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스파이크=권민현 기자] 레즐리 시크라와 인터뷰를 위해 경북 김천 하이패스 체육관이 위치해 있는 김천혁신도시를 찾았다. 미리 기다리고 있던 그녀는 취재진을 반가이 맞이했다. 간단한 인사와 함께 인터뷰가 시작됐고, 진행 내내 청산유수 같은 말솜씨로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사진촬영 때도 마찬가지. 팔색조 같은 모습 앞에 그저 넋을 놓고 말았다. 최종목표를 언급하자 “당연히 우승!”이라며 굳은 의지를 내비쳤다.
드래프트 참가, 인생을 바꾸다
지난 5월, 미국 캘리포니아 주 애너하임에서 열린 2015~2016 외국인선수 드래프트 현장. 시크라도 그곳에 있었다. 마음속에는 배구를 계속 할 지에 대한 고민을 안은 채….
이유가 있었다. 대학을 졸업한 뒤, 2013년부터 프랑스와 그리스에서 배구를 했다. 인생 처음으로 미국을 떠나고 나선 길이 험난하기만 했다. 프랑스에선 제대로 된 역할을 받지 못한 채 기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대학 때까지 라이트 공격수 자리를 보장받았던 상황과 완전 달랐다. 당시 “그 팀에선 공격과 수비가 다 되는 선수를 원했다. 하지만, 내가 수비에서 약한 모습을 보였던 탓에 리시브할 때 교체되기 일쑤였다. 더 뛰고 싶었고, 할 수 있는 것은 많은데, 기대했던 역할을 받지 못했다”며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스로 옮긴 뒤에는 경기 내외적으로 좋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배구에만 온전히 집중하기 어려웠다.
소속팀 없이 1년을 쉬었다. 선수생활을 이어갈 지에 대한 갈림길에서 고민을 거듭했다. 특별하게 다친 것도 아닌, 심리적인 문제였다. 이런 와중에 비치발리볼을 하는 등, 잠깐 ‘외도(?)’를 했다.
“예전에 캘리포니아에 살았고, 바닷가에서 경치를 즐기며 배구를 하는 것이 멋져 보였다. 두 명이 하기에 엄청난 체력이 필요했지만, 재미 있었다”고 회상하며 “일정한 수입이 없었다. 미국에서도 제일 잘하는 3~4개 팀만 돈을 벌 수 있었을 정도”라며 웃었다.
고민을 거듭하던 그녀에게 에이전트가 “한국 V-리그 외국인선수 드래프트가 캘리포니아에서 열린다.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으니까 지원해 보는 게 어떻겠는가”하고 한국행을 제의 했다. 스스로도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며 신청서를 냈고, 트라이아웃에 열심히 임하며 각 팀 관계자들 눈도장을 찍었다. 결국, 마지막 지명권을 가진 도로공사에 선택됐고, 새로운 인생이 시작됐다.
한국배구 적응? 이제 시작이야!
캘리포니아에서 새 출발을 알린 시크라. 곧바로 팀 동료들 파악에 돌입했다. 이 과정에서 전 도로공사 소속이었던 니콜 도움을 받았다. 니콜에 대해 “친하진 않았지만 예전에 대표팀에서 같이 훈련할 때는 좋은 팀메이트였다”고 소개하며 “트라이아웃때 다른 한국 선수들이랑 이야기하는 걸로 봐서 친해 보였다. 그래서 도로공사라는 팀에 대해 물어봤더니,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자세히 알려주려 했다”고 고마워했다.
사실, 이들은 해외에서 3년 이상 한 팀에서 뛰는 경우가 흔치 않았다. 하지만, 니콜이 한 팀에서만 3년 동안 뛰었다는 사실을 알고선 “도로공사라는 팀이 정말 좋은 팀이라 생각했다. 이 팀에 선택된 순간 정말 꿈만 같았다”며 행복해했다.
지난 6월, KOVO컵을 마치고 우승 여행 차 와 있던 하와이에서 팀에 합류한 그녀는 한국생활에 놀라울 정도로 빠른 적응력을 보였다. ‘지금, 조금, 낮게, 천천히, 수비,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등 간단한 한국어 단어 13개를 먼저 익혔다. 비시즌 동안 연습경기를 많이 가진 덕에 뭘 뜻하는지 금방 파악할 수 있었다. 그 중에서 제일 먼저 배운 단어는 ‘언니’다. 노장들이 많은 팀 특성 때문에 1990년생인 그녀가 “이름을 다 기억하는 것보단 언니라는 한 단어로 부르니까 편했다”는 이유다.
먹는 것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심지어 소 생간도 먹을 정도였다. 지난달 3일 경기를 마치고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하는 복통으로 고생하긴 했지만, 긍정적인 사고를 가진 덕에 가리는 음식이 없었다. 경기 외적으로 팀원들과 융화되며 적응을 끝낸 시크라. 실력으로 보여줄 것만 남았다.
더 많이, 더 크게 환호해다오
비시즌 동안 시크라는 리시브, 수비 훈련을 중점적으로 받았다. 프랑스 리그에서 뛸 때 공격과 블로킹에 특화됐기에 출전 기회가 적을 수밖에 없었다. 코트에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한 바람에 스스로도 경기 리듬이 끊겼다. 한국은 프랑스와 달랐다. 메인 공격수 역할을 수행해야 했기에, 수비와 공격을 겸비해야 했다. 혹독했던 서브, 리시브 훈련을 묵묵히 소화했던 이유다. 그러면서도 “좋은 리듬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 서로 받쳐주고 하다 보니 내 스스로도 실력이 는 것 같다. 내 역할을 알고, 책임감도 느끼고 있다. 때문에 내가 가진 능력을 마음껏 증명해 보이겠다”며 간절히 기다렸다. 괜히 조바심내지 않았다.
