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현이라는 원석은 그간 수많은 광물과 섞여 있었다. 그 진가를 전부 드러내기에 순탄치 못한 환경이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이재현은 묵묵히 발을 굴렀다. 온전한 자신의 이름으로 코트 위에 한순간이라도 더 서 있기 위해 땀방울을 흘렸다. 그리고 2025년 7월, 그는 마침내 자신을 덮고 있던 모든 것들을 떨쳐냈다. 이재현이라는 보석이 비로소 빛나기 시작했다.
가족의 그늘 혹은 받침대,
그 속에서 꿋꿋이 위를 바라본 이재현
어린 시절부터 운동하는 가족들 사이에서 자란 소년이었다. 운동은 자연스레 그의 마음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었다.
“어릴 땐 종합학원에 다녔어요. 시험에서도 괜찮은 성적을 받아오니 다들 공부를 계속하길 바랐죠. 하지만 점점 학원에 앉아만 있는 게 답답하더라고요. 결국 아버지 몰래 몇 번 빠지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들켜서 크게 혼이 났는데, 그때 말했죠. 학원 다니기 싫다고. 운동하고 싶다고.” 11살. 이재현이라는 배구선수가 코트에 첫 발을 내디뎠다.
처음부터 예견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해머던지기 국가대표였던 아버지와 여자배구계를 주름잡았던 국가대표 세터 출신 어머니. 그리고 한 명도 빠짐없이 운동선수라는 길을 택한 누나들까지. 초등학교 배구부 감독의 제의는 어쩌면 필연이었다. 초반에는 아버지를 따라 육상 종목인 높이뛰기와 단거리도 병행했지만, 결국 그의 선택은 배구였다. 잠시 배구를 그만두기도 했지만 이내 다시 코트로 돌아왔다.
“처음 배구를 시작했던 4학년 땐 코치셨던 어머니를 따라 세터로 출발했어요. 그러다 어머니가 코치 일을 그만두신 뒤 6학년 때 아웃사이드 히터로 포지션이 바뀌었죠.”
초등학교 6학년이 된 이재현은 아웃사이드 히터라는 새 이름표를 달고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어린 나이에 가족의 이름이 부담스러울 법도 했다. 하지만 이재현은 기죽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 나갔다. 물론 신경을 전혀 쓰지 않을 수는 없었다. 기사에 실려도 ‘누구의 아들’ 혹은 ‘누구의 동생’으로 언급되는 일이 잦았다. 자연스럽게 ‘나도 잘해야 하는데’라는 압박감이 그를 감쌌다. 그럼에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서서히 ‘이재현’이라는 이름 석 자가 코트 위에 각인되기 시작했다.
남성중학교에 진학한 이재현은 본격적으로 자신이 가진 재능을 터뜨렸다. “중학교 3학년 땐 전관왕까지 했잖아요. 그렇게 배구가 잘 풀리기 시작하면서 가족의 이름도 점차 부담스럽지 않게 다가왔죠. 잘해야 한다는 압박도 조금씩 사라졌던 것 같아요.” 그 말마따나 남성중 시절 이재현은 자타가 공인하는 에이스였다.
이재현의 활약은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에도 이어졌다. 남성고에서 수 차례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이재현은 “고1때가 가장 배구가 잘 됐던 시기”라고 표현했다. “항상 긴장보다는 즐거움으로 경기에 임했어요. 결승전 5세트에 가더라도 ‘재밌다, 배구를 더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죠. 그러다 보니 우승은 자연스럽게 따라왔던 것 같아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들 하잖아요.”
그는 고등학교 1학년 때의 전국체전 우승을 가장 기억에 남는 우승으로 꼽았다. 당시 남성고는 결승전에서 제천산업고와 맞붙었다. 1세트와 2세트는 부진했지만 3세트부터 분위기가 달라졌다. “잃을 게 없으니 한 세트라도 따자”는 형들의 말이 전환점이 됐다. 결국 짜릿한 리버스 스윕으로 우승을 거머쥐었다.
이 시기 이재현 곁에는 두 명의 지도자가 함께했다. 바로 남성중 시절 은사였던 강수영 감독과 남성고에서 만난 이후상 감독이다. 강 감독과는 고등학생 시절 청소년 대표팀에서도 다시 한번 지도자와 선수로 마주했다. 그에게 빛나던 시기를 함께한 두 감독은 어떤 의미였을까.
