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포지션 파괴자' GS칼텍스 배유나

권민현 / 기사승인 : 2016-02-03 11: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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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스파이크=권민현 기자] 포지션 파괴자. 다르게 표현하면 ‘어떤 위치에서도 제 역할 이상 할 수 있는 선수’를 말한다. NBA 르브론 제임스(32,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는 203cm 키로 농구에서 할 수 있는 모든 포지션을 소화, 상대를 압도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대표적인 ‘포지션 파괴자’라 불린다. 여자배구에선 80년대를 주름잡았던 ‘코트의 여우’ 박미희(52, 현 흥국생명 감독)가 그랬고, 현재는 김희진(IBK기업은행)이 그렇다. 여기에 또 한 명이 추가된다면? ‘배유나’라는 이름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본 기사는 더스파이크 1월호에 개재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시작하기 전에 먼저 이야기해야 할 부분이 있다. 포지션별 철저한 분업화로 운영되는 배구에서 ‘포지션 파괴’라는 말이 다소 생소할 수 있다. 축구, 농구와 같이 코트 내에서 별다른 제약 없이 활동할 수 있는 종목에만 ‘포지션 파괴’가 어울릴 법 했다.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배구에서도 포지션을 가리지 않고 뛰는 선수들이 있다. 배유나가 그렇다. 리베로를 제외한 모든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는 그녀를 칭하기 위해 과감하게 ‘포지션 파괴자’라는 단어를 사용해보고자 한다.



‘배구 천재’라 불린 유년시절
안산서초등학교 3년 때부터 배구를 시작한 배유나. 정작 배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1년 때였다. “처음에 친언니가 먼저 제의를 받았다. 그때 초등학교 1년 때였는데, 언니는 안 한다고 했고, 내가 하고 싶다고 졸랐다. 감독님께서 2년 뒤에 데리러 온다고 했다. 그런데 정말로 왔더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또래 보다 신체조건이 좋다는 것도 한 몫 했다.

워낙 운동신경이 좋았고 활동적이었다. 초등학교 6년 때는 팀을 6관왕에 올려놨고, 중학교 3년 때 4관왕, 고등학교 때는 팀을 두 번 우승을 이끈 만큼, 출중한 실력을 뽐냈다. ‘배구 천재’라 불렸던 만큼 포지션 하나에 국한하지 않고 모든 위치에서 제 역할 이상을 해냈다. 배구인들은 “국내 여자배구선수 중 유일하게 레프트, 라이트, 센터를 모두 소화해낼 수 있다. 심지어 수비능력도 출중했다”며 그녀가 가진 재능을 치켜세웠다. 스스로는 “그때 어떻게 뛰었는지는 머릿속에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진짜 감각으로만 했었던 것 같다. 어린 나이에 생각 없이 뛰었는데, 언니들이 잘 이끌어줘서 잘할 수 있었던 것 같다”며 겸손해했다.

고등학교 2년에 재학 중이었던 2006년에 국가대표로 발탁됐다. 그 해 월드그랑프리, 세계선수권대회, 도하 아시안게임에 출전, 김연경(페네르바체), 황연주(현대건설), 한송이(GS칼텍스), 김사니(IBK기업은행) 등 쟁쟁한 선수들과 함께 뛰며 국제경험을 쌓았다. 각종 중·고 배구대회에서 보여준 다재다능함이 팀에 도움이 됐다. 그때 “너무 어려서 좋다 나빴다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너무 떨렸고, 긴장됐다”며 “언니들이 잘 보살펴주어 내가 가진 실력 이상으로 잘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표현했다. 1년 뒤인 2007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GS칼텍스가 전체 1순위로 그녀를 호명, 프로선수로서 시작을 알렸다.

당시 GS칼텍스를 맡았던 고 이희완 감독은 “우승한 것 같다”며 “당장 팀 전력 향상에 보탬이 될 수 있는 배구를 할 줄 아는 선수다. 세터를 제외한 전 포지션을 두루 소화할 수 있다. 동기들 중 최고 기량을 지녔다”며 기쁨을 표현했다. 본인도 “당연히 1순위였다고 생각했다. 만약 GS칼텍스에서 나를 선택했다면, 센터로 뛸 것이라 생각했다. 윙스파이커 자리는 다 차있었고, 센터포지션에 선수가 없었기 때문에 바로 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며, 어떤 위치에 서도 최고가 될 수 있다는 포지션 파괴자로서 자신감을 보여줬다.

그 해, 12월 2일에 있었던 도로공사와 가진 프로 데뷔전에서 19점을 올리며 ‘배유나’ 이름을 각인시켰다. 루키시즌 중반부터 성장통을 겪기도 했지만, 스스로 극복했다. 시즌 내내 센터와 라이트를 번갈아가며 경기당 8.7점, 공격성공률 31%를 기록했고, 세트당 0.508개 블로킹을 성공시켰다. 리시브도 팀 내 세 번째인 16.1% 점유율을 기록, 세트당 1.242개를 받아내며 GS칼텍스 챔피언결정전 우승에 기여했다. 신인왕에 오른 것은 보너스. 말 그대로 ‘포지션 파괴자’로서 자신감이 허언이 아님을 보여줬다. 어떤 위치에 있어도 할 건 다하는 배유나였다.



잦은 포지션 변경, 중심을 못 잡다
루키 시즌 이후에도 라이트, 레프트, 센터를 번갈아 오갔다. 대표팀에서도 마찬가지. 2008년 베이징올림픽 최종 예선전에선 부상으로 빠진 황연주 공백을 메우기 위해 라이트로 출전했다. 초반에는 곧잘 해냈으나, 시간이 갈수록 감각이 떨어졌다.