이윽고 10월 19일, 현대건설을 상대로 한국무대 데뷔경기를 가졌다. 2015 세계군인체육대회가 김천에서 열린 탓에 홈 개막전이 늦어진 바람에 다른 외국인선수보다 일주일 늦게 선보였다. 경기는 시작됐고, 시크라는 팀내 최다인 38점에 공격성공률 44.2%를 기록하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마지막 세트에선 “Don’t give up”을 반복하며 팀원들 사기를 북돋웠다. 스스로도 “작전타임때 언니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응원해주고 싶었다. 점수 차가 얼마나 나든 간에 항상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승리를 향한 의지를 불태웠다. 비록, 팀이 세트스코어 2-3으로 패하며 묻혔지만, 한국에서 첫 경기는 그녀에게 특별한 기억이 됐다.
왜였을까? 그저 앞으로 치러야 할 수 많은 경기 가운데 단지 한 경기였을 텐데… 그렇지만, 체육관에 들어찬 4,234명 관중과 함께했기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설레었다. 경기장에 팬들이 이렇게까지 많이 올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안이 꽉 찰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들어왔다.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며 응원해주니 정말 놀랐다. 경기가 끝나고도 두근거림이 멈추지 않았다. 매 경기마다 내 응원가가 나왔으면 좋겠다(웃음). 팬들이 내 플레이를 보고 응원해주면 팀도, 나도 정말 좋다. 잘하든 못하든, 성원해준다면 정말 기쁘고, 팬들을 위해 열심히 하고 싶다.”
1년만에 치른 경기였기 때문에 감회가 남다를 법 했다. 마치 슬램덩크에 나오는 황태산이 “더 크게, 더 크게 칭찬해다오”라며 말했듯이, 그녀는 경기에, 팬들 응원에 굶주려 있었다.
데뷔전을 마친 뒤, 시크라는 6경기를 소화하며 평균 28점, 공격성공률 40.5%를 기록하며 주공격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2라운드 막바지에 다다를 무렵, 현재까지 ‘적응기’를 마쳤다면, 이제부턴 ‘우승 해결사’로 나서야 할 때다.
“실력이 다 비슷하고, 누가 이길지 모르니까, 경기할 때 다가오는 설렘이 너무 좋다. 리그가 끝날쯤 우리 팀이 가장 잘한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
한국에서 맞이하는 첫 시즌. “많이 이겨서 매 경기마다 최우수선수로 뽑히고 싶다”고 말한 것처럼, 모든 것을 보여줄 것이라 다짐했다.
남은 목표는 최종 우승. 스스로도 “다른 팀에게 위협적인 팀이 돼서 지난 시즌보다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이 내 역할임을 알고 있다. 개인적인 목표이자 팀원들과 같이 이뤄낸 챔피언 트로피를 받는 것이 한국에서 내 목표다”고 다짐했다. ‘명랑소녀’ 시크라의 V-리그 정복기. 지금부터 시작이다.
[BOX] 이효희에게 감동받은 사연
세터와 공격수간 좋은 호흡은 필수불가결이다. 이 조합에서 불협화음을 낼 때, 팀 분위기는 곤두박질친다. 시크라도 이 점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서로가 잘 맞는다는 것. “팀에서 제일 좋아하는 선수다.
특히, 사이가 좋지 않으면 누구든지 힘들었을 텐데, 먼저 다가와서 이야기하고, 응원해준다”고 자랑했다.
특히, 시크라가 감동받은 이유는 따로 있다. 이효희가 그녀와 소통을 위해 영어를 배우고 있다는 것. 그녀가 한국어를 배우는 것보단 이효희 스스로가 영어를 배우는 것이 더 낫다는 판단 때문이다. 시크라는 “나를 위해 영어를 배우고 있다는 점에 큰 감동을 받았다. (이)효희 같은 선수를 내가 만날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하다”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BOX] 시크라, 나 홀로 서울 구경
11월 10일, 서울 장충체육관에 시크라가 나타났다? 8일 현대건설과 경기를 마치고 하이패스 선수단은 9~10일 외출을 받았다. 18일까지 경기가 없었기 때문.
시크라도 통역 신윤정 씨와 함께 서울을 찾았다. 평소에 서울에서 쇼핑하는 것을 좋아하고, 다른 선수들과 만나서 이야기하곤 했다. 마침 10일 장충체육관에서 친하게 지내던 캣 벨(GS칼텍스)과 맥마혼(IBK기업은행) 경기를 구경하러 갔던 것.
주목할 부분은 10일 에이전트와 함께 했을 땐, 통역 신 씨와 동행하지 않았다. 사실, 예전부터 혼자 여행 하는 걸 좋아했다. 2013년 프랑스 리그를 마치고 10일동안 암스테르담과 밀라노 등 혼자서 유럽여행을 다녔을 정도다. 서울도 마찬가지. “9일 서울에 올라왔을 때 기차역 근처에 호텔을 잡았다. 그리고 에이전트가 한국에 왔을 때 예전에 통역과 인사동에 갔던 것을 기억해서 그곳을 구경시켜주러 갔다. 택시 타는 것도 쉽고, 영어로 된 지하철 노선 앱을 설치한 덕에 쉽게 다닐 수 있었다”며 즐거워한 모습이었다.
# 사진 : 유용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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