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연승 금자탑 쌓은 ‘한의사 출신’ 지도자, 여자배구 전설 이창호 감독

송현일 기자 / 기사승인 : 2025-08-11 15: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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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흘러 노년에 이르면, 문득 삶의 쓸쓸함을 한 번쯤 경험하지 않은 남자가 어디 있으랴. 한국 여자배구의 전설, 이창호 감독도 그랬을 터. 역시 그는 요란하지 않았다. 저 세상으로 가는 그날까지, 평소 살면서 체득한 특유의 조용함을 그대로 간직한 채 떠났다.

2025년, 새해가 밝은 지 얼마 되지 않은 1월 14일. 향년 83세(1941~2025)로 이창호 감독은 타계했다. 그가 일궈온 배구 인생을 생각하면 좀 더 많은 이들의 배웅을 받으며 이승을 떠날 법도 했지만,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가족장으로 단출하게 장례를 치러 많은 배구인들의 아쉬움을 샀다.

첫 만남서 “배구 기사, 전문성 문제 있다” 지적하며 과외 수업
 

이창호 감독을 처음 만난 건 1988 서울올림픽 개막을 1년 앞둔 1987년 여름이었다. 당시 경향신문사 사회부 기자였던 필자는 회사 차원의 대대적인 올림픽 준비를 위해 체육부로 발령받았고, 담당 종목으로 배구를 맡게 되었다.


배구를 잘 몰랐던 나는 가장 먼저 대표적인 취재원인 남녀 실업팀의 유명 감독들을 찾아가 인사를 나누는 일로 취재를 시작했다. 남자팀으로는 고려증권, 현대자동차서비스, 대한항공 등을, 여자팀은 동양그룹 산하 식품회사 대농(미도파)과 현대, 선경 등이 있었다.
 

그중 대농 여자실업팀의 사령탑이었던 이창호 감독을 가장 먼저 찾아갔다. 지금은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은 북한산 밑자락, 지금의 상명대학교에서 멀지 않았던 세검정 대농체육관에서 이 감독을 만났다.


반갑게 기자를 맞이한 그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 배구 수준이 그리 높지 않음을 금세 알아차렸다. “요즘 여러 신문의 배구 기사를 보면 전문성에 문제가 있다”고 슬쩍 한마디를 던지며, 과외 수업 교사를 자청했다.
 

간단하게 서브의 언더핸드, 오버핸드, 점프 서브부터 시작해, 리시브 받은 공을 스파이크하기 좋게 띄워주는 손으로 띄워주는 기술, 오버핸드 세트와 백 세트, 그리고 스파이크, 블로킹, 속공 등등. 이때 배운 지식이 배구 담당기자 10여 년의 살림 밑천 노릇을 톡톡히 했다.

‘한의학 전공’ 개업 중 배구 코치로 여자팀 지도자 시작

이 감독은 천성이 착한 분이다. 자상하고 섬세한 모습은 그와 가까워지면 질수록 여기저기서 확인할 수 있었다. 따뜻한 말 한마디, 한마디로 남을 배려하는 게 이 감독의 큰 덕목이었다. 이런 모습은 그가 과거에 지녔던 또 다른 삶, 바로 3년 동안 아픈 환자를 치료한 한의사 생활과 무관치 않다.


그는 서울 인창고에서 선수 생활을 하다 1960년 배구팀이 있던 동양의약대학(현 경희대학교 전신)에 입학했다. 원래는 약학과를 지원했지만 본인의 의사와는 달리 한의학과에 배정됐다. 당시 그의 처지로는 찬밥, 더운밥을 가릴 여유가 없었다.
 

졸업을 앞두고 세 명의 친구와 단칸방에서 합숙하며 국가고시를 준비했고, 결국 자격시험에 합격해 한의사가 되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한 뒤 서울 한남동에서 1년간 한의사로 활동하다 ‘삼진한의원’을 차려 1968년까지 3년간 운영했다.
 

이 감독은 평양 출신이다. 국민학교(초등학교) 5학년 때 남쪽으로 내려왔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월, 1·4 후퇴 당시 어머니와 누이 네 명과 함께 남쪽으로 피난했다. 외가 식구들과 3진으로 나뉘어 경기도 시흥, 안양의 피난민촌에 정착했다. 이때 2진으로 떠났던 누이와는 끝내 다시 만나지 못했다. 그는 굶주린 배를 움켜쥐며 뭐든 닥치는 대로 하며 악착같이 살아야 했다.

국세청–대농–미도파, 팀을 바꿔가며 전성기 구가

천성이 자상하다고 해서 마냥 그럴 수는 없었다. 어려운 환경 속 승부의 세계에서는 더욱 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선수들을 연습시킬 때 보면 오뉴월에 찬 서리다.