이때부터 훈련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스스로도 “어렸을 때는 별다른 훈련 없이도 잘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나이가 들수록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노력을 해야지 빛을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 후에도 전위에서 할 수 있는 포지션을 소화했다. 심지어 조혜정 감독이 새로 부임한 2010~2011시즌에는 세트훈련까지 받았다.

하지만, 잦은 포지션 변경은 그녀에게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팀에선 어떤 포지션에서도 평균은 해내니 취약한 부분에 그녀를 투입할 수밖에 없었다. 익숙할 만 하면 다른 데로 옮기는 일을 반복했다. ‘내가 뭘 하나’ 싶었다. 급기야 2010년, 왼쪽 무릎 연골이 닳아 수술대에 올랐다. 초등학교 6학년때 받은 부위와 똑같았다.

수술을 마쳤고, 재활에 매진한 끝에 복귀했다. 하지만, 동기부여가 되지 않았고, 의욕이 없어졌다. 2010~2011시즌 24경기 77세트 출전, 평균 5.79점, 공격성공률 30.35%에 그치며 데뷔 후 가장 좋지 않은 기록을 남겼다. ‘포지션 파괴자’로 불렸던 위용은 온 데 간 데 없었다. ‘어떤 포지션에서도 곧잘 할 줄 아는’ 평범한 선수로 전락했다.

“그때 아예 내 스스로를 놓았다. 경기를 뛰어도 ‘그냥 자리만 채우러 가자’라는 마음이 먼저 들었다. 스스로 자기합리화를 시켰다고 생각하니 배구가 더 안됐다”며 힘들었던 세월을 전했다.

팀 성적도 시즌 4승(20패)에 그치며 최하위로 급락했다. 이 와중에 2011년 4월, GS칼텍스는 성적부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한 조혜정 감독을 대신해 이선구 감독을 새롭게 선임했다.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다.




팀을 위한 ‘헌신’

새로운 감독과 함께한 2011~2012시즌. GS칼텍스는 최하위에 머물렀다. 2012~2013시즌을 앞두고 한송이, 정대영, 이숙자가 런던올림픽에 출전했다. 이들 공백 속에서 배유나는 최선임으로서 후배들을 이끌었다.

“웨이트 트레이닝 시간을 늘리는 등 체력운동을 정말 힘들게 했다”고 언급한 것처럼, 이선구 감독, 차상현 코치는 선수들을 강하게 몰아붙였다. 배유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참고 견뎠다. 훈련강도는 더욱 강해졌다. 스스로 몸이 좋아지고 있음을 느꼈다. 2012년 8월에 열린 KOVO컵에선 라이트 공격수로 뛰며 우승을 차지했다. “재미가 있었다. 리시브나 수비에 적극 가담하고, 공격도 고등학교 때 이후 제일 많이 때릴 정도였다. 옛날에 잘했던 감각이 살아난 느낌이었다”고 표현했다.

의욕이 생겼고, ‘포지션 파괴’에 대한 새로운 의미도 찾았다. 바로 팀을 위한 헌신.

“지금 내가 맡고 있는 포지션에 만족하고, 팀을 위해 열심히 하고 있다. 감독님께서도 팀을 우선하는 마음이 앞서야 한다고 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어렸을 때는 ‘왜 센터포지션에서 고생하나’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경험이 지금의 포지션파괴자로서 바탕이 된 것이다. 데뷔 초반에는 ‘코트 안에라도 있자’는 생각이었는데, 연차가 쌓이다보니 의욕이 생겼다”며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팀도 2012~2013시즌 준우승을, 2013~2014시즌 챔피언결정전 우승을 차지하며 그동안 강한 훈련을 견뎌냈던 노력에 대한 보상을 받았다. 2014 인천아시안게임에선 금메달을 목에 걸기도 했다.

이 때부터 센터포지션에 집중했다. 2014~2015시즌부터는 리시브에서도 벗어나, 전위에서 공격과 블로킹에만 전념했다. 한 곳에 집중하니 마음이 편했다. 단지, 센터치곤 키가 182cm에 불과한 탓에 높이가 낮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스피드, 유효블로킹 등 타이밍으로 극복할 수 있는 부분은 훈련을 통해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상대 공격수들이 잘 때리는 코스나 타이밍을 생각하는 등, 비디오를 보며 분석한다”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하나만 잘해서 자기만 돋보이는 것이 아닌, 어떤 포지션에서도 자신이 할 몫을 다하는 것이 자기도 살고, 팀을 위해 헌신할 수 있음을 스스로 깨달았다.



GS칼텍스에서만 9시즌째를 맞는 배유나. 언제나 그렇듯이 팀을 지탱하고 있다. 돋보이는 기록은 없지만, 꾸준하게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주고 있다. 올 시즌도 마찬가지. 현재 GS칼텍스는 5승 9패, 승점 17점으로 5위에 머물고 있다. 선임으로서 책임감을 느낀다.

“소극적인 플레이 하지 않겠다. 전반기에 이길 수 있었던 경기를 많이 놓쳤다. 범실이 정말 아쉽다. 그래도 12월 14일 현대건설과 경기에서 범실을 줄였다. 이를 계기로 이기는 경기, 좋은 경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선수들끼리 단합하면 후반기에 치고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며 의지를 불태웠다.

‘개인’보다는 ‘팀’이 우선인 배유나. ‘포지션 파괴자’라 불렸던 그녀가 보여준 헌신이다.



# 사진 : 신승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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