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후인정X방신봉

권민현 / 기사승인 : 2016-03-04 15: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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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스파이크=오효주 KBS N 아나운서] '배구한지 30년'이란 표현도 섭섭하다. '선수 유니폼을 입고 보낸 시간만 30년'이 정도는 돼야 이들을 표현할 수 있다.



'남자 프로배구 최장수 선수'라는 타이틀만큼이나 지나간 세월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그들. 많은 이들이 지금 이 시점에 집중하고 있을 때, 더 대단했던 지난날의 이야기까지 함께 듣고자 찾아갔다. 유쾌한 웃음도, 감동의 눈물도, 그리고 인생의 의미도 모두 잡고 싶다면, 이 글에 집중하라.


(본 기사는 더스파이크 2월호에 게재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1 타임머신을 타고~~


나에게도, 꼬마시절이 있었다!

배구 시작하기 전 이야기부터 해보고 싶네요. 기억하시나요?
키 크고, 얼굴 하얗고, 천진난만하고, 발랄한 아이였어요. 워낙 시골에서 자랐기 때문에 형들이랑 낚시하고 칡 캐고. 그런 기억이 전부예요. 그리고 배구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시작했죠.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요?
빵이랑 우유 준다고 해서 쫄래쫄래 따라갔죠. 초반엔 재밌더라고요. 공도 줍고 뛰어 다니고. 그런데 2주 정도 지나면서 힘들어졌죠. 울면서 안 한다고 하기도 했는데. 어쨌든 시작은 빵과 우유 때문이에요. 이것 때문에 악연(?)이 시작돼서 지금 32년째 하고 있어요(웃음). 지금 먹으라고 하면 먹기도 싫은 맛없는 빵이었는데, 그땐 얼마나 맛있고 부드럽던지.
초등학교 때는 정말 말썽꾸러기였어요. 까불고, 사고도 많이 치고요. 그러다 중1때부터 운동을 시작했죠. 아버지가(후국기: 전 럭키금성 배구선수, 여자 선경인더스트리 감독) 운동을 하셨기 때문에 그걸 보면서, 배구가 아니더라도 운동은 해야겠다는 생각은 했죠. 키가 커서 농구도 생각했는데, 아버지 따라서 자연스럽게 배구를 선택하게 된 것 같아요.

듣기만 해도 참 귀여웠을 것 같네요. 그렇게 배구를 시작한 이후에, 학창시절은 어땠는지도 궁금해요.
중·고등학교 때는 전혀 눈에 띄는 선수가 아니었어요. 주전선수도 아니었고요. 운동 못하겠다고 맨날 도망 나가고, 잡혀오고. 계속 그러다가, 대학에 들어가서 정신을 차렸죠. 당시에 어느 대학에 갈지 선택을 해야 되는 시점이었는데, 당시 경기대가 워낙 엄격하다는 소문이 많았어요. 그래서 형들도 “넌 경기대 가면 절대 못할 거다”라고 얘기했었죠. 너같이 맨날 도망 다니는 애가 견딜 리가 없다고(웃음). 그래서 안 가려고 했죠. 그렇게 결정해야 하는 당일까지 결정을 못하다가, 야간운동하고 내려오는 공중전화 박스에서 그냥 집에다 전화를 드렸어요. 경기대 가겠다고. 그렇게 순식간에 결정을 하게 돼서 경기대를 갔는데, 이건 정말…(;;;) 힘들긴 했지만 그 덕에 정신을 확실히 차렸어요.

갑작스럽게 경기대로 가겠다고 마음먹은 이유가 있었을까요?
당시를 돌아보니까 한국 국적도 아닌 제가,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는 거예요. 운동까지 그만하면 안 되겠다 싶어서 선택을 하게 됐어요. 정신 차리고 진짜 열심히 해보자고 마음먹고요. 그땐 정말 열심히 했어요. 다 참고. 정해진 훈련 끝나고, 식당 가는 길까지 또 러닝을 하고요. 그 순간에 정신을 차린 덕에 지금 자리까지 올라온 것 같아요.

