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스파이크 = 서완석 국민일보 국장기자] 국내에서 가장 성공한 스포츠 지도자를 꼽으라면 아마 신치용 전 삼성화재 감독일 것이다. 선수로서 18년, 코치로 12년, 감독만 20년 했다. 삼성화재 감독을 맡으면서 그는 실업리그를 포함해 19년 연속 챔피언 결정전에 올랐다. 2005년 프로배구로 바뀌면서도 11년 연속 챔피언결정전에 올라 8번을 우승했다. 지난 2014~2015 시즌을 애제자인 김세진 감독이 이끌던 OK저축은행에 패한 뒤 일선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배구의 중심에 있었다. 삼성화재 단장으로 승진한 그는 제일기획 스포츠구단 운영담당 부사장으로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서울 강남구 역삼동 사무실에서 만난 그에게 그가 떠난 삼성화재 배구와 한국배구 미래에 대해 긴 시간 인터뷰를 가졌다. 인터뷰를 자주 하는 편은 아니지만 우문에도 현답을 내놓는 훌륭한 인터뷰이(interviewee)였다. 그는 ‘더 스파이크’ 창간 소식에 “나도 과거에 배구 잡지 만들려고 많은 준비를 했었다”며 큰 관심을 보였다.
※ 본 기사는 배구전문잡지 더스파이크 11월호에 실린 기사임을 알려드립니다.
가장 먼저 삼성화재 초반 부진에 대해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인터뷰 당시 삼성화재는 OK저축은행, 대한항공, 현대캐피탈에 져 3패 중이었다)
팀이 3연패했다. 현장으로 복귀하고 싶은 생각은 없나?
요즘에는 표정관리에도 신경 쓴다. 오해 살 수 있어 선수단 일거수 일투족에 무표정으로 일관한다. 팀에는 절대 간섭 안한다. 50년 배구 인생에서 감독만 20년 했다. 누구보다 감독 심정을 잘 안다. 선수들이 훈련하는 체육관에는 안 간다. 팀에는 선수가 중심이다. 임도헌 감독이 “말씀 좀 해주시죠”라고 조언을 구해도 “내가 신경 쓸 게 아니다”라고 못을 박는다.
신 단장은 삼성화재가 초반 3경기를 모두 3강으로 지목된 팀들과 겨뤄 운이 나빴다고 했다. 실제로 삼성화재는 새로운 외국인선수 괴르기 그로저(독일)가 늦게 입국해 초반 2경기는 그로저 없이 경기를 치렀다.
그럼 단장으로서 아무 역할도 안하나?
선수들을 모아놓고 단장이 배구 이야기할 일은 없다. 다른 스태프가 함께 있을 때 감독에게 배구 이야기 하지 않는다. 배구 이야기는 감독과 단 둘이서 한다. 경기 후에도 내가 사무국장실이나 라커에 들어갈 일은 없다. 라커는 감독과 선수들의 공간이니까. 라커에 들어가서 단장이 질책, 잔소리 하는 팀 치고 잘되는 팀은 없다. 감독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들이나 들어가는 것이지 절대 들어갈 일은 없다.
임도헌 감독에게 주로 해준 조언은?
선수들이 실천하게끔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것이 감독이라고 얘기해준다. 할 수 있는 분위기, 팀, 흐름을 잡아주는 것이 감독이라고. 감독이 많이 안다고 해서 팀이 잘되는 것이 아니라 감독이 지시하는 대로 선수들이 실천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해준다. 팀을 위해 해야 한다면 미루지 말라고도 이야기해줬다. 어제 경기(현대캐피탈전)에서 보니 이런저런 부분은 아쉽더라. 그래서 “준비는 잘해야 하지 않겠느냐, 지금 훈련해놓으면 시즌 중반 돼서 나아질 것이다” 하고 얘기해줬다. 그리고 “선수들 이리저리 돌려 전술 가지고 풀려고 하지 마라”고도 했다. 이런 모든 말들이 다 조심스럽다. 그래서 임 감독 외에는 이야기를 안한다.
