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어떤 마니아의 배구사랑 한 평생' 연병해 대한배구협회 고문

권민현 / 기사승인 : 2016-01-12 15: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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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더스파이크 12월호에 개재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더스파이크=이태영 대한체육회 자문위원] 한국배구 황금기는 1970년대로 압축된다. 도쿄 올림픽에서 처음 세계도전을 시작한 지 10여 년 만에 월드컵 4강을 이루고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메달(동)의 꿈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그 뒤를 이어 남자배구가 세계선수권 4강에 오른 것도 이때 일이다. 억척스러운 응집력 그리고 두뇌 힘으로 키의 핸디캡을 극복한 성공사례이기도 하다.

일본의 배구기술을 받아들여 자란 한국이 그들을 추월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이 도전과정에서 이른바 ‘비(非)배구인’의 도움과 기여가 두드러졌다는 사실 또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중심에 이낙선 전 대한배구협회장이 있고 야전사령관격인 김한수 여자대표팀 감독, 연병해 전 배구협회 전무이사가 그 뒤를 받쳐주었다. 6인제 배구의 도입과 정착, 또한 경기력 강화에는 역대 감독 코치 등 전문 배구인의 공로가 절대적이었지만 그 꽃을 피우는 결정적인 역할은 이들 행정리더들 몫이었다.

그 가운데 한 사람, 현역 언론인 연병해 씨는 총무이사, 전무이사를 거쳐 부회장에 이르기까지 8년 동안 회장 3명을 보좌하며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한 정책 브레인이며 해결사였고 아울러 실업팀 산파역이기도 했다. 몬트리올올림픽의 영광만 해도 대표선수들의 사기를 북돋운 후원회가 없었다면 가능했을까, 또한 다른 경기단체들이 부러워했던 배구회관 건립도 이들의 열정이 없었다면 꿈꾸지 못할 일이 아니었을까 회상해 볼 일이다.



한국배구 황금기 주춧돌 놓다
1976년 초 어느 날, 조선호텔 VIP룸에는 체육 또는 기업의 거물급 인사들이 모여 앉아 머리를 맞대고 진지한 표정으로 숙의하고 있었다. 그 중심인물은 한국일보 사주이기도 한 장기영 당시 IOC위원. 그리고 김택수 대한체육회장도 함께 했다. 이낙선 당시 배구협회회장 요청에 따라 기꺼이 후원회장을 맡은 장기영 IOC위원은 앞서 정부에서 경제부총리를 맡았던 거물인데 여자배구의 메달가능성을 확인하고 기금조성에 앞장 선 것이다.

이렇게 해서 모아진 기금이 3,400만 원. 당시로서는 기대이상의 거금이었다. 여기에 해결사로 나선 사람이 연병해 총무이사였다. 그는 서울신문 체육부장을 거쳐 당시 사회부장의 바쁜 자리에 있었음에도 장기영 후원회장과 호흡을 함께하여 열성을 다해 뛰어다녔고 언론사 핵심간부로서 영향력을 십분 발휘하여 대기업 오너들을 설득하는 역할을 맡았던 것이다. 이 때 가장 어려운 일이라면 국영기업체인 한국전력과 종합화학의 협조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다행히 백선엽 당시 종합화학 회장도 흔쾌히 기금조성에 참여할 정도였다.

무언의 압력을 행사하는 언론사 간부의 봉사란 사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몬트리올 올림픽에 당초 여자 팀만 보내려 했던 김택수 체육회장을 설득한 것도 알고 보면 여론의 압력이라는 무기를 동원한 결과였다. 어렵게 본선진출 티켓을 따놓은 당시 남자대표선수들이 ‘파견 제외’ 소문에 크게 낙담한 나머지 삭발시위까지 벌이는 사태로 번졌을 때만 해도 그의 해결사 역량을 충분히 발휘한 셈이다.

