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동안 남이 주는 월급으로 살았어. 우리나라에 그런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어. 정말 복 받았지.”
희끗희끗한 머릿결에 거침없는 입담, 여기에 ‘족집게 명 해설가’로 배구 올드팬들에게는 너무나 친숙한 오관영(78)은 스스로 ‘복 받았다’고 서슴없이 말한다. 그가 ‘복 받았다’고 말하는 연유는 과연 무엇 때문일까? 산수(傘壽-80세)를 눈앞에 둔 그는 말 그대로 ‘한국 배구 해설의 개척자이자 산 증인’이다. 그는 지금까지 한시도 배구를 잊은 적은 없지만, 결코 배구에만 매달리지도 않았다.
‘50년 동안 남이 주는 월급으로 살았어.’
오관영이 배구와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용산중 3학년 때. 지금처럼 6인제가 아닌 9인제 배구였다. 그리고 인창고 3학년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6인제를 경험했다. 9인제 대회를 마치고 6인제 대회에 참가했다. 공격수가 아닌 백센터로 수비수여서 큰 두각은 나타내지 못했다. 경희대에 진학했지만 당시 경희대에는 배구팀이 없었다. 따라서 배구 선수로 뛴 경력은 모두 합해 4년이 고작이다. 국가대표는커녕 청소년대표도 지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때도 선수들의 가능성을 알아보는 눈은 뛰어났던 것 같다. 이규소와 이창호가 재미로 배구공을 갖고 노는 모습을 보고 선수로 스카우트했다. 이규소와 이창호는 우리나라 남녀 국가대표 감독을 역임한 대표적인 감독. 그가 고려증권을 창단하면서 이규소 감독과 다시 인연을 맺고 이창호 감독은 미도파의 전승시대를 연 여자배구의 산증인이다.
그가 대학을 졸업하고 균명고등학교(현 환일고등학교)에 체육교사로 부임한 것이 1963년 25살 때. 그리고 5년 뒤인 1968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배구 해설가로 방송에 데뷔했다. 교사로 15년, 단순한 배구 해설가를 넘어 전천후 방송인으로 명성을 떨친 지 10년이 지난 1978년 그는 홀연히 교사직을 팽개치고 중견기업인 고려통상주식회사의 계열사인 동광제약의 총무부장으로 입사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 ‘바덴바덴의 기적’이라 불리는 1988년 서울올림픽 유치가 결정되고 난 뒤 그는 1983년 1월 고려증권 상무이자 단장으로 남자 배구팀인 고려증권을 창단해 실업 최강으로 키우면서 남자배구의 중흥기를 이끌었고 6개 계열사를 돌며 사장까지 지냈다.
고려증권이 한창 주가를 올리던 1998년 통영에서 열린 실업연맹전을 끝으로 30년 방송인으로서 생활을 마감하면서, IMF 환난을 맞은 고려증권도 팀 해체 수순을 밟게 되었다. 다시 교육계로 돌아간 그는 2002년 미션 스쿨인 예일학원 설립자인 김예환 박사의 권유로 목사로 변신했다. 예일학원은 바로 환일고등학교와 같은 학교법인이다. 환일고등학교 교목을 지내면서 예일초등학교 교장 목사, 예일재단 이사장을 역임하며 새에덴교회와 꿈의 교회 협동목사도 지내고 75세가 되던 2013년 물러났다.
1963년 25살 나이로 환일고등학교 체육교사로 시작해 2013년 75살로 현역에서 물러날 때까지 한시도 쉬지 않았다. 비록 배구 해설은 이보다 한참 전인 1998년에 마쳤지만 그동안 원로배구인 모임인 배우회 회장을 맡기도 했다.
“체육인, 방송인, 경제인, 교육자에다 목회자까지…. 방송인으로 화려한 삶도 살았고 중견기업 사장까지 지냈습니다. 또 내가 창단한 배구팀이 최고 명문 팀이 됐습니다. 그리고 많은 제자들을 기르고 복음을 전파하고. 이보다 더 복된 삶이 어디 있습니까? 그것도 무려 50년 동안입니다. 지금은 그 어떤 말보다 목사님이라고 불러주는 게 가장 좋습니다.” 입가에는 자긍심이 잔뜩 밴 넉넉한 웃음이 감돌았다.
