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한국여자배구 일으킨 ‘옹고집 상남자’ 전호관

권민현 / 기사승인 : 2015-12-01 18: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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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종목이나 시대를 초월해 모두에게 회자되는 전설이 존재한다. 그 전설들이 땀흘려 만들어낸 영화 같은 이야기들이 모이고 모여 역사가 된다. 배구도 마찬가지다. 국내 유일의 배구전문잡지 더 스파이크는 세대를 초월하여 배구인들의 존경을 받고, 배구 발전에 힘을 써온 인물들을 만나 소개하는 코너를 준비했다.


[더스파이크=김대호 MK스포츠 편집국장]전호관 전 현대여자배구 감독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정직’과 ‘엄격’이다. 괴팍할 정도로 꼿꼿하다. 좋다는 자리를 좇지 않았다. 양심이 가리키는 길을 걸었다. 그래서 시기하고, 모함하는 세력들도 많았다. 그럴 때마다 미련 없이 자리를 박차고 야인의 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전호관을 아끼는 배구인들은 말한다. “너무 일찍 배구판을 떠났다. 후배들이 모셨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배구계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배구인들은 뼈아프게 느껴야 한다.”



전호관은 학구파다. 이미 1970년대에 한국 배구의 갈 길을 찾았다. 장신 선수 전유물인 배구를 한국인 몸에 맞는 배구로 재탄생시켰다. 한국여자배구가 올림픽무대에 첫 선을 보인 것은 1972년 뮌헨올림픽. 전호관은 이 때 코치로 참가했다. 아깝게 메달 획득에는 실패했지만 세계 4위라는 기대이상 성적을 거뒀다. 그러나 2년 뒤인 19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에서 북한에 0-3으로 완패, 큰 충격에 빠지기도 했다.

한국배구에 비상이 걸린 가운데, 그는 1964년 도쿄올림픽을 제패하는 등 1970년대 중반까지 세계를 평정한 일본여자배구를 탐구했다. 그들의 강한 훈련과 정신력 그리고 체계적인 시스템을 받아들였다. 이를 한국배구에 맞게 접목시켰다.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에서 한국여자배구는 구기종목 사상 첫 메달을 따냈다. 비록 준결승에서 일본에 패해 3, 4위전으로 밀려났지만 헝가리를 세트스코어 3-1로 누르고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1916년 배구가 도입된 지 60년만의 경사였다.

몬트리올올림픽에도 코치로 참가했다. 감독은 김한수 대신고 이사장. 몬트리올올림픽 코치 발탁은 극적이었다. 당시 태광산업 감독을 맡고 있었다. 대한배구협회에서 그를 코치로 선임하려 하자 태광산업 측에서 발끈하고 나섰다. 감독이 소속팀을 오랫동안 비워두게 할 수 없다는 것. 김 감독은 전호관이 코치로 동행하지 않으면 대표팀을 맡지 않겠다고 버텼다. 결국 이낙선 당시 배구협회 회장은 대표팀에 있는 동안은 협회에서 전호관의 보수를 책임지기로 하고 어렵게 합류할 수 있었다.

한국여자배구가 세계 3위에 오를 수 있는 첫 번째 요인으로 전호관은 ‘원톱’ 대농 선수들을 중심으로 한 탄탄한 조직력을 꼽았다. 전호관이 구상하고 있던 모델이기도 했다.

1977년 1월22일, 현대건설 여자배구단이 창단됐다. 현대그룹 첫 스포츠팀 창단이기도 했다. 전호관은 감독으로 부임했다. “대농의 독주를 저지하고 여자배구에 현대의 시대를 열겠다”는 야심찬 포부를 밝혔다.

