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전설 황연주의 인생에도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이 있었다.
좀처럼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에 숙소에서 짐을 싸고 뛰쳐나가려던 순간도 있었다.
그렇게 악착같이 버텨 온 세월이 벌써 21년이다.
V리그 산증인 황연주는 어느덧 스물두 번째 도전을 앞두고 있다.
모범생 황연주는 왜 배구공을 잡았나
“공부하는 게 힘들었어요. 소질이 아예 없진 않았는데, 억지로 하려니까 그건 또 싫더라고요. 그래도 할 때는 꽤 잘했어요. 시험 치면 평균 95점 이상도 받고 그랬으니까… 왜 웃어요, 진짜라니까요.”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다. 핸드볼 선수 출신 어머니를 둔 황연주의 집도 그랬다. “공부 말고, 운동이 하고 싶어요.” 전교권에서 놀던 딸의 깜짝 발언에 집안은 한바탕 소란스러워졌다. “힘든 길이야, 안 돼.” 부모의 단호한 만류에도 딸은 물러서지 않았다. “한 번뿐인 인생,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고 싶어요.” 아뿔싸. 고운 얼굴만큼이나 단단한 고집까지 꼭 빼닮은 딸이었다. 철옹성 같던 어머니도 결국 백기를 들었다.
“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건 중학교 2학년 때였어요. 남들보다 한참 늦게 시작한 셈이죠. 그전까지는 전형적인 모범생 이미지였고요. 집에서도 늘 전교 10등 안에 들어야 한다는 분위기였어요.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한 번뿐인 인생인데,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며 살아야 행복하지 않을까.’ 스스로 내린 첫 번째 인생 결정이었어요.”
떡잎부터 달랐다. 중학교 1학년 때 이미 키가 175cm에 달했다. 주변에서도 왜 운동선수를 하지 않느냐고 난리였다.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운동 유전자가 살아 있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배구를 꿈꾼 건 아니었다. 어쩌면 어머니를 따라 핸드볼을 택할 수도 있었다.
“운동신경은 확실히 좋았어요. 주변에서도 자꾸 선수 해야 한다고 했고요. 그런데 처음부터 배구에 마음을 정한 건 아니었어요.” 속으로는 핸드볼을 생각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핸드볼만큼은 단호히 반대했다. 직접 걸어온 길이라, 더 잘 알았기 때문이다.
“자식도 같은 고생을 할까 봐 걱정되셨던 것 같아요.” 그때 눈에 들어온 게 소사초 배구부였다. 어머니가 지도자들과 아는 사이였고, 그들은 “이 정도 키면 배구도 잘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 한마디에, 황연주는 배구공을 잡았다.
무명 황연주, 최초의 신인왕이 되다
“황연주가 전체 2순위라니. 아마 그날 드래프트 현장에 함께 있었던 동기들도 속으로는 의아했을 거예요. 제 스스로도 그랬으니까요. 고등학생 시절의 황연주는 그렇게 눈에 띄는 선수가 아니었거든요.”
V-리그의 산증인 황연주는 자신을 천재가 아닌 ‘노력파’라 말한다. 특히 중고등학생 시절엔 “배구만 미친 듯이 했다”고 강조했다. “자는 시간 외에는 연습만 하느라 프로팀이 몇 개 있는 줄도 몰랐어요.”
늦게 시작한 만큼 따라잡기 위한 시간도 오래 걸렸다. “학생 때는 정말 지금보다도 훨씬 힘들게 운동했어요. 처음에는 훈련을 따라가는 것조차도 버겁더라고요. 남들보다 4~5년은 늦게 시작했으니까요. 남들 스파이크 10개 때릴 때 저는 혼자 100개씩 하면서 따라갔어요. 과장이 아니라 진짜로요.” 혼나기도 많이 혼났지만, 끝까지 믿고 기다려준 은사들이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 “은사님들에게 너무 감사하죠. 성장할 때까지 기다려 주셨거든요.”
자신의 말마따나 고등학생 황연주는 거의 무명에 가까운 선수였다. “1라운드 지명은커녕, 프로 입단 여부도 불투명했어요”라고 털어놓을 정도였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순간, 기회가 찾아왔다. 바로 황현주 감독이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그는, 남들이 미처 보지 못한 가능성을 먼저 알아봤다. 그렇게 황연주는 V-리그 원년인 2005년, 흥국생명 유니폼을 입었다. 그것도 1라운드 2순위로.