이재현은 강 감독을 두고 “내 배구의 기본기를 잡아주신 분”이라고 회상했다. 당시 강 감독이 가르쳤던 틀어 때리는 기술 등이 아직도 자신의 주특기로 남아있다는 것. 이어 이후상 감독에 대해서는 “기술을 쌓아주신 분”이라며 말을 이었다. “중학생 때 배웠던 것들의 상위 호환 같은 느낌이었어요. 중학생 땐 지금의 저를 만드는 기초를 쌓았다면, 고등학생 땐 그게 지금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더 단단히 다져 발전시킨 셈이죠.”
이재현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 ‘성장’
누구나 인정하는 남성고 에이스. 이재현의 거취에도 자연스레 많은 시선이 쏠렸다. 그러나 이재현은 프로와 대학의 갈림길 앞에서 대학 진학을 택했다. 선택의 이유는 단 하나, ‘성장’이었다. 대학에서 더 좋은 선수가 돼 프로에 진출하고 싶었다.
“중학생에서 고등학생이 될 때 가장 크게 성장했다고 느꼈어요. 리그의 수준도 많이 다르더라고요. 그렇다면 고등학생에서 대학생이 될 때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예상했죠. 바로 프로에 진출하기보다 한 번 더 성장하고 싶었습니다. 더 높은 수준의 리그에서 힘적으로든, 피지컬적으로든 더 좋은 선수가 돼서 프로 무대에 나서고 싶었어요.”
인하대에 진학한 이재현은 끊임없이 자신을 갈고닦았다. 최천식 감독과 이상래 코치의 밑에서 신장을 극복할 수 있는 스윙 폼을 새롭게 익혔다. 배구선수 이재현에게 전환점이 된 시기였다.
“최천식 감독님과 코치님이 새로운 스윙 폼을 알려주셨어요. 쉽게 몸에 붙진 않았지만 매번 그 가르침을 떠올리며 배구하려 노력했죠. 덕분에 제 배구 인생이 1세트에서 2세트로 넘어간 느낌이랄까요.”
이뿐만 아니다. 이재현은 코트 위에서 항상 에이스의 면모를 보이고자 했다. 강호로 꼽히는 인하대에서도 그는 중심을 잡는 선수였다.
“항상 이성적으로 플레이하려고 노력했어요. 흔들리거나 휩쓸리지 않으려 했죠. 만약 흐름이 좋지 않거나 코트 안에서 작은 갈등이 발생해 선수들이 공을 올릴 곳이 없을 땐 제게 올려야겠다고 생각할 수 있도록 말이에요. 선수들이 저를 믿고 따라올 수 있게 하고 싶었어요.”
본래 대학교 4학년까지 대학에 머무를 계획이었다. 그런 그의 마음을 돌린 건 2024년 인하대가 보여준 활약이었다. 인하대는 2024년 시작부터 U-리그에서 무패 행진을 이어갔다. 기세를 이어 연맹전 1차 대회와 2차 대회까지 전부 싹쓸이했다. 그야말로 ‘강호’라는 명성의 이유를 증명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분위기가 정말 좋았어요. 선수단 전체가 ‘우리 이번엔 일 좀 내보자’는 마음이었죠.” 지난해를 회상하는 이재현의 얼굴엔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그러나 이재현 개인에게 2024년은 마냥 순탄치만은 않았던 한 해였다. 팀은 좋은 성적을 냈지만 그는 부상이라는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연맹전이 시작되기 전부터 발목 부상이 그를 괴롭혔다. 게다가 2024년 U-리그가 조별 리그제로 전환되면서 전보다 촘촘해진 일정이 또 하나의 부담으로 다가왔다. 이재현에게는 가장 힘겨운 시기였다.
“안 그래도 여름에 부상이 있었는데 6강에서부터는 체력적인 부담까지 느껴졌어요. 명지대와의 경기에서 특히 그랬죠. 호흡도 제대로 돌아오지 않고 공격을 때리면 어지러울 정도였으니까요. 감독님께 말씀드렸더니 세리머니도 하지 말라며 제게 많이 신경 써주셨어요. 하지만 당시에는 제 백업이 마땅치 않아서 코트를 계속 지켜야 했죠. 경기가 끝난 뒤에도 회복이 쉽지 않았어요.”