그렇다면 방 선수는요?
저는 홍익대로 진학했는데, 당시에 창단된 지 얼마 안 된 때라 경기대에 비해서는 그렇게 엄하지 않았어요. 근데 저는 오히려 그런 게 맞더라고요. 서로 즐기면서? 편하게(^^). 4년 동안 운동하면서 땀을 두 번밖에 안 흘려봤어요(ㅋㅋㅋ). 그만큼 훈련이 많지는 않았어요. 그러다 보니 애들이 불안해서 스스로 훈련을 해요. 그러면서 더 잘 뭉치고, 경기에 나가서도 잘 맞고 했죠. 성적도 어느 정도 냈어요. 큰 부담을 안 주니, 자발적으로 열심히 했죠. 저는 오히려 이게 ‘신의 한 수’ 인 것 같아요.

완전 다른 스타일이군요?
그렇죠. 근데 이건 정말 스타일 차이인 것 같아요. 정답은 없고요. 잘 맞는 문화에 들어가서, 더 크게 성장할 수 있으면 되죠. 누가 욕할 수도 있지만, 이게 제가 살아온 길이니까요.
신봉이가 말은 이렇게 하지만, 열심히 했기 때문에 이 자리에 있는 거죠. 다만, 방법이 차이가 있는 거겠죠. 근데 정말 열심히 안 했으면 이 자리까지 못 왔을 수도 있어요.



후인정 “힘든 만큼 더 달콤했던 최고의 순간”

그렇게 다른 스타일대로, 졸업 이후는 어땠을까요?
실업 때 좋았던 기억도 있지만, 9년 동안 너무 힘들었어요. 계속 준우승에 머무른 다는 거. 처음에는 몰랐죠. ‘준우승도 어디냐, 잘했다’ 싶었는데 이게 9년이나 이어지니까 너무 힘들더라고요. 그땐 서른만 되면 은퇴를 생각하기 마련이라, ‘이러다 우승 한 번 못해보고 은퇴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죠. 이런 불안감이 너무 커지다 보니, 삼성이란 팀이랑 게임을 하면, 배구 자체가 안 된다고 할까요. 하면 진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너무 컸어요. 정말 힘들었죠.

하지만 프로 원년이죠, 2005년. 드디어 경험했습니다, 우승! 그 순간을 떠올려 본다면요?
제가 생각하는 전성기 같아요. 그때 마음을 무척 독하게 먹었거든요.

이유가 있었을까요?
실업 때, 계속 준우승만 하던 시절에, 비시즌 때는 제가 팀 훈련을 거의 안 하고 재활만 했거든요. 그리고 시즌 시작하기 한 달 전쯤 합류해서 맞춰보고 경기에 나갔어요. 그렇게 2~3년을 지내다, 프로가 됐는데 그 때 김호철 감독님이 부임하셨어요. 곧 일본 전지훈련을 가게 됐는데, 감독님이 선수들을 다 모아두고 하신 얘기가 있었어요. 당시에 제가 주장을 맡고 있었는데, 저를 콕 집어 이야기하시더라고요. “인정이, 너 훈련했냐?” 는 질문에 “재활훈련만 했습니다” 하니까 바로 전지훈련에서 빠지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정말 안 갔어요?
네. 정말 안 데리고 가더라고요. 그때 자존심이 너무 상했어요. 나름 팀 에이스고, 주장도 맡고 있었는데, ‘어떻게 나를 빼고 가지’하는 생각에. 상처를 너무 많이 받아서, 그때 정말 이 악물고 했어요. 독기 품고 ‘그래? 날 안 데려가? 그럼 뭔가 보여줘야지’ 싶었죠. 나름 압박을 주신 방법이었던 것 같아서, 김호철 감독님께 고마워요. 그 덕에 다시 맘을 다잡고 더 열심히 운동을 했어요.

그 상처가 컸던 만큼, 우승 하고 개인상도 받고 했을 때 그 쾌감? 컸겠어요.
그렇죠. 그때, 혼자 밥 사먹으면서, 마음을 다 잡았죠. 그러다 잘 됐으니까, 정말 말도 할 수 없을 만큼 기뻤죠.



방신봉 “매일 행복하지 않아도, 행복한 일은 매일 있다”

근데, 후인정 선수는 했고, 방신봉 선수는 못 했죠?
그냥 우승이랑 인연이 없었던 거죠. 이렇게 배구를 오래하면서 챔피언 결정전을 한 번도 못해봤어요. 근데 이제는 크게 연연하지 않아요.

