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김건태 심판의 격정토로 “장기 계획과 투자 없다면 한국배구 추락"

정고은 / 기사승인 : 2016-08-17 21: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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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기간 국제배구연맹(FIVB) 심판을 역임하며 심판으로서 최고봉에 올랐던 김 심판(63)은 한국배구의 실질적 국제통으로 자타가 인정한다. 그런 그가 최근 대만 가오슝에서 열린 아시아청소년 배구선수권대회에 심판위원장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다. 그에게 국제무대에서 한국배구가 나아갈 길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봤다.


김심판은 현역 심판이 아니다. 지난 2013년 27년 심판생활을 명예롭게 은퇴한 것. 더 이상 휘슬을 부는 일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 심판이면 영원한 심판’이라고 늘 이야기 해왔듯이 심판업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주머니 속 송곳’ 같이 심판업무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여준 그를 재야에 묵히도록 내버려 두질 않았다.


대한민국체육회는 그를 최근 심판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선임했다. 임기 4년으로 57개 종목 심판을 대상으로 교육을 실시한다. 또 체육회가 선발한 상임심판 78명을 집중 관리하며, 클린심판 아카데미를 지금까지 21회 개최해 연인원 1천800여 명에 대해 교육을 마쳤다. 클린심판 아카데미는 계속 운영된다. 또 프로야구 등 타 종목에서도 강의를 요청하고 있다.


그는 “종목 별로 규칙만 다를 뿐, 심판 운영에 대한 큰 원칙은 동일합니다”라며 “전반적으로 심판운영이 체계적이지 못하고 개선할 점이 많습니다. 특히 특정 종목을 제외하고는 심판 처우가 매우 열악합니다”라고 말한다. 심판은 독립적으로 운영되어야만이 외부 유혹에 흔들림 없이 정확한 판정과 원활한 경기진행이 가능하다고 덧붙인다.


또 아시아배구연맹은 2012년부터 심판위원으로 활동해온 그를 지난 1월 다시 임기 4년의 심판위원으로 재선임했다. 그리고 이번 제18회 아시아 청소년남자 선수권대회(대만 가오슝, 7월 9~17일)에서 심판위원장이란 중책을 맡겼다. 이에 따라 그는 지난 6일 출국해 18일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오는 8월말 필리핀에서 열리는 아시아 여자클럽 선수권대회에 심판위원으로 출국하는 등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국제대회에서 심판위원장은 어떤 일을 하게 됩니까?
국내 대회와 같습니다. 경기 별로 심판을 배정하고 교육시키고, 매 경기를 마칠 때마다 미팅을 갖고 평가하며, 아시아연맹에 제출할 보고서를 작성해야 합니다. 하루 최대 8경기까지 열리면 정신이 없습니다. 하루하루가 강행군 입니다. 아침 7시에 체육관에 나가고 경기를 마치고 숙소에 들어와 보고서 작성을 마치면 새벽 2~3시가 됩니다.


위원장은 조금 편한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국제경기에 처음 나서는 심판에 대해 하나하나 교육시켜야 하고 평가해야 합니다. 심판에게 말로만 지적하면 대부분 오리발을 내밉니다. 해서 아이패드로 계속 촬영하여 결정적 실책을 잡아내 지적해야 수긍하곤 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대회기간 중에 심판들 움직임을 촬영한 동영상을 보여주었다. 평소 치밀한 그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했다. 동영상도 결정적 순간만을 뽑아 편집하느라 여간 고생한 것이 아니란다. 나이가 들어도 첨단 기기를 잘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며 웃는다.


이상렬 감독이 이끄는 우리 청소년 대표팀 활약상이 궁금했다. 그러나 그는 심판위원장으로서 모국팀에 큰 관심을 가질 수 없었다고 실토했다. 그래도 한국팀은 심적으로 큰 버팀목이 있다는 안도감을 가졌을 것이다.


한국이 3위를 차지 했는데…
중국이 우승, 이란이 준우승했으며 한국은 일본을 잡고 3위를 차지했습니다. 개인적으로 한국은 당초 목표를 초과 달성했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말인지?
사실 투자와 지원도 없이 그 정도 성적이면 잘한 겁니다. 어린 선수를 집중 육성하고 과감한 투자를 하는 아시아권 다른 나라를 이겼으니 잘했다고 할 수밖에요.


약간은 시니컬하게 들렸지만, 이내 무슨 뜻인지 알아차렸다. 일본 태국 등은 체계적인 지원으로 배구를 육성하고 있는데 견줘, 우리나라는 오로지 개인 역량에만 기대하고 있는 현실이 씁쓸했다. 우리 풍토에서는 일본에게는 당연히 이겨야 하고, 결승전에라도 못 오르면 마치 죄인 취급하기 마련이다.