“흥국생명의 지명 차례였는데 갑자기 황연주라는 이름이 불리는 거예요. 그렇게 앞 순서로 뽑히게 될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거든요. 말 그대로 깜짝 놀랐죠. 나중에 감독님이 부르셔서는 가능성을 보고 투자했다고 말씀해 주시더라고요. 신인일 때라 동기 부여가 확 됐죠. 지명 순위에 걸맞은 선수가 되겠다고 다짐했어요.”
야구로 치면 홈런이었다. 황현주 감독의 기대에 황연주는 100%, 아니 200% 부응했다. 데뷔 첫해부터 백어택상, 서브상을 휩쓸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V-리그 여자부 사상 최초의 신인왕. 그 타이틀 역시 황연주 차지였다. 살아있는 전설의 발걸음은 그렇게 시작부터 힘찼다.
“신인 때 언제 한 번은 서브를 때리는데 계속 범실이 나는 거예요. 그래서 언니들 눈치를 보다가 나중에는 결국 넘기듯 살살 쳤거든요. 감독님이 그걸 보시고는 또 되게 뭐라고 하시는 거예요. 자신감 있게 해야지, 지금 뭐 하는 거냐고 크게 꾸짖으셨어요. 그런 감독님 밑에서 배구를 배운 것도 행운이라면 행운이죠. 가끔은 이런 생각도 해요. 황현주 감독님이 안 계셨으면 지금의 황연주도 없었을 거라고요. 왜, 신인일 때는 아직 자기만의 색깔이 옅잖아요. 그때 운 좋게 감독님의 배구 철학을 잘 흡수한 것 같아요. 공격적이고 과감한 배구를 추구하시는 분이셨어요.”
뛰는 외국인 선수 위에 나는 연주 있었다
2000년대 중후반, 황연주를 앞세운 흥국생명은 그야말로 왕조를 세웠다. 역대 5개의 우승 트로피 가운데 세 번이 황연주의 손끝에서 나왔다. 외국인 선수 전성시대에도 황연주의 입지는 굳건했다. 여자부가 외국인 선수 제도를 도입한 건 2006~2007시즌부터였다. 대부분 팀이 외국인 선수를 아포짓 자리에 두었지만, 흥국생명은 달랐다. 황연주가 그 자리를 지켰다. 황연주는 “그땐 정말 어떤 외국인 선수를 앞에다 붙여놔도, 밀어낼 자신이 있었어요.”라고 돌아봤다.
“제가 그래도 오른쪽에서 어느 정도 버텨주긴 했죠. 팀도 그 덕분에 더 다양한 구상을 가져갈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어요. 외국인 선수를 데려오면 보통은 무조건 아포짓 자리에 두잖아요. 그런데 흥국생명은 꼭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요.”
그 시절 흥국생명은 경기장에 나설 때마다 이긴다는 믿음을 품고 있었다.
“그때의 흥국생명은 선수들이 정말 마음가짐부터가 달랐던 거 같아요. 질 거란 생각을 아예 안 했어요. 경기가 잘 안 풀릴 때도 팀원들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개인이 아니라 그런 팀 차원의 자신감들을 다들 가지고 있었던 거 같아요.”
2010년, 현대건설은 여자배구계를 뒤흔드는 결단을 내린다. 역대 최고액인 연봉 1억 8500만 원에 황연주를 품에 안은 것이다. 하지만 이적은 단순한 ‘몸값’의 결과만은 아니었다. 그 중심에는 황현주 감독이 또 한 번 있었다.
“연봉이라는 게 많이 받으면 사실 당연히 좋죠.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계약할 때 돈만 좇는 스타일이 아니거든요. 황현주 감독님의 존재가 컸던 것 같아요. 황연주라는 선수를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이셨으니까요. 현대건설에 가서도 잘할 수 있을 거란 믿음을 스스로 갖고 팀을 옮겼어요.”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황연주는 아름다운 궤적의 아치를 그리다 못해 이번에는 만루홈런까지 쏘아 올렸다. 이적 첫해인 2010~2011시즌 황연주는 말 그대로 모든 걸 이뤘다. 정규리그와 챔피언결정전 우승, 올스타전 MVP까지 모두 휩쓸었다. 현대건설의 창단 첫 우승 트로피는 그렇게 황연주의 손에서 탄생했다.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는, 황연주라는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빛났던 순간이죠. 돌아보면 그때는 정말 스스로 채찍질을 많이 하던 시기였던 거 같아요. 배구에 대한 열정 때문이었다기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엄청 엄격했어요. 그날 양 팀 통틀어 코트에서 제일 잘하지 못하면 혼자 용납이 안 됐어요. 그런 성격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나 싶기도 하네요.”
