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스파이크=류한준 조이뉴스24 기자]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 시카고 컵스 내야수 어니 뱅크스,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23년간 뛰면서 마지막 타격 3관왕을 차지한 칼 야스트렘스키. 공통점은 현역 시절 화려한 스타플레이어였다. 개인기록이 뛰어날 뿐더러 소속팀에서 팬 사랑을 한 몸에 받은 프랜차이즈 스타다. 둘에게는 한가지 더 같은 부분이 있다. 바로 소속팀 우승과 인연이 없었다. ‘무관의 제왕’이라 불렸다. 뱅크스와 야스트렘스키 외에도 많은 스타들이 무관으로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팀에서 차지한 비중과 임무 등을 폄훼하려는 건 아니지만 주전이 아닌 백업, 스타플레이어가 아닌 그저 그런 선수가 더 많이 우승을 경험하는 경우도 있다. 개인 종목이 아닌 단체 종목인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V-리그에도 해당하는 선수가 있다. 정확히는 더 이상 선수로 코트에 서지 않는다. 2월 27일 구미 박정희체육관에서 열린 KB손해보험과 대한항공과 경기에서는 한 사내를 위한 특별한 자리가 마련됐다.
KB손해보험의 전신인 LG화재 유니폼을 입고 실업시절을 거쳐 프로 출범 원년(2005년) 멤버였던 이경수의 은퇴식이 열렸다.
성인무대 데뷔 불운? 악연?
이경수는 대전 중앙고 시절부터 거포로 촉망 받는 유망주였다. 센터 포지션이 아닌 레프트로 2m 가까운 신장에 뛰어난 운동능력은 단연 눈에 띄었다.
이경수는 치열한 스카우트전 끝에 한양대 유니폼을 입었다. 대학 시절 한국배구 차세대 공격수로 늘 맨 앞에 꼽혔다. 김세진(OK저축은행 감독)의 체구에 신진식(삼성화재 코치)의 센스를 갖춰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경수는 라이트 공격수로 이름을 알렸던 장병철(한국전력 트레이너)과 함께 남자배구의 전성기를 이끌 선수로 첫 손가락에 꼽혔다. 이경수 이후 대형 레프트 공격수 계보를 잇는 선수는 많았다. 김요한(KB손해보험) 문성민(현대캐피탈)이 대표적이다. 이들도 대학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내며 주목을 받았지만 이경수와 비교하면 모자랐다. 코트 안에서 이경수 존재감은 컸다. 대학 진학을 앞두고 이경수 선택에 대해서는 여러 얘기가 나왔다. 그만큼 진로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대학졸업반 시절 불거진 스카우트 파동에 비하면 약과였다. 2001년 국내 배구계는 이경수 진로 문제로 시끄러웠다. 당시 실업배구 체제로 드래프트를 통해 신인 선수를 수급했다. 그런데 이경수가 이를 거부했다. 그는 LG화재와 계약했다. 그러자 삼성화재, 현대캐피탈, 대한항공 등이 이에 반발했다. 스카우트 파동이 일어난 것이다.
드래프트대로라면 이경수는 대한항공 유니폼을 입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이를 거부했다. 당시 선수영입을 위한 자금력 등 자유경쟁 선발제라면 결코 LG화재에게 밀리지 않던 삼성화재나 현대캐피탈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특히 대한항공의 반발은 거셌다. 실업리그를 주관하고 있던 대한배구협회는 이경수에 대한 처리 문제를 두고 골머리를 앓았다.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았고 각 팀들의 이해 관계가 얽혀 결론이 쉽게 나지 않았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처럼 언제나 제자리를 맴돌았다.
볼을 놓았던 2년, 아쉬웠던 전성기
2002년은 대부분 스포츠팬들이나 일반인들에게 ‘월드컵의 해’로 기억된다. 거스 히딩크 감독이 이끈 한국축구대표팀은 ‘2002 한·일월드컵’에서 월드컵 출전 사상 역대 최고 성적인 4위에 올랐다.