화제를 그의 새로운 업무쪽으로 돌렸다. 축구, 배구, 농구 등 삼성그룹 스포츠단 운영이 제대로 될 수 있게끔 도와주는 역할이라고 했다. 운동팀 운영 기본 원리는 다 같기 때문에 매뉴얼대로 정직하게 나가면 문제는 없다고 했다. 감독으로서는 승리가 지상과제였지만 이제는 프로구단 경영에 대해 관심이 쏠린 듯 했다. 그에겐 새로운 도전으로 보였다.
운영담당 부사장으로 최대 관심사는 무엇인가?
관중 수를 어떻게 늘리느냐? 자생력을 키워서 유료관중을 어떻게 늘리느냐? 관중의 단가를 어떻게 올리느냐? 거기에 더 관심이 많다. 금년에 처음 단장을 맡고 보니 프로스포츠가 그런 것을 등한시하고는 생존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룹에서 생각하는 것과 관계없이 자생력을 가지고 키워야 한다. 어렵더라도 노력은 해야 한다. 현재 프로구단들은 모기업 지원 없으면 다 쓰러진다. 때문에 끊임없이 노력하고 계발하고 해봐야 한다.
구상해놓은 구체적인 방안이 있나?
금년에 맡아서 여러 가지 듣고만 있다. 마케팅하는 분들 만나서 들어보고 공부하고 있다. 프로로서 정착을 하려면 맨 먼저 자기 연고지에 팀과 선수가 가야 한다. 경기 수지에 있으면서 대전에 경기하러 가는 게 아니고, 대전에 정착해야 한다. 이런 것부터 바뀌어야 한다.
배구 선배로서 한국배구 미래를 위해 가장 시급한 것이 무엇인지도 물어봤다. 그는 오랫동안 생각해둔 답변인 듯 생각 보따리를 단번에 풀어냈다.
한국배구 미래를 위한 제도적 보완책은 있는가?
감독출신, 선수출신으로서 가장 큰 걱정이 유소년 저변확대가 잘 되지 않는 점이다. 제도적으로 프로구단이 선수를 육성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거기에 한국배구를 걱정하는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 중고등학교 배구팀에 선수가 없다. 프로구단이 좋은 환경에서, 좋은 여건에서 선수 육성하면 부모들이 안심하고 맡길 수 있을 것이 아닌가? 드래프트 외에 선수 공급받을 수 없는 현 제도는 문제점이 많다.
감독 시절 프로배구도 2부리그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몇 년 전 구단에 강력하게 주장해 삼성화재 2부팀을 만들기 위한 예산 10억을 받았는데, 제도가 없으니까 받아놓고도 못했다.
이제 단장이 됐으니 한국배구연맹에 강력하게 주장할 수 있지 않나?
연맹에 위원회를 만들어야 한다. 구단대표, 언론계 이렇게 다중의 의견을 모아 한국배구 미래를 위한 제도개선이든 뭐든 해야 한다. 배구 미래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해야 한다. 현재 임기가 단기간인 단장들이 고민 없이 임기를 마치고 쏙 빠지면 무책임한 것이 아닌가. 그런 게 문제다.
연맹이 배구 미래를 위해 당장 해야 할 일은?
선수들 미래에 대한 투자를 해줘야 한다. 연맹에는 쌓아놓은 적립금이 많다. 재단을 만들자는 등 이상한 소리도 나온다. 그런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배구 발전을 위해 그 돈은 써야 한다. 은퇴선수에 대한 복지, 유소년 육성 등에 투자해야 한다. 배구인의 취업이나 생활, 그런 것들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
남자 프로배구도 내년부터 트라이아웃(공개선수선발제도)을 실시하는데.