결국 인하대는 마지막 고비를 넘지 못했다. 인하대 체육관을 가득 채운 관중들 앞에서 아쉽게 우승 트로피를 놓쳐야 했다. 경기 직후, 많은 선수들이 눈물을 흘렸다. 원래도 배구에 관해서만큼은 눈물이 많은 편이라는 이재현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날 밤, 설레는 마음에 잠을 설칠 정도로 기대했던 경기였다. 그러나 그 기대는 곧 ‘내가 밤잠을 설치며 컨디션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탓일까’ 하는 후회로 바뀌었다.
“원래도 배구에 관해서는 눈물이 꽤 있어요. 결정적인 순간에 범실을 저지르거나 내가 해결해야 할 타이밍에 해내지 못했을 때, 특히 그로 인해 팀이 질 때면 눈물이 나요. U-리그 챔피언결정전도 그랬어요. 예선은 물론, 단양과 고성에서 여러 차례 이겼던 한양대였는데 하필이면 그 경기에서 졌다는 게 너무 분했어요. 하지만 가장 분했던 건 그 과정에서 제가 팀에 힘을 온전히 보태지 못했다는 사실이었죠.”
그러나 V-리그는 챔피언 결정전에서의 모습만으로 이재현을 판단하지 않았다. 시즌 내내 보여준 꾸준한 성장과 활약에 주목했다. 그리고 마침내, 인하대 이재현은 프로 무대로 발을 디뎠다.
배움의 시간이었던 첫 시즌···
“내가 나를 증명해야 한다”
“사실 드래프트 당일 아침에는 별로 떨리지 않았어요. U-리그 챔피언결정전과는 다르게 전날 잠도 제대로 잤고요(웃음). 심지어 드래프트장에 들어가서도 떨리지 않았어요. 오히려 ‘잘 되겠지’라는 생각뿐이었죠. 그런데 구슬을 뽑는 순간부터 갑자기 심장이 쿵쾅거리더라고요. ‘이제 진짜구나’하고 현실을 직감했어요. ‘어떡하지, 내 이름이 불리긴 할까? 나 나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으로 가득했죠.”
1라운드 5순위 지명의 시간. 떨고 있던 이재현의 이름을 부른 건 현대캐피탈의 필립 블랑 감독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지명 순서였어요. 당시에는 대부분 프로 구단이 세터와 미들 블로커를 우선 순위로 보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거든요. 그래서 1라운드는 기대조차 하지 않았죠.”
의문과 불안은 순식간에 안도와 벅참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이재현은 2024-2025 신인 드래프트에서 역사와 전통을 지닌 강팀 현대캐피탈의 유니폼을 입었다.
이재현에게 프로에서의 첫 시즌은 온전히 배움의 시간이었다. 팀에는 이미 국가대표 날개 공격수 허수봉부터 V-리그 전설급 외국인 선수인 레오까지 쟁쟁한 아웃사이드 히터들이 즐비했다. 출전 기회를 얻긴 쉽지 않았지만 그만큼 모두가 훌륭한 교재였다. 이재현 역시 “내게 맞는 형들의 장점을 잘 흡수하고자 노력한 시간”이었다고 첫 시즌을 평가했다.
“워낙 좋은 아웃사이드 히터 자원이 많은 팀이잖아요. 경기는 뛸 수 없어도 함께 연습하면서 보고 배울 것들이 참 많았어요. (전)광인이 형의 리시브 동작을 눈에 새기듯 지켜봤고, (오)은렬이 형이나 (임)성하 형에게도 가서 리시브에 대해 물어보곤 했어요. 형들이 정말 친절하게 하나하나 알려줬어요.”
외국인 감독과의 첫 시즌도 특별한 도전이었다. 블랑 감독은 모든 플레이에서 ‘퀄리티’를 강조했다. 기본기를 철저히 다져야만, 그 위에 진짜 배구가 세워질 수 있다는 철학이었다. 이재현 역시 그 철학에 걸맞은 선수가 되기 위해 구슬땀을 흘렸다. 시즌 내내 매일 하루에 한 시간씩이라도 자발적인 추가 훈련을 이어갔다.
그리고 드디어 2025년 3월 16일. 한국전력과의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데뷔전을 치렀다. 경기 전날 출전 가능성에 대해 미리 언질을 듣긴 했지만 이재현에게는 떨릴 수밖에 없었던 순간. 그날을 회상하는 이재현의 얼굴에서는 여전히 설렘이 묻어났다.