월드컵 감동이 여전히 남아있던 그 해 이경수는 ‘코트의 미아’가 됐다. 스카우트 논란으로 이경수와 계약한 LG화재는 2002~2003시즌 슈퍼리그 불참을 선언했다. LG화재는 ‘이경수에게 계약금으로 지급한 금액을 각 구단이 드래프트 금액으로 인정해달라. 그래야 드래프트에 참가하겠다’고 했다. 당시 알려진 액수는 16억원이다. LG화재 주장은 바로 벽에 부딪혔다. 삼성화재와 현대캐피탈은 ‘개별 구단과 선수가 맺은 계약조건을 다른 구단에게 강요할 수 없다’고 맞섰다. 좋지 않은 선례로 남을 수 있다는 우려도 내세웠다. 결국 각 팀이 대립각을 세웠다. 결론은 나지 않고 평행선을 달렸다. 당시 드래프트 규정대로라면 이경수를 품을 수 있던 대한항공을 대신해 삼성화재와 현대캐피탈이 같은 목소리를 낸 셈이다. 구단 이기주의 때문에 선수가 피해를 본다는 얘기도 나오기 시작했다.
LG화재의 슈퍼리그 보이콧 선언으로 이경수는 코트에 데뷔하지 못했다. 그는 2002 부산아시아경기대회에서 ‘무적선수’로 태극마크를 달았다. 이경수는 LG화재 선수로 인정받지 못하고 대표선수로 자격만 인정받은 상태였다. 한국이 남자배구 금메달을 따는데 이경수도 일조했지만 마음은 결코 편하지 않았다. 금메달로 대표선수들 모두 기뻐했고 병역혜택을 받았지만 마냥 좋아할 수 없는 상황. 코트로 돌아갈 길은 멀어만 보였다.
스카우트 파동의 마무리
이경수는 2003~2004시즌 실업무대에 첫 선을 보였다. 대한배구협회는 LG화재를 비롯해 대한항공, 삼성화재, 현대캐피탈 등 당시 실업 4팀 사령탑과 구단 관계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경수 문제를 매듭졌다. 지루한 다툼이 끝난 것이다.
대한배구협회는 2002년도 대학졸업 선수 추가 드래프트를 실시했다. 법원 조정에 따른 자리였다. 그 결과 이경수는 1순위 지명권을 갖고 있던 대한항공에 지명된 뒤 LG화재로 양도됐다.
추가 드래프트에 앞서 서울고등법원에서는 각 구단에 화해 조정안을 냈다. ‘이경수에 대해 드래프트를 실시하되 지명권을 갖게 된 구단이 LG화재에 이경수를 양도하고 대신 추후 신인선수 1차 지명권을 받는다’는 내용이다. 대한배구협회와 각 팀들은 이를 받아들였다.
이경수는 2003~2004시즌이 개막된 뒤에도 코트에 나서는 시간을 뒤로 미뤘다. 아시안게임 금메달 획득에 따른 병역혜택을 해결하기 위해 기초군사훈련을 받아야 했기에 코트 복귀를 미뤄야 했다.
2년이라는 금쪽같은 시간이 날아갔다. 다시 코트에 서기까지 20개월이 걸렸다. 배구계 전체를 봤을 때도 큰 손해가 됐다. 태극마크를 달고 국제대회를 뛸 수는 있었지만 제대로 된 운동을 꾸준히 할 수 없었다. 선수로서 전성기를 보낼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야 할 시기를 놓쳤다.
이경수도 훗날 당시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면 가뜩이나 없는 말수가 더 적어졌다. 그는 “시간을 되돌린다면 모든 상황을 떠나 그때 운동을 제대로 했어야 했다”고 종종 말했다. 대한항공은 당시 이경수에 대한 권리를 양도하면서 받은 추후 드래프트 지명권으로 V-리그 출범 원년이던 2005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신영수와 김형우를 각각 1, 2순위로 뽑았다. 둘은 올시즌에도 여전히 대한항공 유니폼을 입고 코트에서 뛰고 있다.
V-리그 코트 역시나 명불허전
성인배구가 프로로 옷을 갈아입었다. 한국배구연맹(KOVO)이 닻을 올렸고 2005년 겨울리그를 시작으로 V-리그가 출범했다.
이경수는 김세진, 신진식, 후인정(한국전력 트레이너) 등 쟁쟁한 공격수들과 경쟁했다. 자신과 견줘 나이와 구력이 더 많은 선배들을 개인기록에서 앞섰다. 이경수는 2005시즌 21경기 83세트에 나와 548점을 기록했다. V-리그 원년 득점상과 서브상 주인공이 됐다. 배구팬들은 코트에 오랜만에 돌아온 이경수를 반갑게 맞았다.
V-리그 인기상도 그 차지였다. 그는 2005년 12월 3일 구미 박정희체육관에서 열린 상무(국군체육부대)와 경기에서 25점을 기록하며 LIG손해보험의 3-1 승리를 이끌었다. 이날 경기에서는 의미 있는 기록이 나왔다.
