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스파이크=류한준 조이뉴스24 기자] "공이 바닥에 떨어지지 않는 이상 랠리는 끝난 게 아니다.” 고등학교 배구부를 소재로 일본만화잡지 ‘주간소년챔프’에 연재 중인 학원스포츠물 ‘하이큐’에 나오는 대사다. 만화가 전개되는 주무대인 카리스노 고교 배구부에서 리베로를 맡고 있는 니시노야 유우가 한 얘기다.
리베로는 배구에서 전문 수비수를 가리킨다. 이탈리아어 ‘libero’에서 나왔다. 자유로운, 활달한, 능동적인 행위를 하는 사람을 의미하는데 배구에 앞서 축구에서 먼저 사용됐던 용어다. 지난 1960~70년대 서독(현 독일)축구대표팀에서 활약하던 프란츠 베켄바워가 ‘리베로’라는 별명을 가장 먼저 얻었다. 포지션에 상관없이 공격과 수비를 오가는 자유로운 선수라는 의미에서 이런 명칭이 붙은 것이다. 홍명보 전 한국축구대표팀 감독도 현역 선수시절 ‘아시아의 리베로’라는 얘기를 들었다.
리베로가 가져온 변화
리베로는 이제 축구가 아닌 배구에서 더 익숙한 용어가 됐다. 축구는 전술과 전략이 바뀌면서 리베로라는 용어와 자리가 사라졌다. 배구는 다르다. 축구에서는 공격과 수비를 넘나들지만 배구는 역할과 범위를 수비로만 한정했다.
국제배구연맹(FIVB)은 지난 1997년 리베로 제도를 처음 도입했다. 현행 랠리포인트제 적용보다 이른 시기다. FIVB는 당시 경기 방식이던 서브권 제도가 지루하다는 평을 계속 듣자 규칙 개정에 나섰다.
마침 유럽배구연맹(CEV)도 촘촘한 수비와 조직력을 자랑하던 아시아배구를 견제하기 위해서 움직였다. 랠리포인트제도 변경에 따른 새 포지션에 대한 요구를 FIVB에 했다. 이런 배경에 따라 탄생한 자리가 리베로다.
리베로는 이제 배구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자리가 됐다. 현행 랠리포인트 제도에서는 수비 하나가 곧바로 득점으로 연결될 수 있다. 리베로 도입 초창기만 하더라도 단순히 레프트 쪽 후위에서 리시브를 보조하는 역할이었지만 지금은 분명히 다르다.
리베로는 팀 공격에 가담할 수 없다. 이 때문에 공식 기록지에는 비어있는 칸이 많다. 하지만 단순히 수비만 하는 건 아니다. 세터 다음으로 볼 배급에 신경을 쓰는 자리가 바로 리베로다. 상황에 따라 리베로가 공격수에게 세트를 해야 하는 경우도 많이 일어난다.
V-리그에서도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남자프로배구 삼성화재는 2005년 V-리그 출범 후 지난 시즌까지 모두 8차례 우승을 차지했다. 안젤코 추크(크로아티아), 가빈 슈미트(캐나다), 레오(쿠바) 등 걸출한 외국인선수들이 팀 공격을 책임진 부분도 컸지만 무엇보다 안정된 수비와 서브 리시브가 우승 원동력 중 하나였다.
특히 세터를 제외한 다른 포지션 선수가 공격수에게 연결하는 부분이 다른 팀과 견줘 훨씬 더 매끄러웠다. 그 중심에 리베로 여오현(현 현대캐피탈)이 있었다.
4,000디그·10,000수비 성공 ‘기록은 현재진행형’
여오현은 팀을 이적한 뒤에도 여전히 수비에서 중추 노릇을 하고 있다. 그는 “리베로라는 자리가 생기지 않았다면 배구선수로 이렇게 오랜 기간 활동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술회한다.
이 말처럼 리베로는 단신 선수들에게는 커다란 생존 전략이자 출구가 됐다. 수직운동이 주를 이루는 배구는 농구와 마찬가지로 신장이 큰 선수들에게 유리하다. 남자배구 경우 180cm도 안되는 ‘작은 키’를 갖고 있는 선수들은 리베로 자리에서 존재 가치를 증명하고 팬들에게 어필하고 있다.
여오현은 리베로라는 자리를 한 단계 더 끌어올린 선수로 평가 받고 있다. 최근 의미있는 기록을 달성했다. V-리그 출범 후 디그 4,000개를 돌파한 것이다. 실업시절까지 따진다면 그 숫자는 더 늘어난다. 여자부에서는 김해란(KGC 인삼공사)이 수비 성공(디그 성공 숫자에 리시브 성공을 더한 수치) 1만개를 눈앞에 두고 있다.
화려한 조명이나 많은 관심을 받는 스파이크나 서브 성공과 같은 공격 기록과는 거리가 멀지만 여오현과 김해란은 꾸준하다. 묵묵히 코트에서 맡은 일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리베로를 보는 시선도 최근에는 많이 달라졌다. 팬들은 코트에 꽂히는 힘이 넘치는 스파이크에 여전히 환호하지만 리베로가 몸을 던져 상대 공격을 걷어내는 디그에도 많은 박수와 환호를 보낸다.
지난 시즌 V-리그 남자부 신인왕은 리베로 오재성(한국전력)이 받았다. 외국인선수 제도 도입으로 국내 공격수 자원이 줄어든 이유도 있겠지만 리베로의 신인왕 수상은 달라진 위상을 짐작하게 하는 일이다.
리베로도 충분히 스타가 되고 중심 선수가 될 수 있다. 국제배구계에선 여오현에 앞서 세르지우(브라질)가 있었다. 세터 출신으로 전문 수비수로 자리를 옮긴 세르지우는 여오현의 롤모델이기도 했다.
그는 안정된 수비와 수준급 볼배급으로 세계 최강 전력을 꾸렸던 브라질 남자배구대표팀의 한 축을 맡았다. 헤센데 브라질대표팀 감독은 “우리 팀이 구사하는 스피드 배구의 마지막 퍼즐은 바로 리베로로 뛰고 있는 세르지우”라고 여러 번 강조했었다. 지금은 현역에서 은퇴했지만 일본여자배구대표팀에서 수비 핵 노릇을 했던 유코 사노 역시 세계적으로 명성과 기량이 알려진 리베로였다.
올 시즌 V리그 남녀부 13개 팀에서 뛰고 있는 리베로들은 오늘도 실전에서 리시브와 디그 성공을 위해 코트에서 땀을 흘리고 몸을 던진다. 수비를 통한 공격 연결고리 역할과 함께 절묘하게 이어지는 랠리로 팬들에게 흥미를 한층 더 끌어올리는 존재가 바로 리베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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