당시 현대캐피탈은 1세트와 2세트를 순조롭게 따냈다. 3세트 시작과 함께 블랑 감독의 시선이 이재현에게 닿았다. 허수봉과 교체 투입된 이재현은 레오부터 박경민까지 모든 선배들의 격려 속에 코트에 섰다. 그리고 득점 기회. 세터 황승빈은 이재현에게 공을 올렸다.
“사실 예상은 하고 있었죠. 아무래도 제가 막 들어온 신인이니 100% 제게 올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마음 단단히 먹고 때렸고, 그게 제 프로 첫 득점이 됐어요.”
이재현은 데뷔전에서 2득점을 기록하며 생애 첫 프로 무대를 마무리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이재현의 출전은 데뷔전 한 경기에 그쳤다. 신인 드래프트 동기들이 코트를 밟는 모습을 보며 아쉬움이 없을 수는 없었다. “아쉽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라고 답한 이재현은 그럼에도 자신을 냉정하게 바라봤다.
“제가 이겨내야죠. 현대캐피탈의 공격수들이 쟁쟁하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잖아요. 가능성만으로 코트에 나설 순 없어요. 제가 저를 증명해야만 기회가 찾아올 겁니다. 지금보다 더 성장해 그 자격을 갖춘 선수가 되고 싶어요.”
지난 시즌 현대캐피탈이 통합우승을 달성하던 순간에도 이재현은 누구보다 기쁘게 팀을 축하했지만 마냥 환하게 웃을 수만은 없었다. 축제의 열기 속에서도 ‘나도 저 코트 위에 있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어린 시절, 그는 수없이 많은 우승을 경험해 왔다. 늘 팀의 중심에서 우승 세리머니 한가운데에 있었던 시간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똑같은 기쁨이었지만, 그때와 같은 감정을 느낄 수는 없었다. 바로 그 감정이 이재현의 안에 더 깊고 단단한 간절함으로 자리 잡았다.
“사실 통합우승 직후에 최천식 감독님을 비롯해 많은 분들이 ‘현대캐피탈에 복덩이가 갔다’며 좋게 말씀해주셨어요. 제가 워낙 우승 경험이 많잖아요. 일명 ‘우승 토템’이라고도 하시더라고요. 하지만 그날 제 마음속에는 기쁨 뒤에 아쉬움이 남았어요. 저도 정말, 그 코트 위에 있고 싶었거든요. 그날 느낀 감정이 지금의 저를 움직이는 가장 큰 원동력이 된 것 같아요.”
이재현은 지난 시즌을 두고 “스스로 깨달았던 시즌”이라는 한 줄 평을 남겼다. 물론 대학 시절까지 누구보다 빛나는 배구를 해왔던 것은 사실이다. 수많은 트로피가 그 증거였다. 하지만 이제는 무대가 달라졌다. 더 높고 견고한 방패, 더 강한 창을 마주했을 때 버텨내야만 한다. 이재현은 가장 높은 곳에서 이 사실을 단단히 새겼다.
터닝포인트,
기회 앞에서 각오를 다시 새기다
시즌이 끝났지만, 이재현에게 휴식은 없었다. 현대캐피탈의 미래를 책임질 핵심 자원으로서 그는 쉬는 대신 경험을 택했다. 그렇게, 치열한 담금질의 시간이 시작됐다.
4월 30일부터 5월 4일까지 이재현은 대만에서 열린 2025 제4회 WSVI 윈스트릭 국제배구 초청대회에 참가했다. 이어 6월에는 태국과 필리핀 대표팀이 출전한 ALAS PILIPINAS 초청대회에도 현대캐피탈의 이름으로 나섰다. 제대로 된 휴가조차 없는 일정이었지만 힘든 줄도 몰랐다.
“세계 대회에 나가면 국내 선수들과는 플레이 스타일이 다른 배구를 접할 수 있잖아요. 덕분에 이기기 위해 어떤 배구를 해야 하는지 몸으로 배울 수 있었죠.”
배움은 계속됐다. 이번에는 단양에서 열린 2025 한국실업배구연맹 & 프로배구 퓨처스 챔프전. 현대캐피탈은 비슷한 라인업으로 대회에 출전했다. 그리고 이 대회에서 이재현은 마침내 자신 안에 감춰져 있던 재능을 완벽히 터트렸다. 잠재력이라는 이름 아래 덮여 있던 이재현의 진가가 수면 위로 드러난 순간이었다. 대회 기간 동안 팀을 이끈 박종영 코치는 이재현에게 “연습한 대로만 하라”고 주문했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그저 준비한 만큼 보여줄 것을 강조했다. 이재현 역시 그 말을 마음에 새겼다. 지고 있거나 긴장되는 상황에서도 쉽게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였다.
