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울지 않는 코트의 여우, 유경화

정고은 / 기사승인 : 2016-08-24 10: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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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구를 해서 정말 행복합니다. 배구인으로 살면서 모든 것을 누렸습니다.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고 월드컵에서 베스트 6에 선정되었으며 기자단이 선정하는 미스 월드에도 뽑혔고 각종 대회 때마다 상도 받았습니다. 국가대표로 태극마크를 달고 세계 각국을 다녔으며 은퇴한 뒤에도 대한민국배구협회 이사, 국민생활체육회 전국배구연합회 부회장, 프로배구 경기감독관도 거쳤습니다. 지금도 후배들이 찾아 주는가 하면 유소년들에게 내가 가진 작은 재능을 베풀 수 있는 기회까지… 배구를 해서 정말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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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여자 배구 동메달의 주역 유경화(63)는 인터뷰를 하는 동안 ‘행복하다’는 말을 몇 차례나 되풀이했다. 배구와 인연을 맺은 것이 행운이었고 은퇴한 지 30년이 훌쩍 넘어섰지만 지금도 배구 덕분에 행복하다고 입을 모았다.



요즘 그녀는 서울 봉은초등학교에서 몬트리올 올림픽 동료였던 박미금과 함께 유소년 스포츠배구클럽 지도자로 활동, 유소년 지도에 정성을 쏟고 있다. 순수한 재능기부다. 유소년 스포츠배구클럽은 대한민국배구협회와 IBK기업은행, 프로배구단 후원으로 2009년 서울 반포, 인천 주안, 수원 잠원에서 시작해 현재는 서울 봉은, 성일, 동명, 구남, 인천 부개서, 연선, 성남 돌마, 파주 마지초등학교 등이 참여하고 있다. 초등학교 2~4학년인 저학년 여학생은 부드러운 볼로, 그리고 5~6학년 남녀 고학년은 배구공으로 각종 놀이와 접목해 자연스럽게 배구를 접할 수 있도록 지도하고 있다.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 경기도 기흥에서 서울로 오는 길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습니다. 아이들이 조금씩 배구에 흥미를 가지고 재미를 붙이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뿌듯하고 스스로가 자랑스럽습니다.”



이렇게 유소년 스포츠배구클럽을 거친 세화여중 박현주, 반포초등학교 박예원, 인천 주안초등학교 박현빈, 강승규 등 10여 명은 현재 엘리트 선수로 활약하고 있다고. 하지만 “많은 학교에서 지도자 요청을 하고 있으나 모두 재능기부로 이루어지고 강사료를 지급할 여유가 없어 더 많은 학교에서 추진을 하지 못해 아쉽다”는 그녀는 “유소년 스포츠배구클럽 활성화는 우리 배구인 모두의 희망이며 비전이라는 인식을 갖고 많은 관심을 가져 주었으면 좋겠다”라는 바람을 보였다.


우연히 본 배구에 매료돼 선수 자청해
3남3녀 형제 가운데 넷째이자 막내딸로 강원도 문막이 고향인 유경화는 광산업을 하는 아버지 덕분에 어린 시절 부유하게 보냈고 일찍이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다. 당시 중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체력장 시험을 치렀는데 달리기에서는 언제나 1등을 할 정도로 운동에 재질을 보였지만 전문선수가 된다는 생각은 아예 꿈도 꾸지 않았다.



이런 그녀에게 배구가 운명처럼 다가온 것은 동구여중 2학년 때인 1967년 5월 어느 날이었다. 화창한 5월 햇살을 받으며 친구들과 함께 옥상에서 중간시험 공부를 하던 그녀가 문득 운동장을 내려다보니 좁은 코트 안에서 훈련을 하는 배구 선수들 모습이 눈에 띄었다. 실내체육관이라고는 구경하기도 어렵던 시절, 운동장 한 구석에 배구코트를 만들어 놓고 맨 땅에서 훈련을 하고 있었다. 선수들이 코치가 이쪽저쪽으로 던지는 볼을 쫓아 달리기만 할 뿐 제대로 볼을 받아내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는 “저 정도도 못 받아내나? 나 같으면 충분히 할 텐데…”라며 흥미를 보인 것이 배구와 첫 만남이었다.



때마침 배구 감독이 교실마다 다니면서 선수 지망생을 찾아 다니자 그녀는 서슴없이 자원했다. 솔직하게 배구 선수를 하고 싶다는 생각보다 선수들보다 내가 더 잘 한다는 모습을 과시하고픈 욕심이 더 강했다.