런던 올림픽, 뜨거웠던 그날의 기억
36년 만의 4강 진출. 2012 런던 하계올림픽에서 한국 여자배구 대표팀이 축포를 터뜨렸다. 그것도 당시 세계랭킹 4위였던 이탈리아를 상대로 거둔 값진 결과였다. 무엇보다 황연주의 복귀가 결정적이었다. 이 시기 황연주는 대회 내내 부상으로 신음했다. 대회 직전 출전한 FIVB 월드그랑프리에서 왼쪽 새끼손가락이 골절됐고, 애초 올림픽 출전 자체가 불투명했다. 그럼에도 나라를 위해 기꺼이 비행기에 올랐다.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 런던에 입성한 황연주는 원 포인트 서버로 차분히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다. 이탈리아와의 8강전, 선발 명단에 이름을 올린 것이다. 황연주가 함께한 한국은 이탈리아를 3-1로 꺾는 짜릿한 역전극을 완성했다.
“런던 올림픽 때 사실 마음고생이 심했어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저는 제 자신을 채찍질하는 스타일이거든요. 부상 중이라 해도 코트에 있는 동안 너무 답답했어요. 실력이 반도 안 나오니까 자신감도 계속 떨어지고요. 물론 4강에 올랐다는 건 정말 자랑스럽고 뿌듯한 일이에요. 다만 개인적으로는 아쉬움이 남아요. 만약 다치지 않고 나갔더라면 어땠을까… 메달까지 따냈다면 더 후련했을 텐데. 기량이 워낙 좋았을 때라 자꾸 미련이 남네요.”
높은 곳에서 떨어질수록 충격은 더 크다. 2012년 런던 대회 이후, 황연주는 내리막을 걸었다. 대표팀과 소속팀을 오가는 동안 무릎은 닳고 닳아 더는 말을 듣지 않았다. 특유의 시원시원한 공격도 예전 같지 않았다. 팀도 함께 무너졌다. 특히 2013~2014시즌, 현대건설은 리그 5위라는 충격적인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황연주와 현대건설의 긴 침묵은 그렇게 이어졌다.
가장 낮은 곳에서, 부활을 외치다
모두가 고개를 저을 때, 황연주는 묵묵히 재기를 준비했다. 악착같은 재활과 피나는 훈련. 그렇게 맞이한 2014~2015시즌 황연주는 부활을 외치며 안산으로 향했다. 간절한 마음으로 임한 2014년 컵대회에서 팀을 8년 만에 정상에 올려놓았고, 대회 MVP를 차지하며 완벽한 귀환을 알렸다. 우리가 알던 최고의 공격수, 황연주가 돌아온 순간이었다.
“지금은 많이 무뎌졌지만, 그땐 정말 힘들었어요. 완벽주의자라서 예전보다 떨어진 경기력을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았어요. 그래도 부상 탓으로 돌리고 싶진 않았어요. 누구나 힘든 순간은 오잖아요. 운동선수라면 그걸 이겨내야 한다고 생각했죠.”
황연주와 함께 현대건설도 다시 일어섰다. 2015~2016시즌, 팀은 챔피언결정전에서 우승컵을 들어 올리며 5년 만에 왕좌를 탈환했다.
“그때 상대 팀에 부상 악재가 있었어요. 운도 좀 따랐고요. 물론 스포츠에선 운도 실력이니까요. 우승하고 나선, 오랜만에 정말 활짝 웃었던 기억이에요. 그저 후련하고 기뻤어요.”
여정은 계속됐다. 2017년 12월, 황연주는 한국 프로배구 사상 처음으로 5,000득점을 돌파했다. 남녀부를 통틀어 누구도 넘보지 못했던 고지. 그 깃발을 황연주, 32세의 그가 꽂았다.
“기록의 여왕이라 해주시는데, 스스로도 꽤 성실하게 걸어온 길이라 뿌듯해요. 특히 후위 공격이나 서브, 트리플 크라운 같은 건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아요. 모두 국내 선수가 달성하기 쉽지 않은 기록들이잖아요. 그게 저에겐 일종의 훈장 같거든요.”
마이크로 전한 도쿄올림픽의 감동
20년 가까이 V-리그를 누볐던 황연주도 흐르는 시간을 막을 순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코트 밖의 시간이 더 많아졌다. 대신 새로운 길이 열렸다. 2020 도쿄 하계올림픽에서 그는 선수가 아닌 해설위원으로 마이크를 잡으며 대표팀과 함께했다.