또 하나의 배움도 있었다. 바로 3시즌 만에 복귀한 박주형의 존재다. “왜 ‘배구 도사’인지 알겠더라고요.” 이재현은 웃으며 말했다.
“형이 워낙 성격도 좋고 스스럼없이 다가와 주셔서 어린 선수들도 편히 다가갈 수 있었어요. 수비에서는 정말 깜짝 놀랐어요. 공을 그렇게 편하게 받을 수 있다는 게 신기했죠. 새로운 것들을 많이 배웠습니다.”
배움의 시간이 됐던 단양대회. 확실한 결과도 따라왔다. 현대캐피탈은 단양대회에서도 예선부터 무패 행진을 이어가며 정상에 올랐다. 이와 동시에 이재현은 또 하나의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바로 최우수선수상(MVP)이다.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수상이었다.
이재현은 단양대회에서 현대캐피탈의 챔피언십 포인트를 책임졌다. 결승전 5세트 듀스 상황. 삐끗하면 트로피를 놓칠 수도 있던 순간에 이재현은 연달아 두 점을 스스로 만들어냈다. 담대한 공격, 과감한 세리머니. 그의 손끝에서 분위기가 살아났다.
이재현은 최우수선수상 수상을 두고 “반 정도는 예상했다”며 수줍게 웃었다.
“사실 (이)승준이 형 아니면 저라고 생각했어요. 형이나 저나 그간 정규리그에서 많이 코트를 밟지 않았고, 이번 대회에서 좋은 모습을 보였으니까요. 제가 받은 건 아마 어리기도 하고, 앞으로 더 잘하라는 동기부여 의미도 있지 않을까요.”
그간 많은 상을 받아왔던 이재현이지만 이번 MVP는 더욱 특별했다. 프로에 진출한 뒤 처음으로 자신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었던 기회였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주전으로서 오랜 시간 코트를 지키며 이재현의 배구를 보여줬다. “팬들이나 여러 배구 관계자가 지켜보는 대회에서 우승하고 개인상까지 탔죠. 프로에 와서 이렇게 나를 보여줄 기회가 많지 않았기에 더욱 의미가 큰 것 같아요.”
이렇게 바쁘게 보낸 비시즌도 어느덧 끝을 향해 가고 있다. 단양대회가 끝난 뒤 받은 휴가 역시 그리 길지 않았다. 얼마 뒤면 다시 컵대회를 위해 달려야 한다. 이재현은 이미 다음 시즌을 향한 확고한 목표를 품고 있다. 더 자주, 더 확실하게 코트를 밟는 것. 그리고 팀에 꼭 필요한 선수임을 코칭스태프에게 증명해 보이는 것이다. 지난 시즌 단 한 차례 출전에 그쳤던 존재감을 넘어서는 것이 그의 다음 목표다.
마침 이번 시즌은 기회의 시즌이기도 하다. 그간 현대캐피탈의 왼쪽을 든든히 지켜온 전광인과 김선호가 각각 OK저축은행과 대한항공으로 이적하며 이재현에게도 새로운 가능성이 생겼다.
“사실 드래프트 직후 합류했을 땐 시즌 중간에 적응하는 게 쉽지 않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적응도 잘돼 있고 기회도 찾아왔죠. 비시즌 동안 열심히 훈련했고 대회를 나가며 경험도 쌓았습니다. 이제는 자신 있게 그 기회를 잡으려 해요. 코트에 들어가서 저를 보여주고 계속해서 저를 쓸 수밖에 없도록 하고 싶습니다.”
조심스럽게 영플레이어상에 대한 소망도 드러냈다. 지난 시즌부터 신인선수상 명칭과 기준이 변경되며 데뷔 3년 차 선수까지 수상 자격이 부여됐다. 따라서 프로 1년 차를 마친 이재현도 다음 시즌 영플레이어상 후보에 오를 수 있다.
“지난 시즌보다 많은 경기에 나서 더 좋은 모습을 보이고 영플레이어상을 받고 싶어요. 상을 받기 위해 코트에 나선다기보다는 제가 잘해서 저절로 상이 따라오게 만들어야죠.” 이재현은 그렇게 또 한 번 각오를 다졌다.