그래도 눈에 띄는 선수라든가, 희망적인 것은 없던가요?
제천산업고 임동혁 선수가 특출해 보였습니다. 잘 다듬고 훈련시키면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란 중국에는 그 정도 수준의 선수가 다수 포진해 있습니다.


현장에서 특히, 국외에서 느끼는 한국 배구의 미래는 냉정한 평가를 받았다. 한국 청소년팀은 내년에 열리는 세계선수권대회 출전권을 획득하지 못했다. 중국과 이란이 아시아대표로 참가하게 되며, 한국은 와일드카드로 출전여부를 가리게 된다.


화제를 바꾸고 싶었다. 지난 7월 3일 마친 2016 월드리그 남자대회 이야기를 꺼냈다. 한국은 충격적인 6연패로 2그룹 탈락위기에 몰렸지만, 장충체육관에서 쾌조를 보이며 3연승을 거둬 2그룹 잔류에 성공했다.


이번 월드리그에서는 2그룹 잔류여부가 관심을 모았습니다.
네. 일단 우리나라가 마지막 3경기에 극적으로 승리를 거두면서 3그룹 탈락위기에서 벗어난 것은 다행스런 일입니다. 우리 선수들이 거둔 성적은 높이 평가해도 좋습니다.


대신 일본이 탈락했습니다.


충격적입니다. 3그룹으로 탈락한 팀이 2그룹으로 다시 승격하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가 당할 뻔한 충격을 일본이 대신 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냉정히 봐야 합니다. 일본이 배구에서 기획력이 떨어집니까? 재정적으로 문제가 있습니까? 그렇다고 인기가 없습니까? 모든 면에서 우리나라에 앞서고 있습니다. 그런 일본도 나가 떨어지는데…그럼 다음 차례는 어디일까요?



속으로 다음 차례는 우리나라구나 생각했지만 차마 맞장구를 칠 수 없었다. “라이벌이 있어야 서로 발전하는 겁니다. 일본과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고 있는 우리나라는 마냥 좋아할 수만 없습니다.” 달리 반박할 논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순망치한(脣亡齒寒)만 떠올랐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


“배구는 종목 특성상 동양인 체격으로는 이미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아시아 연맹권에 속하는 호주와 이란은 서구적 체격으로 아시아권 맹주로 등극했습니다. 여기에 뒤처지지 않으려면 특단의 조치가 필요합니다. 10년 장기계획도 필요합니다만, 우선 5년 중기계획이라도 서둘러 세워야 합니다. 남자배구는 2000년 이후 올림픽 무대에 진출하지 못했습니다.


여자배구도 포스트 김연경에 대한 대책이 없습니다. 당장 2020년 도쿄올림픽에 남녀팀이 진출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계속되는 격정적 토로에 외려 기자가 고개를 들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렵겠지만, 배구를 국내 최고 인기종목으로 키워야 합니다. 젊은이가 배구를 선호하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야구 축구 농구 등은 스스로 택해서 운동을 합니다. 배구는 지도자가 권유해도 부모가, 또 당사자가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명예도 부(富)도 뒤따르지 않는 현실입니다.


그래도 프로배구는 나름 인기가….
알량한 현재 인기에 안주해서는 안됩니다. 하루빨리 프로배구가 전국화 되어야 합니다. 현재 프로팀 지역연고가 적어도 광역지방자치단체 단위로 확산되어야 합니다. 지금은 수도권리그에 불과합니다. 전통적 배구 활성화지역인 호남과 부산, 대구권과 강원 지역이 소외되어 있습니다. 장신 재목감을 버려두고 있습니다. 이 지역 유망주들이 배구를 보지도 듣지도 못해 관심이 없습니다.


방법이 뭘까요?
현재 프로구단 연고지를 각 지역 별로 분산해야 합니다. 물론 운영 기업측에서는 어려움이 따르겠지만, 연맹 커미셔너는 구단주들과 협의를 거쳐 연고지 재조정을 반드시 실행해야 합니다. 이와 함께 연고지 내 학생선수 육성에 대한 전권을 부여해 자체 선수육성 프로그램을 마련해야 합니다. 초창기 프로야구가 연고지 내 학생선수에 대한 우선지명권을 시행한 것을 잘 연구해야 할 것입니다.


