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83%. 경남과학기술대 레프트 김인혁을 가장 잘 표현한 수치다. 이것은 김인혁이 팀에서 차지하는 공격점유율이자 그가 짊어진 책임감 무게다.
경남 진주에 위치한 경남과학기술대(이하 경남과기대)는 2009년 3월 17일, 배구부가 창단됐다. 창단 8년에 불과하지만, 정민수(우리카드), 용동국(우리카드-화성시청) 등 다수의 프로선수를 배출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을 유망주가 있다. 그가 김인혁(21·2학년)이다.
지난해 경남과기대에 입학한 김인혁은 새내기답지 않은 파워와 득점력으로 팀 에이스로 거듭나며 이름을 떨쳤다. 레프트 김인혁은 어떤 선수일까?
130cm 소년, 배구선수를 꿈꾸다
어머니 권유로 배구를 시작한 김인혁. 초등학교 3학년 말 배구부가 있는 김해 화정초로 전학 가며 배구인생을 시작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키는 130cm. 또래에 비해 무척 작은 편이었다고 한다. 꾸준히 자라긴 했지만 중학교 3학년 때도 170cm에 그쳐 높이가 아쉬웠다. 결국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1년 유급을 선택했다. 당시 키가 큰 동료들을 보며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배구를 그만둬야 하나 고민도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도 배구를 놓지 않았다. 그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왠지 키가 클 것 같았어요. 실제로 고1 때 8~10cm 자랐어요. 그 해에 많이 컸죠. 그런데 지금은 안 자라는 것 같아요”라고 웃으며 답했다. 그는 ‘폭풍 성장’ 비결로 ‘두유’를 꼽았다. “우유보다 두유가 키 크는 데 도움이 많이 된다고 들었어요. 제가 우유를 안 좋아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두유를 많이 마셨어요”라며 두유에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초등학교 때 김인혁은 센터였다. 중·고등학교 때는 세터와 레프트를 오갔다. 포지션별 장단점을 물으니 “세터는 공격수보다 비교적 몸이 덜 아프고 마음이 편해요. 세터로 뛸 때는 어려서 부담감이 별로 없었어요. 중학교 때 팀에서 제가 나이가 제일 많았어요. 선수들 중 제게 뭐라고 할 사람이 없어서 편했는지도 몰라요(웃음)”라고 밝혔다. 이어 “레프트는 공격을 많이 때리다 보니 부상이 많고 책임감도 커요. 제가 점수를 결정해야 이길 수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도 레프트로 뛸 때 더 인정을 많이 받은 것 같아요”라고 설명했다.
김인혁의 경기를 본 사람들은 대개 ‘김인혁이 공을 때리면 공 터지는 소리가 난다’고 얘기한다. 그만큼 파워가 세다는 뜻이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몰랐다. “한번도 그렇게 느껴본 적 없었어요. 주위에서는 다들 제가 힘이 세다고 하긴 하더라고요”라며 미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그가 말하는 본인 장점은 스윙 스피드다. 공격할 때 스윙이 빨라 득점에 용이하다는 것이다. 반대로 단점은 느린 발과 낮은 점프다. “발이 느리다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고등학교 올라오면서 키가 많이 컸는데 그때부터 느려진 건가 봐요. 점프도 조금 낮은 편이에요”라고 답했다.
고독한 에이스로 산다는 것
김인혁은 경남과기대 ‘소년가장’이다. 올해 무려 60%에 달하는 비중을 차지하며 홀로 팀을 이끌고 있다. 대학리그 6경기 18세트 동안 237개 공을 때렸고, 128득점을 올렸다(공격 성공률 54.01%). 서브와 블로킹을 합치면 총 득점은 136득점으로 대학리그 전체 선수 중 1위다(5월 15일 기준). “얼핏 듣긴 들었어요. 점유율이 높으니까 ‘그만큼 때렸겠지’라고 생각한 정도죠. 팀이 지니까 개인 기록에는 신경이 잘 안 쓰이더라고요”라며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김인혁은 ‘고독한 에이스’다. 김인혁 외에는 경기에서 두 자릿수 득점을 기록하는 선수가 거의 없다. 지난 4월 14일 성균관대와 경기를 보면 쉽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결과는 세트스코어 0-3으로 경남과기대 패배. 김인혁은 28득점 성공률 55.56%, 점유율 61.64%를 기록했다. 센터 김용근과 레프트 김태완이 그 뒤를 이었지만 각각 5득점에 그쳤다.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성적표였다.