이제 겨우 프로 1년 차 딱지를 뗐다. 앞으로 이재현에게는 더 길고 깊은 시간이 남아 있다. 이재현은 과연 어떤 선수로 기억되고 싶을까.
“‘얘, 배구 하나만큼은 진짜 잘했다’고 기억되는 선수가 되고 싶어요. 배구 관계자들뿐만 아니라 배구 팬들이나 현대캐피탈을 응원해 주시는 분들께도요. 그렇게 기억해 주신다면 제가 배구를 허투루 하지 않았다는 뜻 아닐까요.”
미소를 머금고 말하는 이재현의 얼굴에서 조용하지만 단단한 각오와 미래를 향한 희망이 비쳤다.
“등번호, MBTI, 휴식법까지”
이재현의 OFF 코트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를 따라 육상을 했다. 배구 선수가 아니었다면 아마 육상 선수로 이름을 떨쳤을지도 모른다.
“높이뛰기나 단거리를 주로 하긴 했지만 장거리도 잘했을 것 같아요. 옛날엔 별명이 ‘이봉주’였거든요. 전설적인 마라토너요. 그래서인지 체력이 꽤 좋은 편이에요. 물론 아직 현대캐피탈에서는 체력 운동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습니다. 어릴 땐 체력 운동을 하면 항상 상위권이었죠.”
최근에는 친구들과 자주 만나며 비시즌을 보내고 있다.
“원래 MBTI가 ISTP여서 집에서 가만히 쉬는 걸 좋아해요. 그런데 요즘에는 친구들이 자꾸 불러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친구들과 노는 데 꽂혀 있죠. 국제 대회 참가로 휴가도 길게 못 받은 상태라 시즌이 시작되면 더 못 볼 테니 지금이라도 열심히 만나고 있어요. 단양대회가 끝나고는 월미도 여행도 다녀왔어요.”
여행만큼이나 휴식에도 많은 시간을 쏟았다. 특히 국제 대회와 단양대회를 연달아 소화한 뒤에는 더욱 그랬다.
“단양에서 받은 휴식일에도 오전에 웨이트한 거 말고는 하루 종일 잠만 잤어요. 교체 선수가 없다 보니 저랑 승준이 형이 평소보다 볼을 훨씬 많이 때려야 했거든요. 휴식이 절실했죠.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서 자면서 체력을 회복했어요.”
등번호에 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었다. 지난 시즌엔 9번을 달고 뛰었지만, 이번 단양대회부터는 오랜 시간 9번을 써왔던 박주형이 복귀했다. 박주형은 “9번을 돌려받을 생각이 없다”고 말했지만, 이재현은 처음부터 그 번호를 돌려줄 생각이었다.
“형이 괜찮다고 해도, 현대캐피탈 9번은 아직까진 저보단 주형이 형이죠. 전 다른 번호를 달아도 괜찮습니다. 요즘엔 21번을 고민 중이에요. 제가 오래 써왔던 12번을 뒤집은 숫자이기도 하고, 롤모델인 (전)광인이 형의 번호이기도 하니까요. 또 다른 롤모델인 다카하시 란 선수의 초창기 번호이기도 해요.”
답변에서 엿볼 수 있듯 이재현은 꽤 싹싹한 후배다. 인하대에서 선배로 지냈을 때와는 또 다른 모습이다.
“인하대에서도 그렇고, 어디서든 저는 후배들과 친구처럼 지내는 선배가 되고 싶었어요. 너무 딱딱하게 다가가면 오히려 마이너스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후배들에게 장난도 많이 치고 놀림도 꽤 받았어요(웃음). 지금은 프로잖아요. 아직은 후배가 없는 막내라 형들에게 싹싹하고 예의 바르게 대하려고 노력해요. 나이대가 비슷한 형들한테는 장난도 좀 치지만 그렇지 않은 형들이 아직 많으니까요.”
이름이 같아 생기는 소소한 에피소드도 있다. 배구계에는 한 해 먼저 프로에 데뷔한 신인왕 출신 이재현(삼성화재)이 있다. 야구계에도 삼성 라이온즈의 유격수 계보를 잇고 있는 이재현이 존재한다. 그 역시 두 ‘이재현’의 존재를 잘 알고 있었다.
“유명한 선수들이고, 저보다 선배들이잖아요. 관심을 두고 꼭 찾아보는 건 아니지만 가끔 제 이름을 검색하면 같이 뜨더라고요. 함께 잘하는 선수가 되면 좋을 것 같아요. 저부터 더 열심히 해야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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