V-리그 로컬룰이긴 하지만 이경수는 남녀부를 통틀어 1호 트리플크라운 주인공이 됐다. 후위공격 5개, 블로킹 3개, 서브에이스 3개를 기록하며 역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했다. 그는 두 차례 더 트리플크라운을 작성했다. KOVO 기준 기록에 해당하는 3천득점 고지도 이경수가 가장 먼저 올랐다.
2012년 12월 29일 구미 박정희체육관에서 열린 삼성화재와 홈경기에서 V-리그 남녀부를 통틀어 처음으로 3천득점을 넘어섰다.
LIG손해보험은 이경수의 대기록 달성을 승리로 자축했다. 이경수는 18점을 올렸고 당시 그와 함께 주 공격수로 활약한 오레올(쿠바, 현 현대캐피탈, 당시 등록명은 까메호)은 33점을 기록했다. 레오(쿠바)와 박철우 좌우쌍포가 버틴 심상화재를 상대로 3-0 완승을 거뒀다. 이경수는 지난 시즌까지 통산 득점 3,841점, 공격 득점 3,250점, 서브 득점 195점으로 각 1위를 기록했다. 공격만 잘한 건 아니다. 수비와 리시브에도 참여해야 하는 포지션 특성상 리시브 부문에서도 통산 6위(3,052개)에 이름을 올렸다.
무관의 제왕
이경수는 화려한 조명과 기대를 받고 V-리그에 왔지만, 소속팀은 우승과 거리가 멀었다.
2005~2006시즌 포스트시즌을 처음 경험했다. 플레이오프에서 선전했지만 실업시절부터 V-리그 원년까지 최강 전력을 자랑했던 삼성화재를 넘지 못했다. 당시 LIG손해보험에게 불운이 따랐다. 외국인선수 키드(브라질)가 부상으로 정작 중요한 시기에 함께 뛰지 못했다. 이경수에 몰리는 공격부담은 성공률 저하로 이어졌다. 결국 2패로 플레이오프에 탈락했다. 이때만해도 이경수와 ‘봄배구’가 서로 인연이 없었다는 걸 예상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LIG손해보험은 당시 삼성화재와 현대캐피탈의 양강 구도를 대한항공보다 먼저 깨뜨릴 수 있는 후보로 평가 받았다. 하지만 이경수와 LIG손해보험에게 두 번째 ‘봄배구’는 2010~2011시즌이 돼서야 가능했다. 이번에도 이경수 앞을 가로막은 건 삼성화재다. 삼성화재와 준플레이오프전에서 2차전 승리(3-2승)를 거둔데 만족해야 했다. 1승 2패로 밀려 5년 만에 맞은 ‘봄배구’를 일찍 마감했다.
이후 ‘봄배구’는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그 사이 우승의 기쁨을 잠깐 맛보긴 했다. 2012년 8월 열린 프로배구 컵대회 결승에서 삼성화재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2012~2013시즌은 그래서 ‘봄배구’에 대한 기대가 컸다. 하지만 역시나였다. 13승 17패, 5위로 정규리그를 마쳤다. 코트를 떠날 시간이 점점 다가왔다. 크고 작은 부상이 계속 그를 괴롭혔다. V-리그 정규시즌이 끝난 뒤 재활에 집중하는 일이 너무나 익숙해졌다. 어느덧 코트에서 마음껏 움직일 수 있던 예전의 몸상태가 아니었다.
지난 시즌 11경기 17세트 출전에 그쳤다. 득점은 고작 8점에 그쳤다. 부상을 이유로 많은 경기에 나서지 못한 2011~2012시즌과 2013~2014시즌에는 그래도 세 자리 수 득점은 올렸다. 천하의 이경수가 웜업존에서 후배들 플레이를 지켜보는 시간이 늘어났다. 이경수는 자신의 자리를 물려받을 거라 의심치 않았던 김요한과 ‘거포’ 외국인선수가 팀에 오면서부터 ‘제2의 배구인생’을 준비했을지 모른다. 주 공격수가 아닌 김요한과 외국인선수의 공격을 보조했고 수비와 리시브에 좀 더 많은 기회를 가지려 했고 그렇게 했다.