“부담감이요? 아주 많죠. 제 점유율이 높다는 건 그만큼 저를 믿고 공을 많이 올려준다는 뜻이잖아요. 제가 안 풀리면 팀이 흔들리니까 더 열심히 해야죠.” 김인혁의 대답에서 어른스러움이 가득 묻어났다. “저희 팀은 기복이 심해요. 안 될 때는 서로 처음부터, 리시브부터 하자고 해요. 저도 공격이 1~2개만 잘 풀리면 다시 괜찮아지더라고요. 그래서 세터 (송)지민이 형한테 ‘그냥 저한테 올려주세요’라고 말해요.”
아픈 곳은 없을까? “작년에는 무릎이 좀 아팠는데 올해는 괜찮아졌어요. 선수들은 고질병 하나씩 다 있잖아요. 저도 똑같은 거죠. 올해는 시즌 끝날 때까지 안 아플 거예요. 안 다치기! 안 아프기!”라며 각오를 다졌다. 체력도 걱정됐다. “저희는 이기든 지든 3대0으로 끝나서요. 아직 체력에 무리가 가진 않아요. 경기 끝나면 좀 쑤시긴 하는데 얼음찜질하고 진통소염제 바르면 괜찮아져요”라고 답했다.
몸이 버텨주는 줄 알았지만, 건강에 적신호가 켜지기도 했다. “분명히 열심히 했는데, 잘한 거 같은데 매일 지니까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나 봐요. 위에 문제가 생겼는지 3일 동안 빈속에 토하고 그랬어요”라며 덤덤히 말을 이었다. 스트레스 해소법은 없다. “그냥 내버려두면 괜찮아지더라고요”라고 한다.
지난해에는 세터 박형경과, 올해는 세터 송지민과 호흡을 맞추고 있는 그. 두 선수 스타일이 달라 적응하는 데 애를 먹었다. “형경이는 볼을 본인이 잡았다가 주는, 높게 주는 편이에요. 지민 형은 빨리 올려주는 스타일이고요. 누가 더 좋다고 할 수 없어요. 누구한테든 적응되면 다 잘 맞는 거 같아요”라고 밝혔다.
정상을 향한 달리기
경남과기대 공격의 핵심으로 자리 잡은 김인혁. 일찌감치 가능성을 인정받고 2015년 아시아 U-23남자배구선수권대회, 국제대학초청 배구대회 대표팀에 이름을 올렸다. U-23 대회 한일전에서는 경기 최다 득점(18점)으로 한국팀 승리를 견인하기도 했다. 올해 1월에는 시니어 남자대표팀 중장기 프로젝트였던 ‘스피드 배구 특별훈련’에 발탁돼 한 달간 진천선수촌에서 훈련을 받았다.
“국제대회를 치르고 나면 시야가 확실히 넓어져요. 실력이 향상됐는지는 모르겠어요. 팀(경남과기대) 선수들은 저한테 대표팀 다녀오니 확실히 다르다고, 늘었다고 하더라고요. 신장이 큰 외국 선수들을 상대해서 그런가 봐요. 공격할 때 블로킹 보는 것, 빈 곳 찾아서 때리는 것 등을 배웠어요.”
롤모델은 레프트 전광인(한국전력), 곽승석(대한항공)이다. “공격 면에서는 광인이 형의 점프와 공 때리는 능력을 닮고 싶어요. 수비에서는 승석이 형이고요. 리시브, 디그 모두 안정감 있어요”
라이벌은 경기대 2학년 레프트 황경민이다. “굳이 뽑자면 황경민이에요. 사실 저는 라이벌은 생각을 안 해요. 저보다 잘하면 잘하나 보다 하는 거죠. 경민이는 점프가 좋아요. 승부욕이 대단해 코트에서는 무서워 보이지만, 같이 경기해보면 재미있어요. 약간 4차원 같다고 할까? 특이하거든요”라며 평소 황경민과 친분이 두텁다고 전했다.