‘30년은 채우고 그만 두고 싶었어.’
대부분 우리네 삶이 우연으로 시작해 필연으로 이어지듯이 오관영이 배구 해설가 길을 걷게 된 것도 우연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환일고 체육교사를 하면서 학업을 병행하던 경희대 대학원 2학년 때 논문발표를 하는 모습을 본 동양방송(TBC) 김재길 PD 눈에 띈 것 자체가 우연이나 다름없었다. 항상 머리를 짧게 깎고 다녀 ‘까까 PD’로 불린 김 PD는 우리나라 스포츠 1호 PD. 고려대를 졸업하고 뒤늦게 경희대 대학원에 다닌 김 PD는 오관영보다 연상이었지만 학년은 오히려 1년 후배였다.
“느닷없이 김 PD가 너 운동 뭐했어? 하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배구했다고 하니까 그럼 배구 해설해 봐. 그래서 해설하기 시작했습니다.” 너무나 싱거운 해설가로 데뷔이지만 바로 명해설가 탄생의 첫 걸음이었다.
방송 데뷔 무대는 1968년 3월 TBC-중앙일보가 공동주최한 고교배구대회였다. 하지만 첫 방송부터 대형사고(?)를 치고 말았다. 대결하는 두 팀 실력 차가 너무 많이 나는 바람에 솔직하게 “저 팀은 수준이하입니다”라고 말했던 것. 자신들이 주최하는 대회에 초청된 팀을 해설자가 수준이하라고 말했으니 김 PD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중계실에 마련된 유선전화로 대뜸 “야 XX야, 이게 어디 주최인데 수준이하야?”며 혼쭐이 났던 기억도, 지금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그는 고 남정우 아나운서와 콤비를 이루어 해설을 시작한 뒤 원종관, 임문택, 최평웅, 임건재, 유수호 아나운서를 거쳐 허주 아나운서와 마지막을 장식할 때까지 꼭 30년을 채우고 마이크를 놓았다. 30년 동안이나 굳건히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보적인 해설 덕분이었다. 높지는 않지만 귀에 쏙 들어오는 카랑카랑한 목소리, 해박한 배구 지식에다 선수들의 세세한 특징까지 모두 꿰뚫어 배구 팬들의 눈과 귀를 시원하게 해 주었다. 때로는 호되게 질책하면서도 형님처럼 감싸주는 따사로움도 가졌다.
“아마 시청자들은 잘 모르시겠지만 엄청나게 많은 실수들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실수한 기억보다 더 감동스러운 기억만 남아 있습니다.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 한 장 남은 티켓을 두고 나고야에서 독일과 맞붙을 때였습니다.”
마지막 5세트에서 11-14로 뒤지고 있다가 한 점씩 따라 붙은 뒤 마낙길의 강타로 16-14로 역전승하며 바르셀로나 행을 결정하자 자신도 모르게 말이 떨리고 눈물이 흐르던 감격적인 순간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하일성을 야구해설가로 데뷔시키던 기억도 그에게는 빼놓을 수 없는 추억거리 가운데 하나다.
김 PD와 인연이 10년이 지난 뒤인 1979년 3월 쯤 고교야구가 한창 인기가 높던 시절이었다. 당시 TBC에는 야구 서동준, 농구 김영기, 복싱 노진호·노병엽, 축구 김창기·최은택, 배구 오관영·김한수 등이 스포츠 해설을 맡고 있었다. 그런데 은행 지점장이었던 서동준이 야구 해설을 한다고 자리를 자주 비우자 본점에서 야구 해설을 중지시켜 버려 갑자기 야구 해설자가 한자리 비게 되었다. 그러자 김 PD가 오관영에게 “야, 야구 해설할 너 같은 친구 어디 없어?”라고 묻자 순간적으로 김포 양곡종합고등학교에서 환일고등학교로 데려왔던 하일성이 문득 떠올라 다짜고짜 학교에 전화를 걸어 수업중인 하일성을 방송국으로 호출해 추천했다. 야구 해설에 입담 좋기로 유명한 하일성이 태어나게 된 동기였다.
(2편에 계속)
글/ 정태화 한국체육언론인회 사무총장
사진/ 문복주 기자
(본 기사는 더스파이크 5월호에 게재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저작권자ⓒ 더스파이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