“경기를 보는데 자꾸 뭔가 울컥하더라고요. 그러다 결국, 해설 중에 눈물이 터졌어요. 걱정도 됐지만, 다행히 예쁘게 봐주시더라고요. ‘눈물 좌’라는 별명도 생겼고요(웃음). 후배들의 4강 신화를 직접 해설할 수 있어서 정말 영광이었어요. 전 국민에게 잊을 수 없는 감동을 선물한 우리 후배들이 참 멋있고 자랑스러워요. 그래서 그랬나 봐요. 해설 중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말했죠. 이제 사람들 기억 속에 남을 건, 2012 런던이 아니라 2021 도쿄일 거라고요.”
20년 가까이 몸담았던 대표팀은 시나브로 이제 황연주 없이도 4강에 오르는 단단한 팀이 되어 있었다. 30대 후반이 되자, 소속팀에서도 그의 기회는 줄었다. 그리고 2023~2024시즌, 현대건설이 13년 만에 다시 통합우승을 차지했을 때, 조연이 된 황연주의 마음은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했다.
“당연히 정말 기뻤죠. 근데 뭐랄까…. 마음이 좀 복잡하더라고요. 이제 현대건설이라는 팀은 황연주 없이도 우승하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코트를 좀 더 밟았더라면, 저도 활짝 웃을 수 있었을 텐데요.”
그리고, 다시 한번 돌아오다
일 년, 또 일 년. 늘 간절한 마음으로 한 시즌씩 버텨온 황연주. 하지만 마흔을 앞두고 찾아온 부상은 그에게도 두려움이었다. 2024년 컵대회를 마치고 무릎 통증으로 수술대에 오른 황연주는 생각했다. ‘이번이 정말 은퇴 시즌이 될 수도 있겠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수술 들어가기 전에 감독님께 딱 말씀드렸어요. 재활을 잘 마치고 건강하게 돌아오면, 팀을 위해 더 헌신할 기회를 달라고요. 감독님도 정말 좋은 마음가짐이라며 열심히 해보자고 응원해 주셨어요.”
우려와 달리 2024~2025시즌 황연주는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한국도로공사와의 6라운드, 세트 선발 복귀전을 치른 그에게 팬들의 기립 박수가 쏟아졌다. 황연주는 양 팀 통틀어 가장 많은 19점을 올렸다. 노장은 쉽게 죽지 않았다.
“긴 재활 끝에 다시 코트에 섰잖아요. 경기장 안에 있으니까… 오랜만에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천생 배구할 팔자인가 봐요(웃음).”
2025년 4월 14일 황연주는 다시 한번 가장 빛나는 모습으로 팬들 앞에 섰다. V-리그 20주년 기념 시상식에서 ‘역대 Best 7 아포짓 스파이커’로 선정된 황연주는 트로피를 번쩍 들며 말했다. “앞으로도 초심을 잃지 않는 선수가 되겠습니다.”
살아있는 전설, 황연주의 끝나지 않은 여정
2025년 5월, 마흔 살의 황연주는 새로운 발걸음을 내디뎠다. 15년 가까이 함께한 현대건설을 떠나 한국도로공사에 입단한 것. 한국도로공사의 진심이 황연주의 마음을 움직였다. “아직 황연주라는 사람을 필요로 하는 구단이 있다는 게 감사했죠.”
정든 현대건설을 떠나 새 유니폼을 입었다.
현대건설로부터 다음 시즌에는 함께하기 어렵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바깥에 알려진 대로 코치 제안이 일부 오간 것도 사실이다. 솔직하게 털어놓자면 크게 좌절했다. 여태껏 최선을 다해 달려왔는데, 그 결말이 겨우 이 정도인가. 도대체 얼마나 더 잘해야 은퇴 시기를 스스로 정할 수 있는 걸까. 무엇보다 ‘이제 현대건설이라는 팀이 황연주라는 선수를 필요로 하지 않는구나’라는 생각에 자괴감이 들었다. 겉으로는 덤덤한 척했지만, 속은 까맣게 타들어갔다. 그런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을 때 마침 한국도로공사에서 연락이 왔다. 그 팀은 황연주라는 선수가 아직 필요하다더라. 구세주를 만난 기분이었다. 아직은 선수 황연주로 남고 싶었다. 이대로 떠나기엔 미련이 남을 것 같았다.
등번호는 그대로 4번인가.
데뷔한 뒤로 쭉 등번호 4번을 달았다. 애착이 있는 번호는 맞지만, 굳이 새 팀에서까지 고집하고 싶진 않았다. 그런데 (전)새얀이가 내가 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팀에 먼저 4번을 양보하겠다는 뜻을 밝혔다더라. 그때는 내가 아직 합류하기도 전이었는데 말이다. 크게 감동했다. 정말 고마워서 얼마 전에 작은 선물을 했다. 한사코 거절하려는 걸 새얀이에게 억지로 들이밀었다(웃음).
