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구 중계 26년, 배구의 목소리 허주
호소력 짙은 목소리, 해박한 배구지식을 바탕으로 핵심을 꿰뚫어보는 안목, 줄줄이 외고 있는 감독, 코치, 선수들의 계보, 오랜 기간 꾸준한 관심과 수집을 통해 얻은 외국 선수들에 대한 각종 정보에 이르기까지 어느 곳에나 막힘이 없었다. 1985년 늦깎이 배구 캐스터로 데뷔해 26년 동안 외길로 배구 팬들의 곁을 지킨 허주 전 KBS 스포츠 캐스터(67). 정년으로 현장을 떠난 지 벌써 5년. 그래도 그의 배구 사랑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스포츠를 지독히도 좋아하던 소년
허주는 자신을 ‘스포츠 마니아’라고 스스럼없이 말한다. 아침에 일어나 가장 먼저 신문을 아버지께 가져다 드리고 난 뒤에는 개를 데리고 동네에 운동을 나갔다. 돌아와서는 신문 4컷 만화를 보고 스포츠 면을 샅샅이 훑었다. 선수들 이름은 물론이고 그들 신상까지 훤히 꿰뚫어야 직성이 풀렸다. 둘째 형이 유도, 셋째 형이 태권도를 해 평소에 운동을 가깝게 한 까닭이기도 했지만 그냥 운동이 좋았다. 어느 특정 종목이 아니라 모든 종목을 좋아했다. 신문 지상을 오르내리는 선수들이 부러웠고 선망의 대상이었다.
대전중학교 1학년 말 9인제 배구를 처음 시작한 것도 특별한 연유가 있었다기보다 그냥 운동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당시는 ‘극동식’이라는 이름으로 9인제 배구를 하고 있었고 6인제는 갓 도입돼 제대로 보급이 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처음으로 만난 코치는 심재만씨로 전 상무 감독과 청소년국가대표 감독을 역임한 심재호 감독 친형이었다. 하지만 배구선수 생활은 2학년 말 서울로 전학을 하면서 1년 만에 끝나고 말았다. 짧은 배구 선수 생활이지만 그가 스포츠 캐스터로, 무엇보다 배구 전문 캐스터로 명성을 떨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어릴 때부터 운동을 좋아하고 짧은 기간이었지만 선수를 한 덕분이었는지 모른다. 그가 아나운서(당시에는 캐스터를 아나운서라고 불렀다)를 지망한 동기도 주변 환경 덕이 컸다.
“대학을 졸업하고 무역회사에 다닐 때인 1976년 11월이었습니다. 스위스에서 온 바이어를 호텔 커피숍에서 기다리는데 중앙일보에 TBC(동양방송)에서 남자 아나운서를 모집한다는 사고(社告)가 우연히 눈에 띄더군요. 그런데 1949년 3월 1일 이후 출생자로 나이 제한이 있더라고요. 내가 1949년 3월 4일에 태어났으니 불과 사흘밖에 차이가 없었습니다. 얼핏 ‘아! 내년이면 나는 응시 자격도 없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곧바로 원서를 냈습니다.” 허주는 스스로 ‘운명이 나를 아나운서로, 그리고 스포츠 캐스터로 이끌었다’고 말하지만 아나운서는 결코 낯선 직업이 아니었다.
큰 매형(송석두)이 KBS-MBC에서, 둘째 형(허찬)이 속초 KBS에서 아나운서로 활동하고 있었고 허주 자신도 학창시절 ‘학교 아나운서’로 일찌감치 두각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방송을 좋아해 KBS 라디오의 ‘뻗어가는 전파, 명승지를 찾아서’라는 프로그램을 즐겨 들었다. 대전 대흥초등학교 5학년 때 교내방송을 통해 점심시간 20분 동안 교내소식과 어린이소설을 읽어주는 학교 아나운서로 인기를 끌었다. 경희대에서도 1~3학년까지 방송반 아나운서로, 그리고 입대를 해서는 카투사로 용산에 근무하면서 AFKN에서 뉴스와 스포츠 필름을 편집하는 에디터로 활동하는 등 방송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깊은 인연이 있었다.
이처럼 피 속에는 ‘아나운서 DNA’가 잠재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신문에서 아나운서 모집 안내를 보는 순간 모든 것을 팽개치고 원서를 냈고 단 두 명만 뽑는 아나운서 시험에도 무난히 합격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이를 증명한다. ‘스포츠 마니아 소년’, ‘짧은 1년 동안의 배구선수’, ‘최고 배구 전문 캐스터’. 어쩌면 운명이 인도해 주고 배려해 준 큰 선물이나 다름없었다.