그래도 그 당시엔 기분이 좀 그랬겠어요.
인정이 형이 많이 부러웠죠. 저도 좀만 더 버텼으면, 그걸 겪어봤을 텐데(웃음). 근데 지나고 보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더라고요. 우승을 경험해보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벤치에 있으면서 내가 우승하는 것보다 경기를 뛰는 게 더 의미가 있으니까요. 후회 없어요. 우승을 향해서 노력하고 항상 꿈도 꿨지만 그건 저만의 의지로 되는 게 아니잖아요. 주어진 환경에서 물 흐르듯이 흘러가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그럼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였을까요?
글쎄요, 운동하면서 행복했던 순간은 거의 없었고 항상 우울했는데(웃음). 근데 하나 행복한 건, 가정을 꾸리고 배구를 하면서 배구 덕분에 이만큼 누리고 행복하게 산다는 게 항상 감사할 따름이죠. 배구가 있었기 때문에, 힘들기도 하지만, 뒤돌아보면 처자식도 먹여 살릴 수 있고, 해주고 싶은 거 다 해주고. 배구를 안 했으면, 키만 커서 뭐했겠어요.

항상 행복한 거군요. 그래도 전성기가 있을 것 같아요.
실업 때, 한창 현대에서 블로킹 1등 하던 때가 아닐까 싶어요. 그러다 후배들이 들어오면서 제가 설 자리를 조금씩 잃었죠. 그러다 2005년에 LIG에 현금트레이드 됐어요. 현대에서 나름 열심히 했는데, 김호철 감독님이 가게 됐다고 하시더라고요. ‘아직 살아있다’는 걸 보여주겠다는 독기도 품으면서, 그래도 새로 설 자리를 준 것 같아서 고맙게 생각하고 있죠. LIG에서도 열심히 했고, 블로킹상도 나름 나이 들어서 받았죠. 스스로 보여주고 싶었던 게 많았어요. 실력으로 밀려서가 아니라는 것을. 기업에선 어린 선수를 키워야 하니, 나이 때문에 그런 거라 생각하고 더 독하게 마음먹고 보여주려고 했죠.

마음먹은 대로 보여준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닌데 정말 대단하네요.
그런데 한 번 더 시련이 찾아왔어요. 난 할 의사가 있고, 할 자신이 있는데, 후배를 키운다고 하니까 할 말은 없었죠. 그래서 한 6개월 정도 쉬었습니다. 운동도 하고, 산도 다니고, 자식들은 학교 다니고요. 그런데 저는 밖을 매일 돌아다니고 하니까, 사람들이 저 사람은 키만 큰 사람이 뭐하는 사람인가 싶었을 거예요.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서, 똑같이 일어나서 어디든 출근은 했어요. 갈 데는 없지만, 어디든. 그렇게 3개월 정도 시간 보내고, 낚시도 해보고. 그러다 강만수 감독님이 프로로 전환한 한국전력 초대 감독으로 오셨거든요. 그때 한 번 더 기회를 받았죠. 다시 힘들게 기회를 받은 만큼 다시 열심히 했죠.

팀을 옮기면서 상처도 있었겠지만, 결국 좋은 선택이었네요?
그렇죠. 현대, LIG, 한국전력. 가는 팀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하나씩 심어둔 기록도 있거든요. 저만의 자부심이에요. 누가 알아주지 않아요. 기사도 안 나오더라고요(웃음). 근데 스스로 위안 삼는 거예요. 그만큼 상처를 딛고, 뭐라도 보여주려고 하고, 열심히 하려고 했던 증거인 것 같아 의미도 있다고 생각해요. 사람이 한 군데 오래 있으면 나태해지기도 하더라고요. 그런데 조금씩 옮겨 다니다 보니까, 내가 이만큼밖에 못할 것 같아도, 또 새로운 환경이 주어지면 또 그 이상이 되더라고요. 그걸 느껴서, 남들이 얘기할 때 제 7, 제 8의 전성기, 회춘했다. 이렇게 하잖아요. 힘들기도 하고, “마흔까지 하겠네” 했을 때 무슨 소리야 했는데, 이게 또 되더라고요. 웃기기도 하고요.



배구 대표팀의 전성기, 그 속의 둘

상처를 딛고 그 이상을 보여준 두 선수 정말 대단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대표팀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겠죠. 후 선수에게 더 의미가 있을 것 같은데요.
그렇죠, 국적 때문에 못할 뻔 했는데, 한국 국적을 획득하고 국가대표를 했기 때문에 저한테는 의미가 컸죠. 사실 아버지한테도 현역선수 시절 국가대표 의향 타진이 있었대요. 그런데 당시 할아버지 반대가 너무 심하셔서, 포기를 했다고 하더라고요. 외아들이기도 했으니 반대가 더 컸던 것 같아요. 그래서 아버지는 그 꿈을 못 이루셨는데, 그 아쉬움이 컸던지, 흔쾌히 허락 해주시더라고요. 바로 만 스무 살이 됐을 때 국적을 바꿔서 대표팀에 합류를 했죠.