마흔 살이 돼 맞이하는 시즌이다.
안 그래도 요즘 마흔이라는 단어에 꽂혔다. 지금 읽고 있는 책도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다. 내용이 좀 어렵다. 그래도 그냥 읽는 중이다. 이거 말고 가끔 예전에 읽었던 책들도 다시 꺼내 읽고 있다. 나이 먹고 읽으면 느낌이 또 다르다. 같은 책을 2~3번씩은 읽는 것 같다. 원래 독서를 꾸준히 하는 편이다. 수요일 오후마다 책을 챙겨서 카페에 가는 게 루틴이다.
모마와도 재회하게 됐다.
모마가 사실 다른 선수들과 친화력이 막 좋은 편은 아니다. 그래서 이번엔 내가 더 다가가고 많이 챙겨 주려고 한다. 간혹 내가 현대건설에서 모마를 많이 혼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맞다(웃음). 그런데 이건 꼭 말하고 싶다. 모마가 표정이 좀 뚱해서 그렇지, 심성은 정말 착한 선수다.
임명옥과 더불어 유이한 원년 멤버인데.
솔직히 말하자면 원년 멤버에 대한 자부심이 있다. 나이 많은 사람이 아직도 뛰고 있다고 비웃는 사람이 있을 수 있지만, 내겐 그 사실 자체가 영광스럽다. (임)명옥이는 사실 걱정이 하나도 안 된다. 어차피 잘할 건데 응원할 필요가 있나 싶다(웃음). 나도 명옥이를 보면서 자극받을 때가 많다.
은퇴도 고민했다고 들었다.
지난 시즌이 끝나고 남편과 이런저런 얘길 나눴다. 당장 은퇴를 고민한 건 아니지만 그 시기가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이제부터는 열심히 해도 현상 유지가 다일 나이니까. 언젠가부터 계속 정체돼 있다는 느낌을 좀 받았다. 이대로면 1~2년 정도만 더 뛰고 현대건설에서 은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속으로 했다. 물론 휴가가 끝나고 팀에 복귀했을 땐 이미 의지를 다잡은 상태였지만(웃음).
지금은 어떤가.
나 자신이 아니라 한국도로공사라는 팀을 위해서라도 악착같이 오래 뛰어보려고 한다. 고작 1년 더 뛰자고 김천까지 내려온 건 아니다. 사실 나나 팀이나 서로 부담되는 이적이었다. 나로선 지방 생활이 아예 처음이라 고민이 많았다. 팀도 마흔 살이나 되는, 그것도 한 팀에서만 15년을 뛴 선수를 영입한다는 게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거고. 그래서 더 열심히 하려고 한다. 나를 믿어준 구단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은 마음이다. 왜, 예전부터 내가 항상 해왔던 말이 하나 있지 않나. 은퇴 시기를 정해두지 않고 그저 한 해 한 해 최선을 다해 온 거라고. 지금도 같은 마음이다.
도전의 아이콘 황연주가,
용기가 필요한 당신에게 전하는 메시지
매 순간 화려해 보였던 황연주의 인생에도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터널이 있었다.
몸이 찢어지고, 마음이 조각나는 순간들.
그럼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다시 일어섰다.
결국 여기까지 왔다고 말한다.
“진짜 고생 많이 했죠.
한 번은 아예 짐을 싸서 숙소를 뛰쳐나가려고 한 적도 있었어요. 정말로요.
그 정도로 속상하고 힘들었던 순간이 저도 한두 번이 아니에요.
그동안 몇 번이고 이 길을 포기하려 했었는데,
다시 마음을 다잡고 버티고 또 버티다 보니
어느새 여기까지 왔네요.
왜, 그런 말 있잖아요. 고생 끝에 복이 온다고요.
지금 생각해보면 황연주라는 사람의 인생은
정말 그런 순간의 반복이었던 것 같아요.
죽을 만큼 힘들다가도, 어느샌가 보면 또 웃고 있고.
그렇게 아등바등 살아왔네요.
저는 이제 한국도로공사에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려 해요.
중간에 분명히 또 그런 힘든 시기가 찾아오겠죠.
이번에도 끝까지 버텨보려고요.
그러다 보면… 또 좋은 일이 생기겠죠.”
지금 이 순간,
버틸 힘이 필요한 당신에게 보내는 황연주의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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