[박미희 해설위원(현 흥국생명 감독)과 중계를 진행하고 있는 허주 캐스터]
9년 만의 늦깎이 데뷔전에서 히트
어릴 적 스포츠 중계를 들으며 ‘언젠가 나도 이광재, 임택근과 같은 명아나운서가 되고 싶다’는 막연한 꿈을 꾸곤 했던 허주의 꿈은 금방이라도 이루어질 것 같았다. TBC에 입사하면서 ‘꽤 괜찮은, 장래가 유망한 아나운서가 들어왔다’는 기대를 한 몸에 받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중계방송 배정을 받아야 하는데 신입 아나운서인 허주에게 스포츠 중계는 언감생심이었다. “당시 원종관 선배가 축구, 이재명 선배가 농구와 야구, 박병학 선배가 복싱 등을 주로 맡아 중계방송을 했는데 내게는 배정을 해 주지 않는 겁니다. 어느 종목을 배정해 주면 그 종목을 맡은 선배들이 싫어하니까 배정을 받기 쉽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1980년 언론 통폐합으로 TBC가 KBS로 합쳐지면서 아나운서 숫자가 더 많아지는 바람에 더욱 배정을 받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는 실망하지 않았다. 틈이 나면 장충체육관을 찾았다. 혼자 경기를 보면서 중계연습도 하고 나름대로 팀 장점과 단점을 깨알같이 메모했다. 선배 캐스터들의 중계방송 모니터링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중계 도중에 자연스럽게 튀어 나오는 일본식 용어나 생경한 영어단어를 들을 때면 어떻게 하면 쉽게 팬들에게 알릴 수 있을까를 고민하기도 했다. 아나운서라는 직책이 주는 특권(?)을 십분 활용해 선수, 감독들과 자주 만나 폭넓은 대화도 나누었다. 그들과의 만남은 스포츠에 대한 전문 지식을 넓혀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갖고 있는 스포츠에 대한 기본 인식을 이해하고 그들만의 독특한 인맥과 계보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마이크만 잡으면 그 어느 선배보다 더 잘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지만 여전히 기회는 쉽사리 오지 않았다.
기다리다 지친 그는 결국 아나운서를 포기할 마음까지 먹고 김재길 PD를 찾아갔다. 머리를 짧게 깎고 다니는 탓에 ‘까까 PD’로 불린 김 PD는 명 배구해설가로 명성을 떨친 오관영과 야구해설가 하일성을 방송에 데뷔시킨 우리나라 최초 스포츠 전문 PD. 수시로 체육관에 나와 취재를 열심히 하는 허주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봤던 김 PD로서는 이를 마다할 리 없었다. 물론 ‘아나운서실 허락’이 전제조건이었지만. 하지만 아나운서실에서 그의 잠재능력을 익히 알고 있는 터에 쉽게 놓아줄 리 없었다. 결국 아나운서에서 기자로 변신하고자 한 그의 차선책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마음고생을 하고 있던 1985년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다. 배구 중계를 도맡아 했던 류수호 아나운서가 영월로 출장을 간 사이 장충체육관에서 벌어진 슈퍼리그 상무-현대전 라디오 중계 특명이 떨어진 것. “처음으로 맡은 중계방송이라 다른 사람들은 걱정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정말 자신 있게 진행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중계방송을 끝내고 들어오니 아나운서실에 조그마한 소동이 났더군요. 스포츠 중계방송 배정을 하는 원종관 선배가 ‘왜 저렇게 잘하는 아나운서를 지금까지 데뷔시키지 않았느냐고 주변에서 많은 핀잔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단 한차례 예선전 중계로 실력을 인정받은 그는 내친 김에 결승전까지 빠짐없이 중계석을 지켰다. 최평웅, 임건재, 류수호 캐스터 뒤를 이어 ‘허주’라는 이름의 배구 전문 캐스터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자신에게 기회가 오지 않았다고 실망하지 않고 꾸준하게 경기장을 찾아 연구하고 공부를 하면서 기회를 기다린 그는 이때부터 스포츠 중계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캐스터를 그만 둘 때까지 그는 배구를 비롯해 씨름, 탁구, 체조 등 모두 28개 종목에서 TV와 라디오 중계를 통해 팬들과 만났다.
