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는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고, 또 누군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27일 제주도 썬호텔에서는 희로애락이 교차했다.
2023 한국배구연맹(KOVO) 남자 아시아쿼터 드래프트가 27일 제주 썬호텔 볼룸홀에서 진행됐다. 25일과 26일 양일간 선수들의 기량과 몸 상태, 의사소통 능력 등을 점검한 V-리그 남자부 7개 구단은 드래프트 현장에 모여 다가올 시즌을 함께 할 선수를 최종 선발했다. 긴장감이 감돌았던 구슬 추첨의 순간부터 드래프트가 종료된 뒤까지, 볼룸홀 곳곳에 숨어 있었던 소소한 이야기들을 모았다.
김상우 감독도 인정한 추첨의 ‘쪼는 맛’, KB손해보험과 우리카드에게는 ‘죽을 맛’?
행사의 시작은 순번 추첨이었다. 구슬을 기계에 넣고 버튼으로 무작위 추첨을 하는 방식은 기존의 외국인 선수 드래프트나 신인선수 드래프트와 같았다. 그러나 구슬의 개수가 달랐다. 직전 시즌 최종 순위의 역순으로 구슬 개수에 차등을 두는 기존의 방식과 달리 아시아쿼터 드래프트는 모든 팀이 10개의 구슬을 넣고 추첨에 임했다. 어느 팀에게든 1순위의 행운이 찾아올 확률은 공평했다. 덕분에 속된 말로 ‘쪼는 맛’은 기존의 추첨보다 더 컸다. 김상우 감독도 “쪼는 맛이 더 하더라”라고 말한 바 있다.
7개 구단 관계자들은 공식 행사가 시작되기 전 추첨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나눴다. 이런 자리마다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꿈자리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고, 구슬 색깔이 구단의 상징 색과 같아서 행운이 깃들 것 같다고 말하는 관계자도 있었다. 공교롭게도 이 행운은 삼성화재에게 유효했다. 본격적인 추첨이 시작된 뒤, 삼성화재는 자신들의 구슬인 파란색 구슬이 첫 번째로 나오자 주먹을 불끈 쥐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타 구단 관계자들은 부러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삼성화재 쪽 테이블을 바라봤다.
한편 ‘쪼는 맛’보다는 ‘죽을 맛’을 느낀 팀들도 있었다. 6순위 KB손해보험과 7순위 우리카드였다. 유력 지명 후보가 4~5명으로 추려지고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구단들은 ‘5순위 안에만 들면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추첨의 편의를 위해 3순위까지 선발을 마친 뒤 1~3순위 팀의 구슬을 다시 빼는 동안, 나머지 4팀은 모두 5순위 안에 들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이후 OK금융그룹이 4순위, 현대캐피탈이 5순위를 배정받자 KB손해보험과 우리카드 쪽 테이블의 분위기는 급격히 어두워졌다. 심지어 이후 6-7순위를 가려야 하는 마지막 추첨에서도 두 팀의 구슬이 여러 차례 외면 받는 ‘웃픈’ 상황도 벌어졌다.
그러나 선수 지명이 시작된 뒤, 하위 순번 팀들에게는 한 줄기 빛과 같은 순간이 찾아왔다. 바로 3순위 대한항공의 지명 순서였다. 단상에 올라선 토미 틸리카이넨 감독은 크게 뜸들이지 않고 필리핀의 아웃사이드 히터 마크 에스페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하위 순번 팀들의 테이블에서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환호성도 나왔다.
이는 대한항공의 지명이 조금은 예상 밖이었기 때문이었다. 트라이아웃 지원자 명단 공개 때부터 유력한 1순위 지명 후보로 거론됐던 바야르사이한(몽골, MB), 203cm의 최장신 지원자 차이 페이창(대만, MB), 일본 국가대표 경력까지 있는 공격수 이쎄이 오타케(일본, OP) 등이 모두 남아 있는 상황에서 대한항공이 에스페호를 뽑아가자, 하위 순번 팀들에게는 천금 같은 기회가 열린 것. 실제로 세 선수는 각각 OK금융그룹, 현대캐피탈, 우리카드에 선발되며 모두 다음 시즌 V-리그에서 만날 수 있게 됐다.
물론 아무리 타 팀 테이블에서 기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해도, 이 순간이 가장 행복했던 사람은 단연 마크 에스페호 본인이었다. 에스페호는 드래프트 이후 인터뷰에서 “너무 긴장해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대한항공이 디펜딩 챔피언이라서 나를 뽑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뽑아주셔서 너무 영광스럽다. 나는 새로운 도전에 준비가 됐다”며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덧붙여 그는 “선발된 순간 에이전트인 진용주 대표님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그 분 덕분에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며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으로 에이전트를 꼽는 최상급 사회생활 능력(?)도 뽐냈다.
다행히도 기우였던 신승준 아나운서의 걱정
아시아쿼터 도입이 확정된 뒤, 많은 관계자들과 팬들이 걱정한 부분은 ‘과연 모든 팀이 선수를 선발하겠느냐“하는 것이었다. 이미 기존 국내 선수층이 두터운 팀들이나, 지원자들의 수준에 만족하지 못하는 팀들은 지명권을 행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왔다. 다행히 남자부보다 먼저 진행된 여자부 드래프트에서는 모든 구단이 지명권을 행사하며 7명의 선수가 V-리그에 입성하게 됐지만, 남자부도 그럴 것이라는 보장은 없었기에 여전히 조금의 우려는 남아 있었다.
아시아쿼터 드래프트가 성황리에 마무리될 수 있도록 노력한 것은 연맹과 구단, 지원자들 뿐만이 아니었다. 이번 남자부 아시아쿼터 드래프트를 진행한 신승준 KBSN 스포츠 아나운서는 V-리그 입성이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 먼 나라에 온 24명의 선수들이 최대한 많은 기회를 받을 수 있도록 노력했다. “모든 구단이 선수를 지명하기를 기대한다”는 뉘앙스의 멘트를 계속해서 던지며 구단과 감독들을 독려했다. 다행히 신 아나운서의 걱정은 기우가 됐다. 7순위를 배정받은 우리카드의 신영철 감독이 워낙 배구를 보는 눈이 높은 감독이었던 탓에 마지막까지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다. 그러나 신 감독의 입에서 이쎄이 오타케의 이름이 나오면서, 남자부 역시 여자부처럼 모든 구단이 선수를 지명하는 ‘해피엔딩’으로 드래프트가 마무리됐다.
사진_제주/박상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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