하지만 감독은 썩 내키지 않는 눈치였다. 바로 키가 155㎝ 정도밖에 되지 않아 배구선수로는 너무 작았던 것. 이 바람에 배구에 입문하고서도 ‘그만 두라’는 말까지 들어야 했고 20여명에 이르던 동기는 어느 새 하나 둘씩 팀을 빠져 나가 졸업할 때에는 동기가 한 명도 없을 정도였지만 그녀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때 동구여중 감독은 뒷날 현대여자배구단을 실업 정상으로 이끌었던 이임 감독이었다.



발이 빠른데다 볼을 다루는 센스도 뛰어났던 그녀는 숭의여고에 입학해 송유진 감독과 호흡을 맞추면서 천부적인 자질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키도 170㎝로 훌쩍 커졌다. 60년대 후반과 70년대 초 장안의 화제를 불러왔던 대신-인창, 숭의-덕성 4개교가 벌이는 4고교 배구대회에서 조혜정, 유정혜 노창희 등과 함께 ‘숭의 전성시대’를 이끌었고 고교 3학년 때인 1971년 국가대표로 선발됐다. 배구를 시작한 지 불과 3년이 지났을 뿐이었지만 우리나라 여자 배구 대들보로 일찌감치 인정을 받은 것이다.


1972년 졸업과 동시에 실업 배구 최강인 국세청에 입단한 그녀는 세터 겸 공격 형 센터로 실업 1년생부터 주전 자리를 꿰찼다. 1968년 박만복 감독, 이창호 코치 체제로 출범한 국세청은 초창기 잠깐 팀 정비로 어려움을 겪었을 뿐 1973년 대농이 인수할 때까지 그야말로 무적함대로 군림했다. 이후 대농이 미도파로 이름을 바꾸고 1980년 4월 태광산업에 일격을 당하기까지 무려 181연승이라는 우리나라 배구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세웠다. 그 시발점이 바로 국세청이었다. 또한 그 연승가도에는 바로 유경화라는 걸출한 세터가 중심에 있었기에 가능했다.



“당시 국세청-대농-미도파가 경기를 하면 장충체육관에 5천명 관중이 들어찰 정도로 인기가 높았습니다. 1972년 뮌헨올림픽 4위,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 동메달로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것도 인기 요인이었습니다. 무엇보다 팬들은 이들의 연승에 환호를 하면서도 언제 패하느냐에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국가대표 주공격수인 김영자 조혜정 길송애 최숙 윤영내 유정혜 그야말로 팀 자체가 국가대표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유경화는 여자선수 세터로 상당히 큰 키(171cm)로 다양한 공격을 만들어 내 감탄을 자아냈습니다. 오픈 공격을 위한 볼 연결은 물론 상대팀이 예측할 수 없는 속공 유도, 특히 비슷한 신장인 유정혜와 콤비를 이룬 속공은 위력적이었으며 때때로 세트 제스처를 가장한 기습적인 직접 공격도 일품이었습니다.” 당시 배구를 취재했던 한 원로기자가 기억하는 유경화 모습이다.


160702sks_LY02.jpg‘일본 배구의 신화’ 다이마쓰 만나 명 세터로
유경화 배구 인생은 ‘일본 배구 신화’ 다이마쓰 히로부미(1921~1978)를 만나면서 일대 전환기를 맞는다.



다이마쓰는 “동양인 몸에 맞는 훈련을 개발하라. 죽을 힘을 다해 훈련하라. 하면 된다”라는 혹독한 스파르타식 훈련으로 일본여자 배구를 세계 정상으로 끌어 올린 신화적 인물. 다이마쓰가 조련한 일본 여자배구는 1962년 모스크바 세계배구선수권대회에서 국제대회 11연승을 달리던 소련을 3-0으로 누르고 우승한 것을 비롯해 1964년 도쿄올림픽에서 구기 종목 사상 첫 아시아권 올림픽 우승을 이루어냈다.



대한배구협회 초청으로 내한한 다이마쓰는 유경화가 지금보다 한 계단 더 높은 세터로 성장할 수 있는 자질이 있음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이때부터 다이마쓰 특유의 ‘유경화 세터 만들기’ 특별 훈련이 실시됐다.



하루 종일 쉴 틈을 주지 않았다. 지면에서 50~60㎝ 정도로 볼을 튀긴 뒤 반드시 두 손을 사용해 볼을 올리도록 했으며 언더핸드는 용납하지 않았다. 아무리 낮은 볼이라도 세터는 넘어지면서까지 공격수가 제대로 공격을 할 수 있도록 올려 주어야 하는데 언더핸드로는 정확하게 볼을 줄 수 없다는 것이 다이마쓰의 지론이었다.


