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후줄근하게 목이 늘어난 티셔츠를 입고 우렁차게 인사하며 들어오는 이 남자. 영락없는 동네 아저씨, 아니 동네 오빠다. 코트 안에서는 매서운 공격력을, 밖에서는 호탕한 웃음을 보여주는 반전 있는 남자. 대한민국 대표 라이트 공격수로 이름을 떨친 서재덕을 만났다.
월드리그가 낳은 깜짝 스타? 월드리그 만든 최고의 스타!
지난 6/17~7/3일 열린 2016 월드리그 국제남자배구대회에서 한국은 기적적으로 2그룹 잔류라는 목표를 달성했다. 주역은 두말할 것 없이 라이트 공격수 서재덕이었다.
문성민 부상으로 일본 전부터 선발 출전한 그는 매 경기 공격 선봉에 서며 종횡무진 활약했다. 9경기 동안 총 140득점(공격 121, 블로킹 6, 서브에이스 13)으로 팀 내 최다 득점을 올렸다.
서재덕은 7월 3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마지막 네덜란드 전을 마치고 이튿날인 4일 소속 팀 한국전력으로 복귀했다. “신영철 감독께서 휴식을 충분히 주셔서 집에서 쉬거나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며 몸 관리 했어요. 사실 애 보느라 바빴죠. 2주만에 봤는데 애가 더 커졌어요”라며 근황을 전했다.
대회 내내 보여준 활약상에 주위 반응도 뜨거웠을 터. 서재덕은 “그렇게 큰 반응은 없었어요. 다들 네가 언제부터 그렇게 잘했냐고 하더라고요. 장모님이 특히 좋아하셔서 저도 기뻤어요”라며 미소 지었다.
자신이 이렇게 활약할 줄은 몰랐다며 넉살스럽게 웃어 보인 그는 공을 동료들에게 돌렸다. “세터 (한)선수 형 볼 연결이 워낙 빨라 거의 원 블로킹을 만들어줘요. 저는 블로킹 3명만 아니면 어느 정도 득점을 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거든요. 빠른 플레이가 잘 맞아서 공격하기 편했어요.”
서재덕이 뽑은 숨은 MVP는 센터 최민호(현대캐피탈)다. “선수 형은 워낙 잘하니까 딱히 안 뽑아도 될 거 같고요. 레프트 (정)지석이(대한항공)도 잘했지만 저는 민호 형을 꼽고 싶어요. 가운데서 중심을 잘 잡아줬고, 제가 힘들 때 정말 도움이 됐어요. ‘항상 고생한다. 네가 최고다’라는 식으로 조언하면서 제가 마음을 편히 가질 수 있도록 해줬어요. 경기 중에도 중요할 때 민호 형 속공이나 블로킹 득점으로 분위기를 가져온 적이 많았잖아요. 여러모로 제일 고맙죠”라며 애정을 듬뿍 담아 답했다.
2그룹 잔류에는 성공했지만, 여전히 나아갈 길이 먼 한국 남자배구. 국제무대에서 경쟁력을 갖기 위한 방안에는 무엇이 있을까. 서재덕 의견이 궁금했다. 그는 “제가 감히 의견을 내도 되는 건가요(웃음). 배구라는 종목 자체가 신체 조건에서 차이가 확연히 나요. 신체적인 열세 등을 극복하려면 경기력을 높일 수 있도록 더 좋은 환경이 조성되거나 선수들이 정신력으로 이겨내려고 해야겠죠”라며 조심스레 생각을 밝혔다.
서재덕은 무엇보다 ‘선수 육성’을 강조했다. “가장 중요한 건 유망한 인재들을 발굴하고 육성하는 거예요. 후배들에게 지원이 많아졌으면 해요. 그래야 더 밝은 미래가 오겠죠.”
아마추어 유망주 중 제2의 서재덕을 골라달라고 하자 얼굴이 빨개진 그는 “죄송해요. 저도 요즘 살기 바빠서 아마추어 경기를 잘 못 봤어요. 키 크고 잘하는 애들이 몇 명 있다고 하더라고요. 한번 눈 여겨 보고 싶어요. 찾아보겠습니다 저도. 모두 좋은 선수로 컸으면 좋겠어요”라며 호탕한 웃음과 함께 솔직한 답변을 들려줬다.
이제는 현실, 한국전력 레프트 서재덕
성균관대 재학 시절 라이트로서 명성이 자자했던 서재덕은 대표팀에서는 라이트로, 소속팀에서는 레프트로 뛰며 공수에서 실력을 과시했다. 프로 진출 후 포지션이 바뀐 게 오히려 도움이 됐다는 그.
“레프트로 뛰며 배구에 대한 새로운 면을 발견했어요. 하마터면 배구가 질릴 뻔 했는데 재미를 느꼈죠. 농담이고요(웃음). 더 배울 수 있다는 게 좋았어요”라며 입을 열었다.
“대학 때까지 공격하느라 몰랐는데 그 동안 애들이 뒤에서 리시브 해주고 수비 받아준 게 엄청 컸다는 걸 깨달았어요. 정말 힘들었겠구나. 제 수비력이 좋은 편이 아니었는데 한국전력 와서 훈련하면서 크게 배웠어요. 그런 면에서 무척 감사하죠. 프로 리그에는 라이트 포지션에 외국인 선수가 대부분이라 제가 경기를 뛸 수 있을지 걱정했거든요. 운이 좋았죠. 감독께서 기회를 많이 주셨어요.”
