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스파이크=정태화 한국체육언론인회 사무총장] 배우회(排友會) 황승언 신임 회장(71)은 ‘배구계의 마당발’로 통한다. 단순히 배구인들을 많이 안다고 붙여진 말이 아니다.
유독 ‘네 편, 내 편’을 따지는 배구계에서 지역이나 학교, 인맥에 관계없이 선·후배 배구인들과 스스럼없이 잘 지내는 배구인이란 뜻이다. 자칫 무색무취(無色無臭)로 비쳐질 수 있지만 배구인 그 어느 누구도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몇 시간을 이어갈 수 있는 끊이지 않는 화제 거리에 구수한 입담, 선배들에게는 깍듯하면서도, 후배들에게는 격려를 아끼지 않는 선배로 소문나 있다.
제 19대 배우회 회장으로 취임해
황 회장은 강원도 출신이다. 강원도에서도 북한과 가장 가까운 고성군이 고향이다. 강원도 출신 배구인 이라면 페루 여자국가대표팀 박만복 감독, 후배인 진준택 전 고려증권 감독 정도뿐이다.
황 회장은 “강원도 출신으로 대한민국 국가대표 감독을 한 배구인은 진준택과 나, 2명이지만 올림픽 대표팀 감독을 한 사람은 혼자”라고 은근히 자랑한다. 페루 여자대표팀을 이끌고 1988년 서울올림픽에 참가해 은메달을 딴 박만복 감독은 대한민국 대표팀 감독은 아니었다는 것.
황 회장은 대한배구협회와 한국배구연맹(KOVO)에서 다양한 직책을 거쳤다. 대한배구협회에서는 강화위원 및 기술지도위원을 시작으로 기획이사와 강화이사를 지냈고 지도자로서 경험을 살려 MBC, SBS에서 10년 동안 족집게 해설로 명성을 떨쳤다. 또 KOVO에서도 경기운영위원, 판독위원장, 대외협력부장, 경기운영위원장을 지냈다. 이런 가운데 배우회 사무총장으로 8년, 상임부회장으로 6년을 보내고 지난해 12월 제19대 배우회 회장으로 취임했다.
배우회는 배구인들의 유일한 친목 단체다. 대한배구협회에 선수등록을 한 경력이 있는 배구인 가운데 남자는 45세, 여자는 40세 이상이면 모두 회원이 될 수 있다. 프로와 아마 구별도 없다. 이제 갓 중년에 들어서 원로라고 표현하기는 뭣하지만 배구에서 장년과 원로가 함께 어울릴 수 있는 곳이 바로 배우회다.
황 회장은 취임 인사말을 통해 “배우회는 대한민국 최고 배구 권위자들이 모인 곳이다. 권위자로서 지켜야 할 규범이 있다. 후배들로부터 존경받는 권위자가 되기 위해서는 올곧은 마음과 올바른 행동거지가 필요하다. 또한 선배가 후배들을 독려하고 힘을 실어 주어야 한다”며 뼈있는 말을 남겼다.
요즘의 배구 세태에 대해 마음에서 우러나는 충고다. 하지만 이는 선후배들의 마음에 서로 메우기 어려운 간극이 있다는 뜻과도 통한다.
“배우회가 단순한 원로 배구인들의 친목단체에서 벗어나 배구발전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할 시기가 온 것 같습니다. 배구계가 최근 들어 특정 인맥, 학교를 중심으로 편 가르기 양상도 보이는 만큼, 이러한 분열에서 벗어나 배구인들이 한 곳으로 뭉치게 하는 조정자 역할을 바로 배우회가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황 회장의 당찬 포부다. 많은 배구인들은 황승언이 원로 배구인들의 모임인 배우회의 회장이 되었기에 선후배들이 보다 가깝게 지낼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될 수 있을지 모른다고 희망을 걸고 있다. 원만한 대인관계로 선후배들 사이에서 그만큼 신망을 얻고 있다는 증거이자 기대가 크다는 뜻이다.
전국체전 출전 유혹에 축구에서 배구로
황승언은 스타플레이어 출신이 아니다. 태극마크를 단 국가대표는 커녕 주니어대표도 못했다. 처음부터 배구를 시작한 것이 아니라 속초중학교 2학년 때 축구선수에서 배구로 종목을 바꾸었다. 속초고와 대신고를 합해 고등학교를 5년이나 다녔고 실업 2년을 거쳐 대학 4학년 때 지도자 길로 들어서면서 사실상 선수생활은 마침표를 찍었다.
고성 천진초등학교 5학년부터 축구 선수로 활약한 황승언은 축구 특기자로 속초중학교에 입학했다. 1학년 개교 기념식 체육대회 때였다. 특기자들은 자기 종목에 나가지 못하고 다른 종목으로 바꾸어 나서야 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배구선수로 나갔다. 9인제 배구를 하던 시절이었다. 이게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버렸다.