태극마크를 달았을 때 그 느낌은 어땠나요.
정말 좋았어요. 국가대표라는 게 이 분야에서 최고라고 인정을 받는 거잖아요. 그리고 한국에서 계속 생활해야 하기에 큰 거부감도 없었고요. 처음 대표팀을 했을 때 성적도 좋았거든요. 그래서 더 뜻 깊은 의미가 있죠.

방신봉 선수는 처음 국가대표 느낌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어요?
성인대표팀은 1996년, 대학교 3학년 때였을 거예요. 당시에 일본이랑 애틀란타 올림픽 지역예선 경기였어요. 그 전에 한국에서 우리가 졌거든요. 그리고 일본으로 가서 한 번 더 하는데, 제가 들어가서 우연히 블로킹 두 개를 잡았어요. 그게 저한테 큰 신호탄이 됐죠. 그렇게 우리가 일본을 상대로 이겼어요. 그 이후로 계속 대표에 선발 됐고요. 올림픽도 나갔죠. 선수들에게 기회가 한두 번 온다고 하잖아요. 그때였던 것 같아요. 운 좋게 잘 잡아서, 많은 경험을 했죠.

그 결과만큼이나, 당시 멤버가 정말 좋았잖아요. 감독이라고 가정하고, 그때 멤버로 베스트라인업을 한번 꾸려볼 수 있을까요?
세터-신영철/라이트-김세진/레프트-신진식, 이경수/센터-방신봉, 리베로-이호. 당대 최고 레프트는 아무래도 신진식, 이경수예요. 센터 한 명은, 고르기가 힘드네요. 리베로는 여오현, 이호. 고민되는데, 그래도 이호!
세터-신영철/라이트-후인정/레프트-신진식, 석진욱/센터-최천식, 방신봉/리베로-이호. 레프트는 수비가 중요하기 때문에 한 자리는 석진욱. 공격은 후인정이 다 책임져줄 거예요. 센터에는, 최천식 감독님이 당시 잘했던 기억이 있고요. 한 자리는 아무래도 제가 들어가야죠(웃음).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바로 그 순간

흘러온 시간만큼이나 정말 많은 순간이 있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단 한 순간을 꼽아볼 수 있을까요?
저는 국가대표로서 뛸 수 있는 경기는 다 뛰어본 것 같아요. 올림픽, 세계선수권, 월드리그 등등. 근데 아시안게임만 못 나가봤거든요. 그러다 운이 좋게, 2006년 카타르 도하 아시안게임에 발탁이 돼서 가게 됐죠. 당시 고참이 저랑 신진식, 이경수 선수가 있었는데, 군입대 문제가 걸려있었어요. 그때 고참끼리 얘기한 게 있었어요. 꼭 메달 따서, 후배들에게 마지막 선물을 해주자. 그렇게 해서 금메달을 땄거든요, 그 순간이 기억이 많이 남아요.
제가 어렸을 때 무척 가난했어요. 아직도 제가 부추를 잘 안 먹거든요. 어렸을 때 찢어지게 가난해서 남이 준 부추로 김치 담가서 먹었어요. 그때 어린 나이에 그걸 보는데 눈물이 나더라고요. 제가 몸이 약한데도 불구하고, 당시 그 순간이 너무 떠올라서 악착같이 운동을 했어요. 평소에 장난도 많이 치고 그런데, 그러지 않으면 살 수가 없어요. 너무 답답해서요. 세리머니도 하는 게, 그렇게 해소를 하는 거예요. 지금도 한이 돼요. 부추를 보면서, 왜 우리 집이 이렇게 찢어지게 가난해서 김치도 못 먹고 부추를 먹느냐. 그래서 그 생각하면서 끝까지 열심히 했어요.

