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스파이크 = 이호근 KBS N 캐스터] ‘처음’이란 단어는 언제 들어도 설렌다. 첫 사랑, 첫 출근….
심지어 나는 그 설렘을 느끼고자, 소주도 처음 같은 마음으로 ‘그것’만 마신다. 2015년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처음’이라는 이야기를 꺼낸다는 것이 다소 생소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배구를 정말 사랑하는 팬들이라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대충 알아챌 수 있을 것 같다.
※ 본 기사는 배구전문잡지 더스파이크 11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처음은 누구에게나 서투르다
지난 여름, 대학배구 선수 7명을 취재한 적이 있다. 3, 4학년 선수들이었고, 주전 선수들이었으며, 더 나아가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선수들이었다. 1, 2학년 선수들에 비해 한결 여유가 느껴졌고, 플레이에서도 자신감이 넘쳤다. 10년 이상 배구를 한 그들에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그들 마음속에 공통적으로 걱정과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주변에서는 모두 그들의 프로행을 낙관하고 있었다. 그저 누가 먼저 뽑힐지에 대한 궁금증이 있었을 뿐. 그러나 정작 본인들 생각은 달랐다. 원하는 팀은 둘째 치고, 프로 유니폼을 입기만 해도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겸손이 아닌 진심이었기에 조금 놀랐지만,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한 걱정은 당연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몇 개월 후, 그들을 프로배구 신인드래프트 현장에서 다시 만났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인터뷰했던 선수들은 모두 프로 구단 지명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의 모습은, 내가 기억했던 모습과는 조금 달랐다. 건네받은 유니폼을 입는 모습도, 심지어 감독님 옆에 그냥 서있는 모습조차도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웠다. 잔뜩 긴장한 모습을 보며, 나는 군에 입대했던 10년 전이 떠올랐다. 빵모자를 눌러쓰고, ‘앞으로 가’라는 조교 외침에 팔과 다리가 함께 마중 나가던 그 시절이.
그렇다. ‘처음’은 누구에게나 서툴다.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잠들기 까지 배구와 함께 했던 그들도 ‘신인’이라는 이름표를 다는 순간, 모든 것이 새롭고 어렵게만 느껴진다. 그러나 이등병처럼 어설프고 서툰 시간을 견디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병장처럼 여유로움으로 코트 안을 마음껏 휘젓게 될 것이다.
처음은 그 자체만으로 의미 있다
여자 배구에도 ‘처음’을 경험하는 선수들이 있다. 헤일리 스펠만(KGC인삼공사), 캐서린 벨(GS칼텍스), 테일러 심슨(흥국생명), 에밀리 하통(현대건설), 리즈 맥마혼(IBK기업은행), 레즐리 시크라(한국도로공사). V-리그에 새롭게 도전하는 6명 외국인 선수들이다. 이번 시즌 여자 배구는 트라이아웃을 통해 외국인 선수를 선발했다. 지난 시즌이 끝나고 각 팀 감독과 주전세터들은 미국으로 건너가 가능성 있는 외국인 선수를 영입하기 위한 노력을 펼쳤다. 물론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니콜과 조이스, 데스티니 등 세계 최고 선수들을 영입해왔던 각 구단들에게 어리고 경험이 부족한 트라이아웃 참가자들은 성에 차지 않았다. 그렇다고 영입을 포기할 수는 없기에, 감독들은 ‘가르쳐서 만들어 보자’라는 마음으로 외국인 선수 다듬기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
트라이아웃으로 선발된 6명 외국인 선수들은 머나먼 한국 땅에서 ‘의미 있는 첫 도전’을 시작했다. 생소한 음식과 환경. 의사소통이 어려운 동료들. 고민을 털어놓을 상대도 마땅치 않다.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다른 것 같은 이곳에서, 매 경기 좋은 경기력을 보여야 하는 부담감도 안고 있다. 더욱이 이들의 활약 여부는 ‘트라이아웃’의 성패와도 직결되어있기에, 모두가 새 시즌을 바라보는 기대와 우려가 크다.
외국인 선수들 공격력이 지난 시즌보다 약해졌기에, 랠리는 길어졌고 경기 시간도 자연스레 늘어났다. 체력적인 부담 역시 크게 느껴지는 부분이다. 국내 선수들 역할도 커졌다. 국내 공격수 공격 점유율이 늘어나면서 부상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그러나 세계무대에서 경쟁하기 위해서 우리 공격수들의 점유율 증가는 필수적인 부분이다. 또, 랠리가 길어지면서, 세터들은 이른바 ‘몰빵’에서 벗어나 조금 더 다양한 플레이를 펼치고자 노력하고 있다.
결국 트라이아웃은 많은 사람에게 ‘처음’이며, ‘도전’이다. 성공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 배구’라는 큰 그림에서 바라볼 때. 성공과 실패 여부를 떠나 ‘의미 있는’ 발걸음이 될 것이다.
처음은 ‘상징성’을 지닌다
여기 마지막으로 소개할 ‘처음’이 있다. 「더 스파이크」. 대한민국 역사에서 발행되는 첫 프로배구 잡지다. 박수를 보내기 전, 많은 사람들이 ’수익성‘을 이야기한다. 요즘 같은 시대에 누가 종이로 만든 잡지를 구독하겠냐는 이야기를 먼저 꺼낸다. 그들 이야기가 옳을 수도 있다. 우리끼리 이야기로 끝날 수도 있다. 그러나 많은 배구인 목소리가 담길 것이며, 묻힐 수 있는 여러 배구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지게 될 것이다. 또한 앞서 언급했듯, 대한민국 배구 역사에 남을, 확실한 발자국임에는 틀림없다. 창간 그 자체만으로 배구 역사에 빠질 수 없는 ‘상징성’을 지니게 될 것이다. 이름처럼 배구 팬들의 갈증을 시원하게 해소해줄 「더 스파이크」 선전을 기원한다.
그러나 완전한 의미의 처음은 없다
글이 마무리되어가는 이 시점에서 다소 충격적인 이야기를 건네고자 한다. 언급한 모든 것이 ‘처음’같지만, 사실 완전한 의미에서 ‘처음’은 아니다. 프로에 입단한 신인 선수들도, 한국으로 건너 온 외국인 선수들도, 결국 배구라는 틀 안에서 겪게 되는 작은 변화일 뿐, 그들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는 ‘처음’은 아니다. 마치 타고 있던 기차 객차에서 다른 객차로 옮겨가는 것처럼, 새로운 기차를 탄 것이 아니라 정해진 목적지로 향하는 같은 기차를 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안정감을 내려놓는 용기가 필요하며, 많은 것들이 그려진 스케치북을 넘겨 백지를 마주할 수 있는 과감성이 필요하다. 때문에 비판받기에 앞서 격려와 박수를 받아야 마땅하다.
이제 12번째 시즌을 맞이하고 있는 프로배구. 우리는 매 시즌 새로운 객차로 몸을 옮기고 있다. 잘 꾸며진 1등석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앉을 자리도 부족한 3등석일 수 있다. 그러나 새로운 객차에 대한 기대감으로, 2015~2016시즌도 ‘처음’ 맞는 여러 도전을 시도했다. 성공과 실패를 미리 가늠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번 시즌이 끝나면 아쉬웠던 부분을 잘 매만져 다음 객차로 옮겨갈 것이다. 결국 우리는 ‘대한민국 배구’라는 열차에 함께 타고 있다. 새로운 객차로 옮겨가는 많은 이들에게 볼멘소리에 앞서 따뜻한 박수를 건네는 건 어떨까.
# 사진 : 유용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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