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남자배구를 대표했던 명세터의 아들로 태어났다.
10년 넘게 정상의 자리를 지킨 아버지를 보며 꿈을 키웠고, 마침내 같은 길을 걷기로 마음먹었다.
현대캐피탈의 왕조를 이끈 권영민 한국전력 감독과 그의 아들 권필재의 이야기다.
“세터 2세? 아직은 볼 줍는 중이에요”
아들이 배구를 시작했다고요.
권영민 지난겨울에 시작했어요. 이제 겨우 반년쯤 됐죠. 원래는 축구를 먼저 했는데, 한국전력에 있던 (김)광국이가 운영하는 센터에 몇 번 다녀오더니 갑자기 배구를 하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남양초 최광희 감독님께 연락을 드렸죠. 사실 초등학교 3학년은 아직 너무 어려서 학교에서도 잘 안 시키려는 분위기인데, 며칠 보시더니 “이 친구는 해도 되겠다”고 하셨어요. 나이에 비해 힘도 좋고, 체격도 괜찮은 편이라 하시더라고요.
권필재 스파이크를 때려서 득점이 나면 기분이 정말 좋아요. 배구할 때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겠고요. 너무 재밌어요!
아직 포지션은 정해지지 않았다고요?
권영민 제가 알기로는 아직 볼만 줍고 있는데, 필재 말로는 세터래요(웃음). 원래는 아웃사이드 히터를 더 좋아했어요. 감독님이 왜 세터를 시키시려는지는 저도 잘 몰라요. 대회 나가려면 아직 멀었죠. 보통 5학년쯤 돼야 경기를 뛰거든요. 소년체전도 5학년 이상만 출전 가능하니까요. 지금 필재는 공도 제대로 못 때려요(웃음). 나이가 어려서 공이 네트 앞에서 픽, 하고 그냥 떨어지더라고요.
권필재 아니거든요, 아빠. 저 공 잘 넘기거든요!
권영민 그렇다네요(웃음).
등번호 9번을 고른 이유는요?
권영민 (임)성진이 때문이죠, 뭐.
권필재 성진이 삼촌이 제일 좋아요. 키도 크고, 배구도 잘하고, 얼굴도 멋지고, 저랑도 잘 놀아줘요.
권영민 보시다시피 아들이 성진이를 많이 따라요.
공부도 병행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권영민 맞아요. 필재가 공부는 놓지 않게끔 하려고 해요. 제가 배구인으로 살아오면서 가장 후회됐던 게, 학생 때 공부를 너무 안 했던 거예요. 수업 시간에 엎드려 자고 그랬죠. 특히 영어 같은 언어 공부는 정말 아쉬워요. 필재가 영어만큼은 꼭 잘했으면 좋겠어요. 공부를 열심히 해서 나쁠 건 하나도 없어요. 운동과 공부는 절대 별개의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이 길이 쉽지 않을 수도 있죠.
권영민 그렇죠. 저도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배구라는 한 우물만 팠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배구판에 남아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운동을 시킬 생각이 없었어요. 어릴 땐 영어 유치원도 보내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아들이 직접 선택한 길을 아버지로서 막고 싶진 않더라고요. 이렇게 된 이상, 이왕 하겠다는 거 한 번 제대로 밀어줘야죠. 솔직히 필재는 배구가 아니었어도 뭔가 운동을 했을 거예요. 제가 봐도 운동신경이 정말 좋아요. 키도 또래보다 훨씬 크고요.
권필재 아빠가 걱정 안 하게 잘할 자신 있어요. 믿고 지켜봐 주세요!
“코트에서는 카리스마, 집에선 친구 같은 아빠”
‘권영민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부담이 되진 않을까요?
권영민 솔직히 걱정은 되죠. 그런데 이건 아들이 스스로 선택한 길이잖아요. 아직은 나이가 어리긴 해도요. 저는 아들의 인생에 간섭하기보다는 늘 믿고 응원하는 아빠가 되고 싶어요. 걱정할 시간에 아들에게 볼이라도 하나 더 때려줘야죠, 뭐(웃음).