그래도, 지금은 많이 행복하죠?
지금은 부모님께 해드리고 싶은 거 다 해드리죠. 약간 저한테는 한이에요. 그 가난을 물려주고 싶지 않은 마음이 너무 컸어요. 저는 항상 첫째, 바르게 살자. 둘째, 초심 잃지 말자. 셋째, 정구지(부추의 충청도 방언) 이렇게 세 가지를 꼭 써놔요. 이 덕에 하루하루를 버틸 수 있었어요. 창피한 이야기일 수도 있죠. 근데 제가 우리 애들한테만큼은 자랑스러운 아빠, 사고 싶은 거 사줄 수 있는 아빠, 부모님께 뭔가 해드릴 수 있는 아들. 이게 참 좋죠. 배구 하면 힘든 기억들도 많아요. 하지만 배구가 있었기에 이렇게 떳떳한 아빠, 자랑스러운 아들이 될 수 있어서 행복해요.



#2 ‘은퇴’라는 두 글자


마음대로 할 수도 없는 그것

흘러온 시간보다 앞으로 시간이 더 적은 건 사실이잖아요. 아무래도 은퇴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 텐데요.
지금은 서른 후반, 마흔까지도 선수생활을 하지만, 실업팀 당시에는 서른살 쯤 되면 은퇴를 했어요. 운동을 안 해도 회사 근무를 주니, 은퇴를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죠. 이제는 프로니까, 내가 관리하는 만큼 선수생활도 길어지는 거니, 그게 그대로 생계로 이어지기도 하고요.

아무래도 시선이 조금은 달랐겠죠. 그렇다면 동료들이 은퇴할 때는요?
김세진, 신진식. 이런 선수들이 은퇴를 결정할 때는 기분이 이상했죠. 조금 더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고, 너무 일찍 은퇴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럼 방신봉 선수는, 지금 본인보다 더 어린 선수들이 은퇴하는 걸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세요?
운명이죠. 솔직히 저희에게 선택권이 있는 건 아니거든요. 할 의지가 있어도, 팀에서 의지가 없다고 하면, LIG에서 겪어 봤듯이 거기서 버틴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받아들여야죠. 어쩔 수 없는 거예요. 모든 조건이 맞아야 해요. 내 몸 상태도 중요하지만, 감독 의견, 팀 상황, 구단 의지. 사실 은퇴시기를 우리가 정한다는 게 정말 힘들어요. ‘박수칠 때 떠나라’는 말이 있지만, 박수칠 때 떠날 수 있는 사람이 어딨어요. 당장 먹고 살기가 힘든데(웃음). 사실 이 나이가 되니, 저희 뿐 아니라 다른 종목 은퇴하는 선수들 기사가 더 눈에 들어오기도 해요. 감정이입이 많이 되죠. 남 일이 아니구나 싶고요. 근데 이젠 순리에 따라서, 겸허히 받아들일 준비는 돼 있죠. 다만, 말하고 싶은 건, 저희가 나름대로 길을 터놓은 것도 있으니까, 후배들도 오랫동안 운동하는 선수들이 많이 나왔으면 해요. 때로는, 우리가 너무 오래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기도 해요. 근데 프로는 현실이니, 기회 줄 때까지 열심히 하겠다고 하고 있어요.
은퇴라는 게, 언젠가 해야 할 일이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닥치면 쉽게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한 6~7년 전부터 은퇴하겠다고 했죠. 그러다 지금까지 왔는데, 이젠 후배들도 알죠. “힘들어서 못하겠다”하면 “형, 7년 전부터 그런 얘기했었잖아요” 하고요.



#첫 번째 #두 번째 #충격 #덤덤 #노하우?

후인정 선수는 사실 은퇴가 두 번째잖아요. 처음엔 어떤 생각을 했나요?
사실 현대에서 나올 때, 좋은 기억은 아니었죠. 시즌 끝나고 쉬고 있는데, 전화가 왔어요, 구단에서. 왠지 모르게 무슨 얘길 할 것 같은 느낌이 오더라고요. 역시나, 은퇴결정이 났다고 하는 거예요. 휴가 기간에 짐을 빼도 되고, 끝나고 합류를 안 해도 된다고 했을 때 기분이 솔직히 정말 안 좋았죠. 휴가 기간에 이런 통보를 받는 것도 아쉬운데, 끝나고 같이 만나서 인사도 하고 나왔으면 더 좋았을 텐데 그런 기회조차 안 줬다는 느낌을 받아서요. 좋지는 않았지만, 이것 역시 어쩔 수 없는 거잖아요. 제가 어떻게 바꿀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근데 또 고마운 것도 있어요. 한국전력으로 옮길 기회가 됐는데, 다행히 현대에서 이적을 흔쾌히 허락해줘서 여기서 계속 뛸 수 있게 됐죠.