한편, 황경민은 지난 시즌 신인상을 거머쥔 주인공이다. 이를 바라본 김인혁은 어땠을까. “저희 팀이 4강 안에 들거나 좋은 성적을 냈으면 욕심났을 거예요. 그런데 예선에서 탈락해 기대 안 했어요. 한 번밖에 못 받는 상이니까 받고는 싶었죠”라며 솔직한 마음을 드러냈다.
95년생 김인혁 이야기
경남과기대는 김인혁이 속한 2학년이 7명으로 가장 많다. 이들이 주축이 되어 팀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다. 때론 철부지처럼, 때론 해맑은 아이처럼 밝은 미소를 띠고 있는 경남과기대.
김인혁은 “저희는 서로 잘 뭉치고 잘 놀아요. 운동하다 주눅 드는 아이들이 한두 명씩 있어서 챙기려고 해요”라고 전했다. 실제로 경남과기대 선수들은 쉬는 시간에 학교 앞 카페로 몰려가 수다를 떤다. “각자 핸드폰 보다가 사소한 얘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요.”
사실 김인혁은 낯가림이 심하고 소심한 성격이다. 말수도 적은 편이었다. “대학 와서 많이 바뀌었어요. 활발하고 밝아졌어요”라고 한다.
김인혁은 소문난 대식가다. 고기를 먹으면 혼자 6~7인분을 거뜬히 해치우곤 했다. “올해는 입이 많이 짧아져 3인분 밖에 못 먹어요. 어느 순간부터 조금만 먹어도 금방 배가 부르더라고요.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 먹는 거에 비해 살은 별로 안 찌는 편이죠”라고 설명했다.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은 없지만 못 먹는 음식은 있다. 해산물이다. “어릴 때 먹고 토한 적이 있어요. 회, 초밥은 아예 안 먹어요. 주위에서 그 맛있는 걸 못 먹냐고 불쌍하다고 해요.”
평소 관심사는 미용이다. 겉보기엔 191cm 훤칠한 배구선수지만 알고 보면 세심하고 여성스러운 면이 있다. “어릴 때부터 염색, 매직 등을 많이 했어요. 머릿결 관리를 위해 이것저것 알아보다 흥미를 느꼈죠. 숙소에서 친구들 염색도 제가 다 해줘요. 이제는 애들이 저한테 먼저 해달라고 부탁하죠”라며 자랑스레 얘기했다.
걱정 말아요, 그대
최근 대학 선수들의 프로 진출이 빨라지고 있다. 4년을 다 채우지 않고 1~2년 일찍 드래프트에 참여해 프로팀에 입단하는 ‘얼리 드래프트’가 활발해졌다. 김인혁은 “주위에서 얼리 드래프트로 나가보는 게 어떻겠냐고 많이 물어보시더라고요. 요즘은 저도 ‘빨리 가는 게 맞는 건가?’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라고 밝혔다. 김형태 감독도 긍정적인 입장이다. 그러나 김인혁은 아직 불안하다. “경남과기대가 지방에 있는 학교이고, 성적도 좋은 편이 아니잖아요. 김인혁이라는 이름값도 딱히 없는 것 같고…프로선수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라며 고민을 토로했다.
화제를 바꿔 다시 태어나도 배구 선수를 하고 싶으냐는 질문을 던졌다. “고민되네요. 그만큼 힘들었으니까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나 마음 한 켠에는 배구에 대한 사랑이 컸다. “그래도 이번 생에는 배구를 택했으니 가슴에 태극기를 달고 싶어요”라며 시니어 대표팀에 대한 의지를 드러냈다.
선수생활을 하며 부모님에게 한 번도 칭찬을 들어본 적 없다는 김인혁. 경기가 끝나면 보완할 점을 지적받는 게 먼저였다. 늘 ‘수고했다’ 한마디가 전부였다. 하지만 김인혁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그 한마디에 담긴 깊고 깊은 사랑을. 덕분에 그는 멋지게 성장했다. 앞으로 김인혁에게 펼쳐질 미래도 ‘언제나 맑음’일 것이다.
걸쭉한 경남사투리가 매력적인 김인혁. 말투 그대로 전하고 싶었으나 문자로는 특유의 ‘맛’이 살지 않아 포기했다. 천생 경상도 사나이인 그가 보여줄 상남자다운(?) 플레이를 기대해도 좋다.
글/ 최원영 기자
사진/ 신승규 기자
※ 이 기사는 더스파이크 6월호에 게재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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