스스로의 노력으로 쟁취한 결과다. 앞으로도 잘해줬으면 좋겠다”며 선수들을 향한 애정이 담긴 격려를 남긴 바 있다. 수훈선수 인터뷰를 마치며 두 선수에게 김 감독의 격려에 대한 화답을 부탁했다. “아~ 어려운데?”라는 말과 함께 웃음을 터뜨린 육서영은 “솔직히 말하겠다. 칭찬을 조금 더 많이 해주셨으면 좋겠다. 휴식도 조금 더 주셨으면 좋겠다(웃음)”는 천진난만한 이야기를 꺼냈다.
이후 김채원도 김 감독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남겼다. 그는 “주전은 아니지만, 제가 필요한 때에 저를 믿고 넣어주셔서 감사하다. 저를 앞으로도 믿어주셨으면 좋겠다. 그러면 자신 있는 플레이로 보답하겠다. 아, 그리고 휴식도 좀 더 주셨으면 좋겠다”며 조금 더 의젓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러자 유치한 사람이 될 위기에 처한 육서영은 다급하게 “저도 한 마디 더 하겠다. 저도 믿고 넣어주셨으면 좋겠다(웃음). 감독님이 저를 코트에 넣기 전에 많은 고민을 하신다는 걸 알고 있다. 새해에는 조금 더 신뢰를 보여주셨으면 좋겠다”며 애교스럽게 한 마디를 보태기도 했다. 이후 두 선수는 팀의 11승을 자축하는 포즈로 사진 촬영에 응한 뒤 기분 좋게 인터뷰실을 빠져나갔다.
V-리그의 시즌은 길다. 베스트7에 해당하는 선수가 컨디션 난조나 부상 등의 이유로 자리를 비워야 하는 경우는 모든 팀에게 생기기 마련이다. 그때 그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게 해줄 수 있는 백업 선수를 보유하는 것이 바로 강팀의 조건이다. 육서영과 김채원이 있는 IBK기업은행은 강팀의 조건 한 가지를 확실하게 충족했다.
사진_광주/김희수 기자, KOV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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