공격과 리시브 연습이 시작되면 선수들은 으레 2~3시간 땀범벅이 되기 일쑤였다. 점프와 슬라이딩 훈련을 반복하며 전술을 선수들 근육에 억지로라도 쑤셔 넣었다. ‘호랑이 감독’이라는 별명이 괜히 붙은 게 아니었다. 한국 배구사에 전대미문의 기록으로 남은 ‘184연승’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1968년, 한의사로 활동하던 그는 국세청 배구단이 창단되자 ‘페루 배구의 아버지’로 불리는 고 박만복 감독 밑에 코치로 배구계에 복귀했다. 당시 여자 배구의 양강은 김영자가 이끄는 제일은행과 서한숙, 서연숙 등이 중심이 된 산업은행이었다.
 

국세청은 숭의여고, 중앙여고 출신 선수들을 주축으로 창단된 신생팀이었다. 이듬해 실업연맹 첫 경기에서 제일은행에 0-3으로 패했지만 결승에서 다시 만나 3-0으로 이기며 우승했고, 이때부터 연승 기록이 시작됐다.
 

이 기록은 이후 대농, 미도파로 팀 명칭이 바뀌는 과정에서도 이어졌고, 1985년까지 계속되었다. 수많은 스타들이 명멸했지만 오직 한 사람만은 그 자리를 꿋꿋이 지켰다. 바로 이창호 감독이었다.
 

이 기록은 1985년 광주에서 열린 종별대회에서 주전 김화복의 무릎 부상 속에 약체로 분류된 선경에 0-3으로 패하며184연승의 종지부를 찍었다.

 


여자 대표팀 감독으로 1984 LA올림픽 동메달 견인

그는 33세였던 1973년, 여자배구 국가대표 감독을 처음 맡아 당시 최연소 국가대표 감독 기록도 세웠다. 당시 1년 후배인 현대건설 전호관 감독과 1년씩 번갈아 가며 대표팀을 이끌며 여자배구 양대 산맥을 형성, 배구 발전의 초석을 다졌다.


당시 전호관 감독(부산고-성균관대)과 이창호 감독의 스타일은 정반대였다. 전 감독은 키가 작아 수비수로 활약했기에 이에 대한 역작용때문인지 호쾌한 공격 배구를 지향했고, 이 감독은 공격수 출신임에도 수비를 중시했다. 이창호는 ‘관리 배구’, 전호관은 ‘공격 배구’로서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며 1980~1990년대 여자배구를 뜨겁게 달구었다.


이 감독이 이끄는 미도파(대농과 미도파는 같은 팀으로 2~3번에 걸쳐 이름을 바꿈)는 1980년대 들어 현대와 물고 물리는 싸움을 이어가며 1983~1984시즌 첫 대통령배 전국 남녀배구대회에서 첫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현대와 우승컵을 다투던 1987년에도 두 번째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그는 미도파에서 감독으로 있으면서 배구인으로는 처음으로 회사 임원인 상무이사까지 올랐다.
 

여자 국가대표 감독으로는 1984년 LA올림픽 동메달,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 은메달을 이끌었다. 1994년에 해체된 미도파가 효성 배구단에 인수되면서 감독직을 이어갔고, 1996~1997시즌 슈퍼리그 도중 지휘봉을 내려놓으며 29년간의 지도자 생활을 마쳤다. 후엔 대한한의사협회 수석 부회장, 노무현 대통령 체육특보, 대한배구협회 상임 부회장 등을 지내며 활발한 사회활동을 펼쳤다.

해외 출장 다닐 때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던 독서광

이 감독은 또 다른 면에서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말수가 적고 과묵한 그였지만 내면의 세계는 풍부했고, 특히 독서에 심취해 있었다. 해외 출장을 함께 다닐 때보면 어김없이 책을 끼고 있어 그때마다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1990년 6월 16일부터 12일간, 이 감독이 여자배구 대표팀을 이끌고 소련 스베르들로프스크(현 예카테린부르크)에서 열린 내셔널대회에 출전했을 때 필자는 취재차 동행했다. 그곳은 ‘보리스 옐친’ 러시아 연방의 1, 2대 대통령의 고향이다. 특히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인 니콜라이 2세 일가가 1918년 최후를 맞은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내 기억으로 그때 이 감독은 톨스토이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부활', '고백', '인생이란 무엇인가' 같은 종교적 색채의 문학에 심취해 있었다. 

 

자기 노출을 과대 포장하는 우리 생활 속에서 주변을 소란스럽게 만들지 않으며 자신만의 그윽한 세계를 그려온 이창호 감독. 오늘도 많은 배구인들이 그를 떠올리며 추모하는 이유다.

 

(글, 사진. 박건만 前 스포츠경향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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