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2023시즌 대한항공은 개막 이후 단 한 번도 1위 자리를 내주지 않고 독주하고 있다.
‘와이어 투 와이어’ 우승이라는 기착지를 향해 고공비행 중이다. 전반기 내내 라운드마다 5승 1패를 마크했다. 최근 체력이 떨어져 고전했던 4라운드에는 4승 2패를 했다. 여자부 현대건설처럼 연승이 아주 길지도 않지만, 연패도 없다. 우리카드와 OK금융그룹이 각각 2차례 이겼고, 1월 24일 올스타전을 앞둔 4라운드 마지막 경기에서 KB손해보험도 이겼다. KB손해보험은 무려 5년 만에 대한항공을 상대로 3-0 완승을 기록했다. 4라운드 종료까지 대한항공은 19승 5패 승점55이다. 2위 현대캐피탈과 승점 9차이다. 추격이 만만치는 않다.
대한항공은 코로나19로 봄 배구가 열리지 않았던 2019-2020시즌을 제외하고는 최근 6년간 챔피언결정전 단골이었다. 3연속 우승을 노리는 이번 시즌도 그럴 가능성이 크다. 시즌 전 미디어데이 때 상대 팀 감독과 선수들은 “대한항공의 전력이 가장 탄탄하다”고 입을 모았다. 무엇보다 대한항공의 장점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안정감이다. 아웃사이드 히터 정지석 곽승석이 버티는 탄탄한 리시브 라인을 주 엔진으로 삼아서 리그 최고의 세터 한선수 유광우가 팀을 매끄럽게 운영한다. 사실상 국가대표 주전 세터 3자리가 대한항공의 몫 일만큼 거의 국가대표급 팀 구성을 자랑한다.
좌우와 중앙 등 공격의 균형도 잘 잡혔다. 오랫동안 함께 손발을 맞춰온 시간이 만들어준 신뢰와 경험도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다. 그래서 위기는 있지만, 쉽게 흔들리지는 않는다. 시즌 36경기의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는데 필요한 백업자원도 충분하다. 임동혁과 정한용, 김민재는 미래의 대한항공을 상징한다. 최근 몇 년간 프런트가 올바른 방향을 설정하고 현명하게 리빌딩 작업을 추진해온 덕분이다. 육성도 잘했다. 2년차 미들블로커 김민재의 급성장은 이번 시즌 V-리그 최고의 수확이다. 이들이 아니더라도 다른 팀으로 가면 주전으로 뛸 선수들이 많다. 몇 년 뒤에 누가 팀을 이끌어갈지 쉽게 그림도 그려진다. 덕분에 남은 숙제도 단순해졌다. 리베로와 베테랑 세터의 뒤를 이어줄 누군가를 찾아내야 한다.
배구 팬 모두가 아는 대한항공의 장점은 기록으로도 잘 드러난다.
4라운드까지의 성적을 기준으로 대한항공은 공격 종합, 서브, 블로킹, 후위 공격, 시간차 부문 1위다. 속공과 퀵오픈은 2위다. 요즘 배구의 키워드인 강력하고 전략적인 서브로 상대의 리시브를 흔들고 블로킹으로 잘 막는다. 여기에 더해서 빠른 공격으로 쉽게 점수를 낸다. 속공 퀵오픈 부문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 대한항공의 장점은 스피드에 있다. 최고의 세터 한선수와 유광우를 둔 덕분이다. 모기업 항공사의 이미지와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다.
반면 오픈공격 부분은 최하위다. 그만큼 높이에는 약점이 있다. 상대가 대한항공을 이기기 위해서는 이 부분을 파고들어야 한다. 최대한 대한항공의 공격에서 속도를 빼앗아 오픈공격이 이뤄지게 만들어야 한다. 물론 이것도 말처럼 쉽지 않다. 리시브와 수비도 대한항공은 상위권이다. 팀의 약점인 리베로 탓에 리시브 효율이 현대캐피탈에 뒤진 2위지만, 연결에서 이를 만회한다. 세트 부문은 대한항공이 1위다. 그래서 상대가 쉽게 이기기 어렵다.
대한항공의 연결이 눈에 띄게 좋은 점은 상대 공격수를 따돌리는 절묘한 능력 덕분이다. 좋은 세터는 때리기 좋게 공을 잘 올려준다. 이와 함께 공격수에게 노 블로킹, 1-1 블로킹 상황을 자주 만들어준다. 결정력이 높은 남자배구에서는 이 부분이 중요하다. 1-1 상황에서의 주도권은 공격수에게 있다. 대한항공의 세터들은 이 능력에서 압도적이다. KB손해보험과 치른 시즌 개막전 이후 23경기 가운데 대한항공은 무려 22경기에서 1-1 블로킹 상황 횟수가 상대보다 많았다. 오직 12월 28일 현대캐피탈 경기에서만 38-39로 이 수치가 뒤졌다. 상대보다 1-1 블로킹 상황이 많았던 대한항공의 공격을 상대는 버거워한다. 물론 다양한 공격과 안정된 수비, 연결에서 빈틈을 찾기 어려운 빠른 팀이 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대한항공에 지금의 색깔을 입힌 사람은 박기원 감독이다. 2016~2017시즌부터 4년간 재임하면 많은 것을 변화시켰다. 그가 사령탑으로서 했던 수많은 결정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로테이션에서 아웃사이드 히터 정지석과 곽승석의 자리를 고정한 것이다. 1번 한선수, 2번 정지석, 3번 미들블로커, 4번 아포짓, 5번 곽승석, 6번 미들블로커로 고정된 대한항공의 로테이션은 몇 년째 바뀌지 않고 있다.