최근 배구명문교인 대전중앙고가 배구단을 해체했다. 그리고 서울지역 내 배구단을 운영하는 학교는 한 손에 꼽을 정도이며, 그나마도 해체가 경각에 달린 곳도 여럿 있다. “그 동안 프로배구 운영체는 유소년 배구발전을 위해 적지 않은 돈을 투자했지만, 그 효과는 정말 미약하다. 배구단을 운영하는 일선 학교팀에 실질적 도움이 되어야 한다”라고 강조한다.


사실 야구팀을 창단한 학교는 1~2년 동안은 별다른 걱정 없이 팀을 운영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배구는 유니폼 몇 벌 지원하는 데 그쳐 당장 내일이 걱정되는 수준이다.


“각 구단이 저변 확대를 위한 투자도 중요하지만, 운영체인 연맹과 협회에 배구를 잘 알고 이해하는 전문가와 엘리트가 모여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게 현실입니다. 그리고 심판 육성에 대해서는 구호로만 그치지 말고 실질적인 투자가 이뤄져야 합니다. 처우개선이 이뤄져야 심판이 바로 설 수 있고, 그래야만 배구가 활성화될 수 있습니다. 협회도 잘못된 투자로 국가대표에 대한 지원이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저를 포함한 배구인들은 대오각성해야 합니다.” 거침없는 쓴 소리를 쏟아냈다.


그는 2004년 프로배구연맹이 출범하면서 초대 심판위원장을 맡아 주위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백어택 2점제를 도입해 흥행에 도움을 주었다. 또 현재 국제배구연맹이 시행하고 있는 차등승점제와 비디오판독제도 과감히 도입을 주장해 한국이 선도적 위치를 차지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그는 지난 6월말로 한국배구연맹(KOVO) 심판위원장 직에서 물러났다. 2년이상 연임이 불가하다는 내부 규정에 따른 것이다.


한국배구가 국제무대에서 생존하려면 적극적인 국제대회 유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스포츠외교 무대에서 활약할 전문가를 육성해야 한다고 덧붙인다. 세계적 선수를 배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실적으로 벽이 높다. 오히려 유능한 심판과 행정가를 육성하는 것이 지름길이라고 말한다. 각 국제연맹 단체에 가보면 30대 임원이 대다수라고 한다. 선수가 은퇴해서 행정가나 심판으로 진로를 바꿀 수 있도록 육성프로그램이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하며 인터뷰를 마쳤다.


각고의 노력으로 FIVB 주최 A매치에서 360회 주심을 보며 나름 국제무대에서 성가를 떨친 김 심판은 2010년 국제심판에서 은퇴하면서 FIVB가 월드리그 결승전, 세계여자선수권 결승전, 세계클럽선수권 결승전에 은퇴무대를 마련해준 것을 개인적으로 가장 영광으로 생각한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로는 2003년 월드리그 브라질과 유고연방이 벌인 결승전. 풀세트 접전을 벌여 브라질이 5세트를 31-29로 마치는 혈전 끝에 세트스코어 3-2로 승리한 경기를 꼽았다. 이 경기는 배구 100년사에 최고 명승부로 평가 받았다.


epilogue
김 심판은 인터뷰도중 아주 흥미로운 일화를 소개했다. 때는 2008년 베이징올림픽. 농구에도 관심이 많았던 김 심판은 중국-미국 남자농구경기를 관람했다.


미국은 NBA 선수로 드림팀을 꾸렸고 중국도 야오밍 왕치즈 등 NBA스타로 맞섰다. 부시 대통령과 후진타오 주석 등 양국 수반이 참관한 가운데 중국의 참패로 마쳤다. 이틀 뒤 미국과 중국은 여자배구에서 다시 맞붙었다. 중국여자팀은 아테네올림픽 금메달 멤버가 그대로 출전해 승리를 낙관했지만, 미국이 예상을 뒤엎고 이겨, 또 한번 경기장을 찾은 후진타오 주석을 당황케 했다.


이어 8강전에서 일본과 결전을 앞둔 중국은 협회차원에서 김 심판을 초청했다. 당시는 몰랐지만 중-일전에 주심으로 배정됐던 것을 뒤늦게 알게 된 것. 이와 상관없이 흔들림 없이 경기를 진행했고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중국이 3-0으로 완승했다.


이날 경기에는 훗날 주석자리에 오른 시진핑이 참관했다고. 이를 두고 김 심판은 자신이 최초로 시진핑을 면접봤다고 호방하게 웃었다. 그만큼 심판은 외부 유혹에 노출되기 쉽고, 심판이 흔들리면 경기는 망치게 된다는 교훈을 얻었다고 한다.


글/ 김동준 기자
사진/ 문복주 기자


(본 기사는 더스파이크 8월호에 게재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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