일각에서는 국내 리그에서 서재덕이 마음껏 공격력을 뽐내지 못 하는 게 아쉽다는 반응도 나왔다. 이에 서재덕은 “매년 듣는 얘기죠. 사실 국내에서 라이트로 뛰라고 하면 자신 없어요. 이 키(194cm)에 36경기를 라이트로 버틴다는 건 제가 봐도 가망성이 없거든요. 체력도 안 될 거 같고요. 어렸을 때 수비 쪽으로 기본기를 잘 다져놓아 레프트로서 기회를 받았고, 아직도 코트에 서있을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라며 솔직한 마음을 전했다.
이어 그는 레프트 포지션에서 주 공격을 맡고 있는 전광인이나 라이트 포지션을 담당하는 외국인 선수보다 공격력이 좋은 것은 아니라고 스스로 평했다. 또 “라이트 포지션은 어릴 때부터 연습을 많이 해서 한 달 정도 훈련하면 감이 다시 잡혀요. 하지만 딱 거기까지예요. 그 이상으로 잘하라고 했으면 못 했을 거 같아요”라며 말을 더했다.
지난 2015~2016시즌 팀 주장 완장을 찬 서재덕은 세터 강민웅에게 자리를 넘겼다. 평소 장난기는 많지만 마음이 여려 후배들에게 쓴소리를 못 한다는 그는 “제가 그런 쪽으로는 또 약해요. 나이 들면 변하겠죠. 아직은 주장이라는 자리가 저에게 안 어울리는 듯해요. 중간에서 다리 역할을 하는 게 딱 좋아요”라고 한다.
프로 데뷔 첫 경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는 그는 당시 경기 내용과 스코어까지 잊지 않고 있다. 2011~2012시즌 KEPCO(현 한국전력)의 정규리그 첫 상대는 대한항공이었다. 2011년 10월 23일 인천 도원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시즌 첫 경기에서 서재덕은 데뷔전을 가졌다. 결과는 세트스코어 2-3(21-25, 25-21, 25-21, 21-25, 15-17) 패배.
이날 서재덕은 서브에이스 2개, 블로킹 5개를 묶어 총 15득점(성공률 40%)을 올렸다. 라이트 안젤코(36득점)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득점이었다. “결과적으로 지긴 했어도 저에겐 굉장히 의미 있는 경기였어요. 제 인생에서 가장 즐거웠던 경기이기도 하고요. 아직도 자세히 기억나요. 5세트 듀스에서 대한항공 마틴 서브에이스로 경기가 끝났어요. 근데 그 서브를 제가 못 받았어요.” 서재덕은 멋쩍은 듯 웃음을 터트렸다.
밝은 미래 만들 긍정의 힘
언제 어디서나 아이 같은 천진난만한 미소로 활력소 역할을 하는 서재덕. 인터뷰 내내 호쾌한 웃음으로 분위기를 이끌었다. 주위 동료들은 그를 ‘초 긍정남’이라 부른다.
서재덕은 “선천적으로 조용한 걸 싫어해요. 가만히 있질 않고 떠드는 걸 좋아하니까 자연스럽게 긍정적인 사람이 됐나 봐요”라며 여유를 보였다. 코트 위에서는 서재덕의 밝은 에너지가 큰 힘이 된다. “경기 중에 뒤에서 지켜보면 한 번씩 선수들이 가라앉을 때가 있어요. 그럴 때 분위기만 올려주면 다시 경기를 잘 풀어갈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파이팅을 막 외치죠. 제 장기를 살린 거예요.”
27세 청년이 된 서재덕은 초등학교 4학년, 11살에 배구를 시작해 어느덧 16년째 한 길을 걷고 있다. “처음 프로 팀 입단했을 때부터 항상 지금 이 자리를 꿈꿔왔어요”라며 목표를 달성했다고 한다.
“하루하루가 즐거워요. 여기서 내려가지 않기 위해 더 연습하고 부족한 점을 채워야죠. 늘 배운다는 자세로 임하면 은퇴할 때까지 좋은 모습 보여드릴 수 있지 않을까요? 언젠간 내려가야겠지만 최대한 멋지게 마무리하고 싶어요.”
2016~2017시즌 V-리그 개막이 10월 15일로 확정됐다. 서재덕에게 각오를 물었다. “외국인 선수 트라이아웃 제도가 도입됐잖아요. 국내 선수들 역할이 더 중요해졌어요. 저희도 비시즌 동안 열심히 노력하고 있어요. 잘 될 거라고 믿고 있고요. 이번 시즌 꼭 좋은 성적 내서 봄 배구 해야죠. 더 높은 위치까지 올라가고 싶어요. 자신감은 항상 있어요”라며 당당히 말했다.
배구선수 서재덕의 최종 목표는 무엇일까? “저는 지금 충분히 행복해요. 모든 선수들이 다 바라는 거지만 프로 선수이자 대표팀 선수로 오래오래 뛰고 싶어요. 올해 태어난 제 딸이 나중에 커서 아빠가 배구선수라는 걸 알 수 있는 나이까지요. 딸한테 부끄럽지 않은 아빠로 남고 싶어요”라며 소박하면서도 큰 꿈을 밝혔다.
서재덕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자유분방’이라는 단어가 절로 떠오른다. 코트 안팎을 마음껏 휘젓고 다니는 서재덕. 웬만해선 그를 막을 수 없다.
글/ 최원영 기자
사진/ 신승규 기자, 서형권 인터넷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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