그리고 1977년 11월, 제2회 월드컵여자배구대회(일본 오사카)에서 마침내 대표팀 지휘봉을 잡았다. 일본 쿠바에 이어 3위로 대회를 마친 뒤 서구 선수의 장신벽을 무너뜨릴 새로운 전법을 개발했다. 이름 하여 ‘H퀵.’ 세 공격수가 한꺼번에 떠올라 어느 각도에서건 공격이 가능케 하는 전략이다. 일본기자들이 그의 이니셜을 따 ‘H퀵’으로 이름붙였다. 그 뒤 장신 블로커를 무너뜨리는 한국여자배구의 공격 활로가 됐다.

대농 대항마를 선언한 현대의 성장도 무섭게 진행됐다. 현대는 1978년 11월, 3차 전국남녀실업배구연맹전에서 6전 전승으로 창단 2년 만에 첫 정상에 올랐다. 1980년대 후반까지 10년 넘게 이어진 대농(이후 미도파)-현대의 피 튀기는 대혈전이 막이 오른 것이다.

전호관 배구의 백미는 화끈한 공격이다. 강하고 빠른 공격만이 한국여자배구가 가야할 길이자 팬들에게 어필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현대여자배구팀은 엄청난 팬들을 몰고 다녔다. 마치 남자배구를 연상케 하는 고공 강타에 팬들은 탄성을 내뱉었다. 전호관이 현대를 지휘하던 기간과 한국여자배구 전성기가 겹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1989년 5월, 전호관은 현대 총감독 자리를 내려놓고 호주 연수를 떠난다. 겉으로는 새로운 배구를 접하고, 부족한 배구공부를 더하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실상은 한국 배구현실에 염증을 느낀 것이 컸다. 지연, 학연으로 갈라져 벌이는 진흙탕 싸움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한국에 다시 돌아올 생각이 없었다. 연수라고 포장은 했지만 이민 길에 오른 것이다.

이에 앞서 현대 감독 자리를 이임 코치에게 넘겨주고 총감독으로 한 발짝 물러난 데는 사연이 있다. 이임 코치는 현대 창단 때부터 전호관과 동고동락한 사이. 우연치 않게 이임 코치의 이야기를 듣게 됐다. 이 코치의 어린 자녀들이 “TV에 왜 전호관 감독만 나오고 아빠는 안 나오냐”며 투정을 부렸다는 것. 이 얘기를 전해들은 전호관은 “내가 이 자리에 오래 앉아 있었구나”라고 자책하며 미련 없이 감독직을 물려 줬다.

공교롭게도 그가 떠나자 한국여자배구와 현대가 동반 침체일로를 걷는다. 성적은 말할 것도 없고, 팀 색깔이 없어졌다. 배구협회에서 그를 다시 찾았다. 전호관은 고민 끝에 호주에 가족을 남겨둔 채 3년 만인 1992년 한국에 돌아왔다. 그 해 9월 일본 NHK배 대회에서 대표팀 감독으로 화려하게 복귀한다. 현대에도 총감독으로 컴백했지만 좀체 성적이 예전 같지 않자 스스로 물러났다. 1994년이었다.

1955년 부산중학교 1학년 때 처음 배구와 인연을 맺은 이후 숨 가쁘게 달려온 40년 배구인생이었다. 2등을 꼴찌보다 더 싫어했다. 스스로 정한 기준에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다. 선수시절도 그랬고, 지도자 생활 때도 철저했다. 가장 싫어하는 말이 자신과의 타협, 자기 합리화다. 부산고 시절 키가 작아 선수로서 빛을 보지는 못했지만 남다른 승부욕과 학구열로 배구이론을 구축했다.

대학(성균관대) 졸업 뒤인 1964년 서울 중앙여고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이후 이화여고 인창고 성균관대 등을 거쳐 만 30세에 실업팀 태광산업 감독을 맡았다. 항간에선 그를 ‘조직배구의 원조’라고 평하지만 그의 배구 핵심은 ‘기본기’다. 선수로서 뿐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기본을 가장 중요시한다. 기본을 저버린 선수는 용납하지 않는 불같은 성격이었다.