그럼 전화를 받았던 그 순간, 앞으로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을까요?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어요. 석 달 정도 동안 집밖을 나가지도 않았어요. 예상을 어느 정도 했다면 뭐라도 준비를 했을 텐데, 그게 아니니까요. 그냥 멍하게,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어요.

방신봉 선수는 처음 은퇴했던 그 순간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나요?
저도 그냥 후배를 키워야 된다고, 바로 통보를 받았죠. 근데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요. 바로 알겠다고 하고 나왔죠. 그래서 저는 어딜 가든, 짐을 많이 풀어놓지 않아요. 나가라고 하면 바로 챙겨서 나올 수 있도록. 여기서도 마찬가지예요. 팀을 옮길 때 짐이 많으면 힘들거든요(웃음).
이젠 노하우가 생긴 거죠.
그래서 후배들한테도 얘기해줘요. 나가라고 하면 잔말 않고, 짐 챙겨서 나와야 된다고. 이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되는 거라고. 필요로 하면 더 뛰는 거지만, 아니면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저로서는 지금까지 만으로도 정말 감사하게 생각해요. 인정이형이랑 저는, 운이 좋은 거죠. 팀 상황이랑 여러 가지로 맞아떨어진 게 있어서 지금까지 선수 생활 이어오고 있으니까요.

그럼 다시 팀에 돌아왔을 땐 어떤 생각이 들었어요?
기뻤어요. 선수생활 더 하기를 바랐는데, 또 우리 팀에 온다고 하니까 좋았죠. 숙소에 따로 찾아가서 얘기도 나누고. 제가 그 팀을 옮기는 심정을 알잖아요. 그래서 서로 공감대도 형성하고. 남 일 같지도 않았고요. 낯설지도 않았고, 포근하고 좋았죠.

후인정 트레이너는 다시 기회를 준 팀 안에 방신봉 선수가 있구나 하는 안도감도 물론 있었겠죠?
그렇죠. 현대에서 같이 생활했던 선수들도 있었고, 후배들도 정말 잘해줬고, 또 주장이라는 자리도 저에게 감사히 줬기 때문에, 여러모로 참 다행이었죠.

현대에 있을 때 대화랑, 한전에서 대화가 많이 달랐겠어요?
한숨을 많이 쉬죠. 그땐 젊고, 재밌는 얘기도 많이 하고 했는데, 이제는 한숨만 쉬죠 뭐.
주로 운동얘기만 하지, 특별한 얘기는 딱히 안 하는 것 같아요(웃음).



#3 인생은 지금부터


한국전력의 재전성기를 이끈 둘

힘든 시기들도 물론 있었습니다. 하지만 두 선수, 지금 활약이 정말 좋은데요. 특히나 한국전력 전성기를 함께할 수 있다는 것도 기뻤을 테고.
그렇죠. 후배들에게도 그렇고 신봉이에게도 고마운 게, 비록 플레이오프에서 떨어지긴 했지만, 그 기분을 느끼게 해준 게 참 고마워요. 다시 설렐 수 있게 해준 후배들에게 참 고맙죠.
저도 한국전력에 와서 지는 것에 길들여진 것도 없지 않았어요. 배구하면서 처음으로 하는 경험들이 정말 많았죠. 근데 지난 시즌에는 창단 이래 9연승도 해보고, 또 이 부분에서도 새로운 역사를 썼죠. 그 중심에는 인정이 형이 중심을 잘 잡아준 덕도 컸고, 감독님 노력도 컸고, 구단의 전폭적인 지원도 있었고, 이 시너지 효과 덕에 여러 가지가 잘 된 것 같아요.

지난 경기(1월 11일 OK저축은행전)는 정말 잘했어요. 방신봉 선수 활약 보면서 무슨 생각하셨어요?
고맙죠. 정말 잘했어요. 신봉이가 경기 전에 오늘은 뭔가 보여주겠다고 했어요. 세리머니 보여주는 것도 쉽지 않을 텐데, 분위기 끌어올린다고 무릅쓰고 해주는 것도 참 고맙고. 제가 선수로 있을 때는, 뒤에서 조언도 해주고 하면 되는데, 이게 다르거든요. 부담도 많이 될 거고. 주장을 달고 있진 않지만 주장 역할을 해줘야 될 거고.
그 분이 오신 거죠(웃음). 경기 전에 미팅을 했어요. 결과를 떠나서 웃으면서 하자고. 그게 주효했어요. 기회는 우리가 만드는 거니까 책임감 가지고 하자고 했더니, 눈빛이 달라지더라고요. 다 잘 된 것 같아요.