나는 트라이아웃을 해야 한다고 오랫동안 주장해왔다. 일부에서 트라이아웃 하면 선수 질이 떨어질 것이라고 하는데 기우에 불과하다. 삼성화재가 챔피언결정전에서 7연패할 때 외국인 선수때문에 했는데, 안젤코는 처음 올 때 10만 달러, 가빈은 18만 달러를 줬다. 내년 트라이아웃 때 기본급이 30만 달러라고 하는데 그 정도면 훌륭한 선수들이 많이 온다. 사실 지금 많은 팀들이 100만 달러 이상을 주고 데려오는데 이런 낭비가 어디 있나? 쓸데없는 돈 쓰는 거 보면 분통터진다. 거기서 세이브되는 돈은 각 팀이 유소년 육성에 투자를 해야 한다.
그는 현재 국내에서 뛰는 남자팀 외국인 선수는 60만 달러 이하는 없다고 말했다. 최고는 140만~150만 달러라고 귀띔했다. 시몬(OK저축은행), 오레올(현대캐피탈), 산체스(대한항공) 등 세계 5대 라이트공격수가 다 한국에 와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일본은 20만~30만 달러 수준의 선수를 쓴다고 말했다. 한국은 안보 우려 때문에 20만 달러를 더 얹어 주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후배들을 위한 조언을 해주자면.
살아보니까 사람은 인성이 가장 중요하다. 성실한 선수가 사회에 나가서도 잘하더라. 내년부터는 삼성 선수들에게 영어교육을 시키겠다. 의무로 시키겠다. 사실 지금 배구선수 출신이 영어만 잘하면 먹고 살 수 있다. 통역, 에이전트 등 진출할 데가 많다. 내가 영어를 못해서 느낀 불편이 엄청나게 많고 못해본 것도 많은데, 적어도 후배들은 영어는 해야 한다. 영어든 일본어든 하나는 확실히 해야 한다. 선수들한테 “대학은 가야 한다. 고달프더라도 자격증은 따놔야지 기회는 언제든지 온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는 최근 사위 박철우 선수에게도 “영어 학원비 내가 대줄 테니 공부해라. 이거 안들으면 너하고 관계 안 좋아질 거다”라고 주문했다고 했다. 내친 김에 가족 얘기도 물어봤다.
외손녀 사랑이 지극하다던데.
우리 애들 클 때는 지도자 생활 하느라 바빠서 정신이 없었고, 볼 틈도 없었다. 손녀를 보니까 ‘애들은 참 영혼이 맑구나, 이리 귀여울 수가 있나’라고 새삼스런 생각이 들었다. 요즘 제일 즐거운 게 애하고 노는 것이 됐다. 다른 가족하고도 마찬가지다. 감독할 때는 주말 아니면 거의 체육관 숙소에 머물렀다. 감독에서 물러난 뒤 집에서 안잔 날이 없다. 지난 추석연휴 때는 회사 결재 받고 처음으로 식구들 데리고 여행 갔다.
마지막으로 다시 태어나도 배구를 할 것인지 물어봤다. 그는 단번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치열한 승부세계에서 남에게 못할 짓을 많이 했다는 게 그 이유였다.
배구 인생을 회고한다면.
나는 50년을 승부의 세계에 살았다. 스포츠란 룰 속에서 선의의 경쟁을 한다고 하지만, 그리 좋은 것만은 아니다. 한전 있을 때는 엄청 져봤고, 삼성 있을 때는 많이 이겨봤고 그런 가운데 시기, 질투 같은 것 배구계에서 제일 많이 당해봤다. 이기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그걸 업보라고 이야기한다. 이기는 것도 스트레스였다. 나 때문에 31명이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그 중에는 친한 친구도 있었다. 얼마 전 감독이 된 제자들에게 말해줬다. “이제 너희들은 시작이다. 설사 이기고 지더라도 원수처럼 지내지 마라.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렇게 해야 한다”라고.
epilogue
인터뷰를 끝내면서 그는 창간된 ‘더 스파이크’에 대해서 덕담도 잊지 않았다. 한국배구 발전을 위해 열심히 뛰어 줄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그는 9인제 배구 등 순수 아마추어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줄 것과 배구 선진국의 최신 동향, 그리고 배구 기술 분석 같은 코너가 도움이 될 것이라는 조언도 해줬다. 그는 뼛속까지 배구인 이었다.
# 사진 : 유용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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