연병해 총무이사는 말하자면 이낙선 회장의 대리인이나 다름없었다. 처음 이 회장이 서울신문사로 그를 찾아와 협조를 요청할 때 한 말을 그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협회를 이끌어 가다 보니 의견 일치가 되지 않아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많았다. 배구인의 고질적인 싸움에 배구인 아닌 사람들이 나서서 파벌을 없애고 힘을 모아주기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이낙선 회장의 후임 박경원 회장 때는 박종규 대한체육회장이 나서서 서울신문 사장에 협조요청 전화를 했다고 한다. 당시 협회 안에는 일명 ‘서대문파’라고 하여 김한수 대신고 교장, 엄병덕 전 보안사 감독과 이창호 여자대표 코치 등을 구분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계파척결에도 그의 노력이 돋보였다.

한 때는 김한수 전무이사가 여자대표팀 감독으로 태릉선수촌에 들어가 훈련을 진두지휘하면서 행정에 공백이 나타나자 호흡이 잘 맞았던 연병해 총무이사가 조정자로 나서 갭을 잘 메워준 때도 있었다. 그러니까 일기당천이나 만기친람이 아니라 만인친화의 정신으로 어려운 문제를 풀어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몬트리올 동메달 영광 이후 포상범위를 둘러싸고 대한체육회와 배구협회가 갈등을 빚었을 때의 에피소드 한 토막-메달포상에서 주전으로 활약한 여자 대표 7명에게만 연금을 지급한다는 체육회 방침에 협회는 한 목소리로 반대의견을 밝히고 장기영 후원회장까지 나서 김택수 회장을 설득하는 가운데 김한수 전무이사가 김택수 회장실을 찾아가 항의하는 과정에서 물리적 충돌이 발생한 사건이 있었다. 이 소동에 책임을 지고 사퇴한 김한수 전무이사 후임에 연병해 총무이사가 취임, 문제 해결에 힘을 보탰으나 연금문제 해결의 뜻을 이루지 못한 아쉬움이 컸다고 당시의 불편했던 심기를 밝히고 있다.

반백년 일편단심 배구사랑
배구협회는 이 뒤로 조석래 회장시대를 맞는다. 기업총수(효성그룹 회장)로 의욕이 넘쳤던 조석래 회장은 그를 부회장에 선임, 앞서 대표팀 후원회 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배구회관 건립기금 조성에 힘써 줄 것을 요청한다. 이즈음 현대건설, 대우실업, 한일합섬, 태광산업 등 실업배구 팀이 늘어나 훗날 앞서 나가던 경기종목인 여자농구를 무색케 하는 붐을 조성하는데 활기를 얻게 된 뒤에는 협회 회장단의 합심노력이 있었음을 밝혀 두고 싶다.

아울러 2000년대 들어 프로배구가 태동하고 농구 이상의 폭발적 선풍을 일으킨 저력도 올림픽 등 국제무대에서 약진이라는 외형적 성과 외에 기업의 참여와 호응에 힘입은 바 크다.

연병해 원로는 언론인으로 반백년 세월을 바친 외에 이제는 당당한 배구인으로 이름을 남긴 셈이다. 프로배구 KOVO출범 이후에도 배구사랑은 변함없어 국제경기는 물론 주요 프로리그에 멀리 지방코트까지 찾아 응원과 격려를 잊지 않고 있다. 그와 호흡을 함께하는 임형빈 전 배구협회부회장과 프로 산파역인 김광호 전 KOVO 부총재의 모습도 자주 볼 수 있다. 지금은 80대에 접어든 언론노병. 그러나 배구에 대한 애정과 정열은 변함이 없는 발리볼 마니아의 한 사람. 그의 관심은 프로리그에 그치지 않고 초등학교에서부터 중·고등학교까지 학원스포츠로서 배구성장에 성원을 보내며 프로리그의 외국인 선수평가나 트라이아웃제 연구까지 조언을 보낸다.

그의 일편단심 배구사랑과 소망이 또 어떤 열매를 맺을지 기다려 본다.



# 사진 : 신승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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