어제 뿐 아니라 그 나이로, 주전 센터로 뛴다는 게 참 쉽지 않죠.
불안하기도 하고, 힘들고 괴롭기도 해요. 제가 후배 자리를 뺏는 것 같아서요. ‘난 절대 안 밀려’ 할 단계가 아니잖아요. 젊은 후배들이 잘해줘야 저도 적절히 체력안배도 할 수 있는데 여의치 않아서 힘든 것도 많고요. 기회가 있는 게 좋기도 하면서 힘들기도 해요.

이제, 후인정 선수가 은퇴하면서 최선참이 됐습니다. 달라졌다는 게 느껴질까요?
신경을 안 쓰려고 했어요, 사실 2년 전에 인정이 형이 은퇴했을 때 1일 천하라고 하루 최선참이 됐던 적이 있었어요. 근데 다시 선수 생활 이어가기로 하면서, 다시 두 번째가 됐는데, 사실 그때 느껴봐서 지금은 큰 감흥은 없어요. 그리고 팀에서 트레이너로 함께 있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크게 달라진 점은 못 느끼고 있어요. 순리대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얘기하고 싶은 게 올스타전! 이번에 뽑혔어요~
저는 솔직히 몰랐어요. 팬들한테 정말 고마운 일이긴 한데, 제가 결혼을 빨리 해서 그런지 요즘 팬이 없거든요. 사실 그전에는 팬이 꽤 있었거든요. 형, 일본가면 내가 팬이 되게 많았었잖아(ㅋㅋㅋ). 제가 일본가면 싹 쓸었어요.

일본 가서 싹 쓸었다는 건 어느 정도예요??
아, 그땐 인기가 좋았어요. 그때 제가 일본의 어떤 배우를 많이 닮았다고 해서 인기가 좋았죠. 그런데 이제는 사인 해달라는 얘기는 많은데 선물은 안 주세요. 전광인, 서재덕 이런 애들은 잔뜩 받아오는데, 저는… 하나도 없어요. 근데 올스타전에 어떻게 뽑혔는지 모르겠어요. 옛날 팬들이 많은 것 같아요. 젊은 분들은, ‘그래도 나이 들어서 참 애쓴다’ 그러면서 감사히 뽑아주신 것 같기도 하고요. 다만 그때 열심히 뛰지 못해서 죄송할 따름이죠. 근데 또 코트 밖에서 하는 이벤트가 있더라고요. 제가 <내 나이가 어때서>에 맞춰 흥겹게 춤추면서 보여주고 왔죠.

방신봉 선수는 진짜 흥이 넘치시는 것 같아요.
제가 원래 내성적이고 말도 더듬고, 조금 소극적이었어요. 근데 운동하면서 많이 바뀌었거든요. 나중에 은퇴를 하면! 전국노래자랑에 한 번 나가고 싶더라고요.

전국노래자랑이요?
예, 그런 무대에서 사람들한테 웃음을 많이 주고 싶어요. 삶에 지치고 힘든 사람들한테 힘이 될 수 있잖아요. 사람이 웃는 것 만큼 좋은 치료가 없다고 들었거든요. 내가 받은 사랑을 다시 팬들한테 돌려주고 싶어요. 기회가 되면 한번 출연하고 싶어요. 노래는 못하지만 제가 갖고 있는 흥이라도 전하고 싶어서요. 제 바람입니다.



그 다음을 생각하다

재밌네요. 후인정 트레이너님은 은퇴를 결정했지만 최장수 선수 기록이 또 있어요.
이제 신봉이가 가져갈 거예요. 저는 지금 은퇴를 했지만, 신봉이가 몸관리만 잘 해주면 충분히 잘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안 돼. 인정이형. 나 배구만 하다 죽으면 안 돼.

은퇴를 했지만, 이것만큼은 해봤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게 있을까요.
딱히 없어요. 배구선수로서 해볼 수 있는 건 다 해봤어요. 받을 수 있는 상은 다 받았고, 나갈 수 있는 경기도 다 나가봤기 때문에 후회는 없어요. 조금 안타까운 건, 시즌이 끝나고 은퇴를 했으면 했는데, 여의치 않아 아쉬웠죠. 하지만 중간에 은퇴를 하니 바로 스태프로 배울 수 있는 것들도 많아서, 좋은 계기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앞으로 목표는요?
좋은 지도자가 되는 거요. 조금 당황스러운 게 있죠. 같이 선수생활을 했던 친구들이 지도자로서 벌써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상황인데, 뒤처지지 않나 하는 불안감도 있고요. 조금 더 빨리 배워야죠 뭐. 감독은 한 번은 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지금은 지도자로서 국가대표팀 감독이 목표가 아닐까 싶어요.