아버지가 유명한 선수였다는 건 알고 있나요?
권필재 알고 있죠! 세트 성공도 13,031개나 했잖아요(아들은 실제로 이렇게 말했다). 아빠 현역 시절 경기 영상도 유튜브로 다 찾아봤어요. 아빠의 아들인 게 부담이 되지는 않고, 나중에는 아빠보다 더 잘하는 선수가 되고 싶어요.
학부모 권영민은 어떤가요?
권영민 아까도 말했지만, 필재는 아직 팀에서 볼만 줍는 정도예요. 그런데도 남양초가 대회 나가면 무조건 중계를 틀어놔요. 화면에 잠깐 스쳐 지나가는 모습이라도 보고 싶어서요(웃음). 유니폼 입고 있는 것만 봐도 신기해요. 그래도 개입은 안 하려고 해요. 그냥 뒤에서 묵묵히 응원만 하고 있어요.
권필재 아빠가 말은 안 해도 항상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거 잘 알아요.
권영민 안다니까 고맙네요(웃음).
코트 위에서 아버지를 보면 어떤가요?
권필재 누구보다 자랑스럽고 멋진 우리 아빠예요. 집에서랑은 다르게 카리스마 있는 모습이 신기하고 재밌어요(웃음). 집에서는 정말 친구처럼 편한 아빠거든요.
선수 시절 아버지를 평가한다면?
권필재 나쁘진 않더라고요(웃음).
권영민 감사합니다, 아드님.
반대로, 아버지에게 아들은 어떤 존재인가요?
권영민 정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이죠. 막내아들이기도 하고, 심지어 배구를 선택했다니 걱정 반, 기대 반이에요(웃음). 나중에는 제가 ‘권필재의 아버지’로 불리고 싶어요.
“나중엔 아빠보다 더 잘하고 싶어요”
배구를 막 시작한 아들에게 조언한다면?
권영민 가장 중요한 건 다치지 않는 거예요. 그리고 지금처럼 배구가 재밌다는 초심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프로에 와서는 그걸 잊는 선수들도 있거든요. 앞으로 필재가 배구를 계속하다 보면 언젠가는 좌절의 순간도 마주하겠죠. 그런 시간이 오더라도 부디 잘 이겨내고, 본인이 좋아하는 배구를 평생 재밌게 했으면 해요.
앞으로의 꿈은요?
권필재 성진이 삼촌처럼 멋진 선수가 되고 싶어요. 이탈리아 리그에도 가보고 싶고요. 사람들에게 이름을 알리는 훌륭한 선수가 되는 게 목표예요. 꼭 열심히 할게요. 약속해요!
아들이 드래프트에 나오면 뽑을 건가요?
권영민 안 그래도 필재가 가끔 물어요. 그럴 때마다 “잘하는 선수를 뽑아야지”라고 말하죠. 아무리 아들이라도 냉정해야 하니까요(웃음). 제 성격상 오히려 더 엄격하게 볼 수도 있어요. 그런데 사실 그런 상상이 저한텐 또 다른 원동력이 되기도 해요. 필재가 배구를 시작한 이상, 프로에 올 때까지 감독으로 남아 있는 게 새로운 목표예요. 필재가 지금 10살이니까 아무리 빨리 나와도 9년은 남았네요. 저도 앞으로 최소 9년은 열정을 갖고 지도자 생활을 하지 않을까요(웃음).
아들이 어떻게 성장하길 바라세요?
권영민 항상 강조하는 건 예의예요.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고, 늘 겸손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평생 행복하게 살아갔으면 좋겠어요. 따뜻한 마음을 지닌 어른으로 자라났으면 하는 게 부모로서의 바람이에요.
아버지에게 바라는 점이 있다면?
권필재 이미 아빠의 아들로 태어나서 너무 행복해요(웃음). 다시 태어나도 꼭 아빠의 아들로 태어날래요.
[저작권자ⓒ 더스파이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