야인이 된 뒤 신문지면에 관전평을 썼다. 특유의 날카로운 시선으로 플레이 이면에 숨어 있는 흐름을 끄집어내는 명수였다. 하지만 기고하는 관전평 제목이 자신 의도와 다르게 나오자 “평가자로서 수명이 다됐다”면서 연재를 사양했다. 겸양과 자존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전호관은 배구계에 유일한 상남자다. 그가 있어 한국배구가 자랑스럽다.”



(BOX) 내가 본 전호관 "무뚝뚝하지만 속정 깊은 영원한 스승"


내가 전호관 선생님을 처음 본 건 1984년 LA올림픽 직후였다. 일신여상 3학년에 재학 중이던 난 대표팀 막내로 올림픽에 참가한 뒤 앞으로 몸담게 될 현대건설 배구팀에 인사 차 들렀다. 서울 개포동 훈련장이었는데 분위기가 무척이나 엄숙했던 것 같다.

체육관에 들어서는 순간 소파에 몸을 파묻은 채 발을 꼬고 앉아 있는 중년의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한 눈에 전호관 선생님이란 걸 알 수 있었다. 매서운 눈초리에 일자로 굳게 다문 입술이 예사롭지 않았다.

나를 비롯해 새로 입단할 새내기들이 일렬로 서 전호관 선생님께 인사를 했다. 전 선생님이 하신 말씀은 “열심히 해” 한 마디였다.

그 뒤 정식으로 입단 해 훈련할 때도 전호관 선생님은 선수들에게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법이 없었다. 그저 소파에 앉아 지켜볼 뿐이었다. 전 선생님은 그런 분이다. 우승을 해도 특별히 좋아하시지 않았다. 선수들에게 “수고했다”면서 어깨를 툭툭 쳐주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훈련을 게을리 하거나 어이없이 경기에 지면 숨을 못 쉴 정도로 호되게 몰아 붙였다. 한 겨울 눈 바닥에 구른 적도 있다.

하루는 훈련 중 전호관 선생님이 소파에 앉아 졸고 계셨다. 너무 힘들어 살짝 요령을 피우려고 하는 찰나 체육관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전 선생님은 선수들을 집합시키고 무섭게 나무라셨다. 한바탕 호통을 치시고 뒤 돌아 나가시는 쓸쓸한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어른거린다.

전호관 선생님은 배구를 단지 스포츠로 보시지 않으셨던 것 같다. 배구를 통해 겸양의 미덕과 인간의 기본을 가르치시려 한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전호관 선생님은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인성에 문제가 있는 선수는 스카우트하지 않았던 것을 뒤늦게 알게 됐다.

전호관 선생님은 선수들이 배구를 가볍게 대하는 것을 무척 싫어하셨다. 세트 하나, 서브 하나도 온 정성을 모아 진지하게 하길 원하셨다. 승패보다도 선수들의 자세를 더 눈여겨보셨다.

전호관 선생님은 약주를 참 좋아하셨다. 그래서 그런지 체육관에는 찾아오는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여기에도 전호관 선생님은 철칙이 있었다. 손님이 찾아오면 절대 체육관에서 술을 마시지 않으셨다. 손님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셨다. 선수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그랬던 것 같다. 덕분에 전호관 선생님은 거의 매일 저녁이면 숙소를 비우셨다. 두주불사의 주당이시지만 단 한 번도 술에 취한 모습을 선수들에게 보인 적이 없다. 지금 생각해도 불가사의하다. 참 특이하다. 그 만큼 자기관리에 빈틈이 없으셨다.

선생님에게 배구를 배울 수 있었다는 건 나에게 더할 수 없는 행운이었다. 배구 감독 이전에 선생님은 나에게 ‘삶의 방향’을 일러 주셨다. 요즘 중학교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나는 예전 선생님이 하신 말씀을 늘 되뇌곤 한다. “스포츠의 생명은 정직이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진심으로. (글/임혜숙 전 국가대표)



# 사진 : 문복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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