배구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박종환 체육교사가 “배구하면 잘 하겠다”며 배구로 종목을 바꾸라고 권했다. 그러나 황승언은 “배구는 여자나 하는 종목”이라며 대수롭게 않게 여겼다. 박 교사는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2학년으로 올라가자 박 교사는 “속초중 축구팀이 속초 예선전과 강원도 선발전을 모두 이기고 전국체전에 출전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배구팀에 오면 그게 가능하다”며 전국체전 출전을 미끼로 유혹 했다. 당시 소년체전은 창설되지 않았고 전국체전에 중학교부가 있었다. 전국체전 출전은 당시 모든 선수들의 꿈이었다. 이 말에 황승언은 마음이 흔들려 결국 축구를 버리고 배구로 돌아섰다.
박 교사의 말대로 3학년 때인 1961년 전국체전에 나섰으나 우승과는 인연을 맺지 못했다. 진해중에 패해 준우승에 머물렀다. 속초고로 진학한 1962년 대구 전국체전에서도 인창고에 덜미가 잡혀 또 준우승에 그쳤다. 당시 인창고에는 진해중학교를 졸업한 이한구 구성삼을 비롯해 엄세창 최종옥 최낙형이 포진해 있었다. 결국 황승언은 이한구 구성삼에게 2년 연속 패한 꼴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속초고의 생활은 이것으로 마지막이었다. 졸업을 앞둔 11월 서울로 전학을 오면 청소년대표도 쉽게 될 수 있고 좋은 대학에도 갈 수 있다는 말에 3학년이 아니라 한 학년을 낮춘 2학년으로, 신생팀 대신고로 전학을 오게 된 것이다. 이 바람에 고등학교만 5년을 다닌 꼴이 됐다. 국제심판으로 명성을 떨친 고 최상근, 태광산업 감독을 역임한 이동연이 대신고 배구 1회 동기생들이다.
이렇게 대신고에 입학을 했지만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다. 속초고에서는 꽤 큰 키 였지만 대신고에 오니 177cm는 작은 편에 속했다. 주로 공격수보다는 세터로 활약했다. 하지만 대신고는 황승언이 졸업하고 난 뒤 2년 후배인 조재학이 입학하면서 무려 140연승이라는 전무후무한 연승 기록의 서막을 시작한다. 조재학은 키가 180cm로 작은 편이지만 높은 점프력과 강한 어깨로 한국 남자배구 사상 가장 강한 스파이크를 자랑했다. 여기에 김명수 이종구 등 당대 최고 레프트 공격수, 강길룡 조인재 김원종 김형실 등 라이트 공격수, 그리고 김명수 정문경 등 남자배구의 계보를 잇는 세터가 잇따라 나오며 ‘대신고 전성시대’의 막을 열었다. 황승언이 비록 대신고에서 큰 빛을 발하지는 못했지만 연승 신화의 주춧돌 역할은 한 셈이었다.
김우중 회장의 제의 뿌리치고 사우디에서 감독 데뷔
대신고 창단멤버였지만 기틀만 닦는데 기여한 채 졸업한 황승언은 실업팀인 대한전선에서 선수생활을 이어갔다. 그 때 실업팀은 1부와 2부로 나누어졌었는데 1부는 말 그대로 국가대표급 선수들이 포진한 명실상부한 실업팀으로 체신부, 한국전력, 봉명광업, 군대 팀인 CIC 등 6개팀, 2부에는 대한전선, 한국기계, 인천중공업, 서울약품, 동아제약 등 6개 팀이었다.
2부에서 우승을 하면 1부 꼴찌 팀과 승부를 가려 승격을 하는 승강제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실업선수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2년 만에 팀이 해체돼 그 해 창단한 명지대로 뒤늦게 진학의 길을 택했다. 국가대표를 지낸 김영상, 전 서강대 감독 이용관을 비롯해 우영일, 장부길, 윤길창, 오만경 등이 함께 호흡을 맞춘 창단멤버였다. 이후 명지대는 이들이 3~4학년이 되면서 종별선수권, 전국체전, 대학연맹전 등 거의 전 대회를 휩쓸면서 황금기를 구가했다.
황승언은 3학년 때 숭의여중 코치로 첫 지도자의 길로 들어선다. 4학년 때 이화여고를 거쳐 숭의여고를 맡았고 대학을 졸업한 뒤 잠시 한국실업배구연맹 사무국장을 지내다 1974년 본격적인 실업팀 지도자로 발을 들여 놓았다. 이때가 이낙선 협회장 체제에서 여자배구가 남자들보다 훨씬 더 높은 인기를 구가하던 황금기였다.
대한석유공사, 국세청, 호남정유, 태광산업, 산업은행 5개 팀에다 1973년에 여자 5개 실업팀이 무더기로 창단했다. 경남여고와 남성여고 선수들을 주축으로 한 한일합섬, 중앙여고 출신들이 주축이 된 동양나이론, 춘천 유봉여고를 중심으로 대우실업에다 산업기지개발공사, 전매청까지 창단했다. 이 가운데 산업기지 개발공사가 황승언의 첫 실업 지도자 코치로 둥지를 든 팀이었다.