시간의 흐름을 거스를 순 없었다. 힘들다는 얘기 한 번 제대로 한 적이 없던 이경수도 2013~2014시즌 종료 후 팀 숙소에서 만났을 때 “이제는 조금 힘이 든다”고 말한 적이 있다. 덤덤한 목소리였지만 울림은 컸다. 화려한 조명을 받고 V-리그로 돌아왔지만 쓸쓸한 퇴장이 떠올라서였다.
올시즌 이경수도 마지막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누구보다 더 열심히 준비하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뜻하지 않게 발목을 다쳤다. 그 바람에 시즌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여기에 허리까지 말썽을 부렸다.
이경수와 KB손해보험 구단은 결단을 내렸다. 시즌 개막을 앞두고 열린 신인 드래프트에서 레프트 황두언을 지명했다. 팀에는 이미 레프트 선수가 많았다. KB손해보험 유니폼을 입고서는 코트에 단 한번도 서지 못한 채 V-리그를 떠났다. KB손해보험 유니폼을 입고 팬들에게 인사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자리는 자신의 은퇴식이 됐다.
영원한 태극마크, 제2 배구인생
이경수는 대학 시절인 1997년 처음 성인대표팀과 인연을 맺어 2011년까지 한국배구를 세계무대에 알렸다. 부상으로 경기에 뛰지 못할 때를 제외하고 꼬박 꼬박 태극마크를 달았다. 그는 “가장 기억에 남는 대회는 아시아경기대회”라고 했다. 2002년 부산과 2006년 도하(카타르) 대회에서 한국남자배구는 아시아 최강 자존심을 지켰다. 신치용 삼성화재 단장과 김호철 전 현대캐피탈 감독이 각각 대표팀 지휘봉을 잡았고 이경수는 두 대회에서 주축 선수로 대표팀이 금메달을 따내는데 도움을 줬다.
배구선수로 경력이 쌓이자 소속팀 뿐 아니라 대표팀에서도 주장을 맡아 후배들을 잘 이끌었다. 선수 은퇴를 선언했을 때 그를 불러준 곳이 대표팀이었다는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과 같았다.
박기원 대표팀 감독은 이경수에게 트레이너 제안을 했다. 당장 대표팀 코치자리를 맡기진 못하더라도 선수들과 함께 생활하며 지도자로서 한 계단씩 밟는 게 낫다는 판단에서다. 박 감독은 2007~2010년까지 LIG손해보험 사령탑으로 이경수와 함께 있었다.
이경수는 “이제야 조금은 마음이 진정됐다”고 했다. 은퇴를 결정한 뒤 짐을 정리하고 팀 숙소에서 나와 집으로 갔을 때는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4명 아이들이 아빠를 맞았기 때문이다. 선수 생활을 하는 동안 가족과 보낸 시간은 손꼽을 정도였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이 허전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배구 외에 당장 다른 일을 해야 했는데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대표팀 트레이너 제안은 이경수 마음을 움직였다. 지난해 12월부터 대표팀에 들어가 일을 했다. 1월 3일 진천선수촌에 박 감독과 함께 입소해 1차 소집된 ‘젊은 대표팀’을 처음 만났다. 마음은 아직도 당장 코트로 들어가 후배들과 함께 땀을 흘리고 몸을 던지며 스파이크를 날리고 싶다.
이제는 선택을 했고 제2의 배구인생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이경수는 한국남자배구가 마지막으로 올림픽 출전권을 따냈을 때와 아시아경기대회 금메달을 목에 걸었을 때 선수로 있었다. 이제는 선수가 아닌 코칭스태프로 목표를 달성하는 데 힘을 보태야 한다. V-리그를 마친 뒤 대표팀은 바빠진다. 월드리그를 거쳐 AVC(아시아배구연맹)컵 대회를 나간다. 2018 자카르타 아시아경기대회와 2020 도쿄올림픽 본선 진출 준비를 위해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기에 허투루 준비를 할 수 없다. 이경수가 그때까지 대표팀 코칭스태프로 활동이 보장된 건 아니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박 감독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태극마크를 가슴 한 쪽에 새기고 뛰는 동안 받았던 팬들의 성원을 이제는 후배들에게도 되돌려줘야 한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그는 “선수로서가 아닌 다른 공부를 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선수와 지도자는 여러 면에서 차이가 나기 마련이다.
현재 대표팀에서 트레이너 신분이지만 이경수도 껍질을 깨고 나와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지도자로서 출발과 앞날에 응원을 보낸다.
# 사진 : 문복주 기자, 대한민국배구협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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