[KBS 후배 아나운서들과 함께. 왼쪽부터 신영일, 허주, 이재홍 아나운서]
공부하는 캐스터, 배구 용어 한글화에 앞장
“한 게임을 중계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자료가 필요합니다. 특히나 육상, 유도 등 개인종목은 상대 선수의 특징뿐만 아니라 상호 전적, 각종 국제대회 기록 등 자료들이 두께 50㎝ 이상입니다. 단체경기는 선수들의 특징과 팀 컬러, 상대팀과의 전적, 앞선 경기에서의 활약상 등 그야말로 모든 게임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지 않으면 제대로 된 방송을 할 수가 없습니다.” 배구인들 사이에 허주는 공부하는 캐스터로 유명하다. 언제 어디서 중계가 배정되더라도 최상의 방송을 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과 시간을 투자한다.
중계방송에 들어가기 전에는 선수, 감독들과의 인터뷰는 필수적이고 훈련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름대로 선수들 컨디션을 체크하기도 한다. 우리나라가 참가하지 않는 국제대회라도 그는 꼭 프로그램을 구하곤 했다. 국제회의에 참가하는 임원을 통해 구하기도 하고 이마저 여의치 않으면 직접 국제연맹에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직접 경기는 보지 않더라도 프로그램을 통해 각 나라 대표선수들이 어떻게 변화되고 어떤 새로운 선수들이 등장하는지를 읽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 어떤 배구 전문가들보다 더 많은 해외 선수들에 대한 정보로 국제 배구의 흐름을 가장 잘 이해하는 전문가 이상의 안목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일본식 용어와 영어가 혼재되어 있는 배구 용어를 한국어로 바꾸는 작업에 앞장섰다. 처음에는 어색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차라리 원어를 쓰지 않을 바에는 일본식 용어보다 한국어가 낫다는 판단에서다. 대표적으로 직접강타(다이렉트 킬), 캐치볼(홀딩, 드리블), 옆 금(사이드라인), 뒷 금(엔드라인), 후위공격(백어택), 곧추 뛰기, 개구리점프(서전트점프) 등 요즘 쉽게 방송이나 신문에서 쉽게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는 용어들이 대부분 그가 노력한 산물들이다. 상상력을 발휘해 블로커가 따라 붙어 정면대결이 불가피할 때를 ‘골목길 전투’라고 부르거나 사이드쪽에서 빈 공간이 나타날 때 ‘쪽문이 열렸다’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는 이에 그치지 않고 각종 배구 기술 원조 찾기에도 정성을 쏟았다. 대표적인 신기술이 개인시간차 공격과 후위공격. 두 가지 모두 1972년 뮌헨올림픽에서 맹위를 떨쳤는데 개인시간차 공격은 1971년 농구에서 힌트를 얻은 일본의 모리다(森田)가 세터 네코다(猫田)와 처음 시도했다고. 아마도 1972년 뮌헨올림픽에서 개인 시간차 공격이라는 신기술이 없었다면 일본이 금메달을 따지 못했다고 확신하기도 했다. 또 후위공격이라 부르는 백어택은 폴란드의 보이드 비치와 불가리아의 슬라니노프가 처음으로 시도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뮌헨올림픽에 참가하고 돌아 온 전문경 세터와 이인 선수가 개인시간차 공격을, 세터 신치용과 강만수가 후위 공격을 첫 선을 보였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이세호 해설위원과 함께 중계석에서 준비하는 모습]
정과 동이 어우러진 배구는 현장에서 제 맛을 느껴야
허주 캐스터의 배구에 얽힌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첫 해외 TV 중계를 한 1986년 도쿄에서 벌어진 일본컵국제대회를 비롯해 올림픽, 아시안게임 등 우리나라의 각종 중요한 대회마다 그의 목소리는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다. 때로는 자신도 모르게 흥분해 책상을 치고 목소리를 높였는가 하면 때로는 아쉬움에 한동안 할 말을 잊은 채 망연자실한 순간도 있었다. 무엇보다 그의 첫 해외 TV 중계인 일본컵에서 일본에 3-2로 승리하자 세터 김호철이 바닥에 드러누워 감격을 만끽하던 모습과 미국과 대등한 경기를 벌이다 이종경이 다리부상으로 빠지면서 순식간에 무너져 버린 순간은 희비가 교차돼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예선전 남자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된 송만덕 감독이 일본과 1차 라운드에서 부끄러울 정도로 참패를 당해 감독 교체까지 거론되는 어려운 상황을 맞았지만 2차 라운드에서 3-1로 깨끗이 설욕하며 승리해 4회 연속 올림픽 출전을 확정 지었을 때를 돌이켜보면 아직도 가슴이 뭉클해진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 세계랭킹 1, 2위인 유고, 러시아와 같은 조로 죽음의 조에 편성된 우리나라가 러시아전에서 마지막 5세트 이경수의 스카이서브가 20㎝로 아슬아슬하게 벗어나 역전패한 안타까운 순간도 있었지만 여자배구가 박수정의 이동공격으로 이탈리아에 3-2로 극적인 역전승을 거둔 감격적인 순간을 현장에서 지켜보았습니다. 모두 바로 엊그제 일 인양 기억이 새롭고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기억들이 없습니다.”