박기원 감독은 수비 포매이션의 골격도 가다듬었다. 그가 지휘봉을 잡은 뒤 전진 압박 수비를 강조했다. 가로, 세로 각각 9m 코트를 모두 커버하기보다는 선택과 집중을 했다. 이를 위해 선수들은 엔드라인과 사이드라인에서 안으로 이동해 수비 그물을 더 촘촘하게 짰다. 감독이 그런 선택을 했던 이유가 있었다. 랠리가 짧은 남자배구는 디그 때 공을 받는 위치가 중요했다. “데이터를 봤더니 무릎 아래에서 공을 받으면 반격 성공률이 떨어졌다. 디그를 해도 효과가 없었다. 반격이 성공하려면 수비수가 허리 위에서 공을 잡아야 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전진 압박 수비는 세계배구의 추세”라고 털어놓았다.
감독의 생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선수들의 실천이 필요하다. 아무리 감독이 지시해도 네트 너머 상대의 무시무시한 스파이크를 선수들이 전진하면서 막아내기는 쉽지 않다. 일단 두려움이 가장 큰 장벽이다. 박 감독은 수비 훈련 방법부터 바꿨다. 선수 2명이 공을 때리고 받는 맨투맨 훈련 때부터 거리를 조금씩 좁혔다. 이를 통해 선수들이 빠른 공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을 줄이고 수비 반응 속도를 자연스럽게 높이려고 노력했다.
이와 함께 블로킹 기술도 보완했다. 상대의 공격을 1차로 차단해줄 방패를 제대로 세워야만 진전압박 수비의 효율성이 높아졌다. 선수들이 블로킹 때 손 모양을 더욱 정확하게 만들어 최대한 블로킹에 닿은 공이 대한항공 코트에서 많이 벗어나지 않도록 했다. 이 덕분에 대한항공은 상대 팀과 비교해서 더 자주 공이 코트 안에서 놀게 됐다.
대한항공이 블로킹과 리시브, 수비에 더 많은 시간을 쏟을 수 있었던 비결은 좋은 세터였다.
한선수와 유광우 덕분에 다른 팀보다는 공격 훈련 시간이 적었다. 한정된 훈련 시간이지만 이들이 더 정확하게 올려주기에 공격 훈련을 짧게 끝낼 수 있었고 남은 시간은 블로킹과 수비에 더 투자했다. 게다가 세터의 탁월한 연결 능력 덕분에 대한항공 선수들은 코트 어느 지점에만 공을 올려두면 나머지는 세터들이 알아서 해결해준다는 믿음도 생겼다.
범실을 하더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공격적으로 나서라고 했던 서브도 큰 무기가 됐다. 비록 상대 팀보다 범실은 많지만, 대한항공은 필요한 때마다 극적인 서브로 경기의 흐름을 돌렸다. 지난해 KB손해보험과의 챔피언결정전 3차전이 그랬다. 10-12로 뒤진 상황에서 정지석의 서브로 흐름을 되돌렸고 결국 듀스 혈투 끝에 우승을 차지했다. 이번 시즌도 마찬가지다. 1월 20일 한국전력과의 4라운드 5세트 17-16에서 경기를 끝낸 것도 정지석의 공격적인 서브였다.
토미 틸리카이넨 감독 부임 2년째를 맞아 대한항공의 배구는 조금 더 진화했다. 이번 시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반격의 스피드다. 박기원 감독이 다져놓은 기초에 틸리카이넨 감독이 새로운 옵션을 추가했다. 이제는 한선수와 유광우뿐 아니라 다른 선수들도 수비 이후 반격 때 빠른 패스를 시도한다. 모두가 세터처럼 움직이면서 하는 연결에 속도가 붙으면서 세트와 비슷한 상황이 자주 만들어진다. 덕분에 대한항공 공격수들은 높이보다는 스피드를 이용해 각자의 공격기술을 충분히 사용한다. 대한항공이 오픈공격 부문 최하위이면서도 외국인 선수 링컨 윌리엄스가 공격 종합 1위를 달리는 이유다. 틸리카이넨 감독은 일본 V-리그 나고야 울프 독스를 지휘할 때도 이런 배구를 시도했다. 그의 만화 같은 배구는 기량이 좋은 대한항공 선수들을 만나면서 현실이 됐다. 지금 대한항공의 배구는 국제배구의 흐름과 가장 닮았다. 남자배구 최초로 2연속 트레블 달성을 노리는 대한항공의 남은 5~6라운드 운행이 궁금하다.
사진 KOV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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