이런 사람이 내가 생각했을 때, 내가 그렸던 지도자상이다.
정말 어려운 건데, 신치용 감독님이랑 김호철 감독님을 섞고는 싶은데 두 분을 섞이면 너무 어마어마한 감독이 나올 것 같아서 어려움은 있을 것 같아요. 굳이 선택 하자면 김호철 감독님 같은 스타일? 코트에 있을 때, 쉴 때, 코트 밖에 있을 때. 구분이 확실해요. 코트 밖에 있는데 제대로 못 논다, 그것도 혼나요. 그런 구분? 놀라고 하는데 못 노는 것도 악영향이 올 수 있거든요.

그럼 방신봉 선수는?
글쎄요. 부상당하지 않고 끝까지 기회가 주어지는 만큼 최선을 다하고 싶어요. 많은 거 욕심내기보다도, 우리 후배들 상처 많이 안 받고 경기하는 동안만큼은 즐겁게, 재밌게 게임에 몰입해서 매 경기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하는 게 제일 큰 것 같아요. 그날 그날 후회 없는 경기를 하는 거요.

자, 두 선수의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벌써 시간이 이 만큼이나 흘렀어요. (무려 저녁 열한시 반!!!) 하고 싶은 이야기 다 했죠?
한 시간만 하기로 했는데 이렇게 됐네요. 30분 인터뷰 해봤지만, 이렇게 진솔한 이야기 처음 해보았어요.

기념으로 사진 남겨요!
이렇게 사진 찍으니까 나 완전 고등학생 같아. 배구 한 10년 더 해도 되겠어. 하하하하.


스파이크 질문!
후인정에게 배구란? 행복한 나날들.
스커드미사일이란? 20년째 따라다니는 별명.
아버지란? 존경의 대상, 그 자체.
김세진이란? 늘 따라다니는 얘기. 라이벌이자, 좋은 선배, 고마운 선배.
한국전력이란? 제2의 고향.

방신봉에게 배구란?
전부죠 전부. 모든 걸 다 줘도 아깝지 않은.
황금방패란? 자극제. 그 덕에 열심히 했거든요. 별명 지어준 기자님께 이 자릴 빌려 감사의 인사를!
세리머니란? 자신감 충전제
앞으로의 목표는? 뭐든 할 수 있다.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자존심, 체면 생각지 않는다.



TO SOMEONE SPECIAL
전광인 선수에게 하고 싶어요. 올 시즌 들어오기 전에 부상도 있었고 시즌 초반에 게임을 뛰네, 마네 하기도 했었는데 아픈 몸 이끌고 이렇게 게임 뛰어주는 게 고맙죠. 근데 걱정이 많이 돼요. 광인이는 지금보다 더 많은 시간을 겪어야 하는데 너무 무리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관리 잘해서 오래오래 좋은 배구선수, 훌륭한 선수가 됐으면 하는 게 선배로서 바람이에요. 이렇게 훌륭한 선수가 오래오래 운동했으면 좋겠어요.

저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예요. 하늘을 한번 우러러 보고요, 한번 웃었으면 좋겠어요. 맨날 땅만 보고 살잖아요. 하늘을 보면 목도 펴지고 가슴도 펴지니까요. 하늘 한번 보고 크게 한번 웃었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행복해질 거 같아요. 대한민국이.

저는 보통 이런 거 하면 보통 가족들에게 전하는데 후인정 트레이너님 보고 ‘되게 큰 사람이구나’ 싶었는데 방신봉 선수는 더 큰 사람이에요(웃음).

신봉이는 나중에 뭐 어디 출마할거야, 분명히 출마해.ㅋ

저는 수원시 한번 나가겠습니다. 저 이사람 한번 밀어주세요! ㅎㅎㅎ 다 웃자고 하는 얘기고요, 웃음이 보약이에요. 세상이 힘들고 각박하니 배려를 못해요. 서로 따뜻하게 격려 한마디 나눌 수 있는 포근한 세상이었으면 좋겠어요.



# 사진 : 신승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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