2007년 KBS에서 정년퇴직을 한 뒤 프리랜서로 KBS N으로 자리를 옮겨 2011년 3월 24일 프로배구 여자부 플레이오프전 도로공사와 흥국생명의 4차전 경기를 고별방송으로 방송계를 떠난 그는 어느새 배구 레전드 반열에 올라섰다. “정(靜)과 동(動)이 한 데 어우러져 있는 단순함 속에 미묘한 변화가 있는 스포츠, 이게 바로 배구이고 매력입니다. 언제부턴가 배구가 시청률이 1%로 0.3%밖에 되지 않는 농구보다 3배 이상 앞서 있지만 실제로 경기장에 가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배구는 선수들의 강력한 스파이크로 대리만족도 하고 스트레스도 풀 수 있어 농구와는 다른 재미를 느끼게 해 줍니다. 현장에 가야 제 맛을 느낄 수 있는 스포츠가 바로 배구입니다.”
캐스터나 지도자는 껍질 벗어나는 노력해야
허주는 선배 캐스터로서 후배들과 배구 지도자들에게 껍데기를 벗어나려는 노력이 없이는 석고처럼 굳어버려 언젠가는 박제밖에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따끔하게 충고한다. 껍데기를 벗어나려는 노력은 자기 계발이자 노력이다. 캐스터는 캐스터로서, 지도자는 지도자로서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더 열심히 공부하고 고민하며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지금 후배 캐스터들은 지적을 해 주면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지상파 스포츠 방송 중계 시간이 엄청나게 줄어드는 바람에 제대로 훈련을 할 수 있는 시간조차 부족합니다. 그럼에도 시청자들은 좋은 품질의 방송을 요구합니다. 이미 스포츠 중계에 관해서는 지상파 방송이 스포츠 전문 케이블 캐스터와 견주기조차 어려울 정도입니다. 배구지도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치용, 김철용, 최태웅 감독 등과 이야기를 해보면 막힘이 없습니다. 나름대로 주관도 뚜렷하고 출중함이 그대로 느껴집니다. 그렇기에 좋은 성적을 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리우올림픽에 출전하는 여자대표팀을 향해 수비 조직력을 더 가다듬어야 한다는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선수들이 전체적으로 노련해졌다고 평가한 그는 김연경을 주축으로 한 공격력은 세계 어디에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정상급으로 올라선 만큼 수비력만 더 갖춘다면 일본, 미국에 역전패를 해 아깝게 4위에 머문 2012년 런던올림픽 성적을 뛰어 넘을 수 있다는 장밋빛 전망도 내 놓았다. 그는 지금까지 함께 한 해설가들에 대한 촌평도 잊지 않았다. “어느 방송 프로그램에서 해설가들을 색깔로 표현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를 그대로 소개하면 편안한 느낌을 주는 김세진 위원은 녹색이 어울릴 것 같고 논리적이며 이지적인 김상우 위원은 파란색, 그리고 노력파이자 열정적 해설이 돋보이는 박미희 위원은 빨간색이 될 것 같습니다. 1970~90년대 독보적인 배구 해설의 경지를 구축했던 오관영 위원은 평가하기가 어렵지만 임기응변과 화술이 뛰어나 어떤 상황에서도 노련하게 진행을 하시는 분이셨다고 기억됩니다.”
끝으로 26년 동안 배구 전문 캐스터 생활이 가장 행복하고 즐거운 시절이었다고 회고한 그는 “아직도 많은 초등학교에서는 전문적인 배구지도자가 아닌 체육교사가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다”면서 우리나라 배구 발전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지도자 양성과 저변을 넓히는 노력이 함께 이루어 져야 한다고 고언도 아끼지 않았다.
글/ 정태화 한국체육언론인회 사무총장
사진/ 신승규 기자, 본인 제공
(본 기사는 더스파이크 7월호에 게재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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