산업기지개발공사에서 2년을 보낸 황승언은 대우실업 코치로 자리를 옮겼다. 바로 몬트리올올림픽이 열리던 해였다. 대우실업에는 몬트리올올림픽 동메달리스트인 마금자, 장혜숙을 비롯해 김길자 이동숙 김미봉 한정숙 김화순 등이 버티고 있었으나 국세청, 석유공사에 밀려 만년 2~3위였다. 우승에 목마른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이 세계적으로 명성을 날린 일본의 다이마스를 초청해 선수들을 지도하기도 했으나 우승과는 인연을 맺지 못했다.
이에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은 황승언에게 여러 차례 감독직 제의를 했으나 끝까지 고사했다.
“김우중 회장이 우승에 남다른 애착을 보이는데 그때 팀으로는 도저히 우승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거듭 고사하자 김 회장이 ‘너는 남자도 아니다’라고 꾸중을 하더라고요. 때마침 사우디아라비아 대표팀 한명섭 감독에게 부탁한 사우디 클럽팀에 자리가 있어 알 낫설 감독으로 부임했습니다.”
3년 계약으로 떠난 사우디에서 6년을 보내고 잠시 휴가차 귀국한 황승언에게 느닷없이 효성에서 감독직을 제의해 배구계 사상 처음으로 계약금(3천만 원)을 받고 국내에 정착했다. 10개 팀 가운데 최하위였던 효성을 3~4위권으로 올려놓으면서 지도자로서 능력을 인정받았으나 지나치게 선수를 감싼 임원들과의 불화로 2년을 채우지 못하고 물러나면서 국내무대 실업팀 지도자 생활도 막을 내렸다.
국내 출신 선수에게 기용 기회 더 부여해야
효성 감독을 마지막으로 실업팀 지도자 생활을 마친 황승언은 그 뒤 주니어 대표, 국가대표 여자팀을 맡아 각종 국제대회에 출전한다. 1986년에 제3회 아시아주니어선수권대회와 제3회 FIVB 서울국제대회에서 잇달아 감독을 맡았고 1988년 서울올림픽에도 여자대표팀 감독을 맡아 꿈에 그리던 올림픽 무대에도 나섰다.
서울올림픽에서 비록 꼴찌에 머물렀지만 1989년에는 다시 사우디로 건너가 1990년 베이징아시안게임에 사우디 남자대표팀을 이끌고 참가하기도 했다. 국내와 해외에서, 그리고 대표팀을 이끌고 각종 대회에 참석했으나 마지막까지 우승과는 인연을 맺지 못했다.
“배구는 팀웍이 깨어지면 아무리 좋은 선수들이 많더라도 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여자선수들은 감정이 섬세해 에이스라고 특정 선수를 감싸게 되면 순식간에 팀웍이 무너집니다. 룰을 정한 뒤 이것을 어기면 아무리 좋은 선수라도 제외해야 합니다. 원칙을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이미 지난 일에 이름을 밝히기는 어렵지만 효성에서 감독직을 그만두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팀 에이스를 임원이 지나치게 감싼 것이 원인이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올림픽 때 대표 팀을 구성하면서 모두 그 선수를 제외할 것으로 예상했으나 오히려 먼저 국가대표로 선발했다. 그 선수가 개인적으로 싫기는 하지만 실력만큼은 인정하기 때문이다. 바로 개인감정과는 관계없이 원칙을 지키는 선수관리나 지도력이 그를 각종 대회에서 주니어대표, 국가대표 감독을 맡게 한 원동력이나 다름없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프로배구의 발전은 궁극적으로 아마 배구의 활성화에서 찾아야 합니다. 프로배구 구단들이 성적에만 급급해 아마 배구를 도외시한다면 결국은 공멸하고 맙니다. 특히 지금 우리나라 선수들이 외국인 선수들의 들러리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많이 줘 아쉽습니다. OK저축은행과 현대캐피탈이 최근 들어 국내 출신 선수들을 많이 기용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그나마 다행스럽고 다른 팀들도 이에 호응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epilogue
황승언 회장과의 인터뷰는 1월 20일 갑작스레 이루어졌다. 평소에도 가끔씩 만나 소주잔을 기울이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별도의 인터뷰를 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황 회장의 구수한 입담에 순식간에 4시간이 훌쩍 지났지만 반도 끝내지 못할 정도였다. 무엇보다 황 회장은 자신이 배우회 회장으로 재직하는 2년 동안, 모든 것은 제쳐 두고라도 “대한배구협회와 한국배구연맹(KOVO) 사무국에 꼭 배구인 출신이 들어갈 수 있도록 하고 싶다”는 말을 몇 차례나 했다. 이와 함께 배구계가 언제부턴가 선후배들 사이에 너무 불신의 폭이 깊은 것 같다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 이를 해소할 방안을 찾는데 힘을 쏟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 사진 : 유용우 기자, 본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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