자신 지시를 제대로 따르지 않은 유정혜에게는 아예 훈련을 시키지도 않았다. 입에 올리기 힘든 욕설도 서슴지 않았다. 뮌헨올림픽과 몬트리올올림픽을 앞두고 힘든 훈련을 견디다 못한 선수들이 두 차례씩이나 집단으로 이탈하는 사건이 난 것도 이런 이유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학교 다닐 때는 방학 동안에 훈련을 받았고 일본 전지훈련을 가서도 집중 훈련을 했습니다. 일본 실업팀들인 히다치, 도요보, 야쿠르트, 산요, 유니티카 등과 오전에 5~6세트, 오후에 7~8세트 연습경기를 하고 남는 시간에도 훈련을 했습니다. 이쪽 엔드라인에서 볼을 띄우고 다시 반대쪽 엔드라인까지 뛰고, 거의 받을 수 없는 묘한 자리에 볼을 주고는 받지 못하면 꾸중을 하고…. 몸은 곤죽이 되고 등은 아예 시퍼렇게 멍이 들었지만 전혀 사정을 봐주지 않았습니다. 유일하게 쉬는 시간은 화장실 갈 때뿐이었습니다. 화장실에 앉아 5~6분 꿀 잠이 들면 후배들이 찾으러 오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힘든 훈련 과정을 거치면서 그녀 실력은 하루가 다르게 늘었다. 실업 1년차인 그녀가 1972년 뮌헨올림픽에 주전 세터로 나설 수 있었던 연유이기도 했다.



최이식 감독 전호관 코치 김은희 김영자 이경숙 이순복 조혜정 이정자 유정혜 이인숙 윤영내 이경애 유경화가 팀 웍을 이룬 한국은 3~4위전에서 북한에 0-3으로 완패해 메달 획득에는 실패했지만 유경화는 올림픽을 통해 한 계단 더 성숙해졌다.



“솔직하게 북한과 3~4위전에서 어떻게 경기를 했는지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머리가 하얗게 비었다고나 할까요. 역대 최고 성적을 내고도 북한에 지는 바람에 환영도 받지 못하고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며 귀국한 것 밖에 기억에 없어요. 정확하게 말하긴 어렵지만 세터가 팀에서 차지하는 비중이나 위치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느끼는 계기는 되었습니다.”
76_몬트리올_16.jpg‘울지 않는 코트의 여우’ 별명 얻은 몬트리올 올림픽
뮌헨올림픽에서 4위는 우리 선수들에게 ‘하면 된다’라는 자신감을 심어 주었고 4년 뒤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따는 쾌거로 이어진다.



동메달로 가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메달에 대한 압박감이 선수들을 짓눌렀다. 이 바람에 선수들은 지나친 부담감으로 몸이 제대로 풀리지 않았다.


8개국이 출전한 가운데 B조에 속한 우리나라는 첫 경기에서 소련(현 러시아)에 1-3으로 패해 불안하게 출발했다. 쿠바와 동독과는 역전에 역전을 거듭하는 풀세트 접전을 벌였다. 조 2위. 준결승에서 만난 A조 1위이자 세계 최강 일본에 0-3으로 완패해 3-4위전에서 헝가리에 첫 세트를 12-15로 내주고 나머지 3세트를 내리 따내 3-1로 역전승, 감격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조혜정 이순복 유경화 유정혜 정순옥 마금자 장혜숙 이순옥 박미금 변경자 백명선 윤영내 등 12명 자랑스런 얼굴들이 거둔 우리나라 구기 종목 사상 올림픽 첫 메달이었다. 선수들이 서로 부둥켜안고 감격에 겨운 울음을 터뜨릴 때 유일하게 눈물을 흘리지 않은 선수가 있었다. 바로 세터 유경화였다.



“아직 기억이 생생합니다. 온몸에 소름이 끼치면서 닭살이 돋고 이런 순간도 오는 구나, 이것이 4년 동안 새벽, 아침, 저녁, 야간 훈련에 이르기까지 고생한 보람이구나라는 생각으로 순간적으로 울컥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뭔가 부족했다는 생각만 머리에 맴돌았습니다. 올림픽에 출전하기 전 태릉선수촌에서 쿠바와 친선경기를 하는 도중에 블로킹을 하고 내려오다 쿠바선수 발을 밟아 발목이 삐끗하는 부상을 당해 침을 맞고 테이핑을 하고 훈련을 했지만 제대로 치료를 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올림픽에도 발목이 완쾌되지 않은 채로 경기를 해야 했습니다. 내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는 자책만이 앞섰습니다. 눈물이 나지 않더군요.”



이 바람에 얻은 별명이 ‘울지 않는 코트의 여우’다.


뭔가 부족하고 못다 한 미련은 남았지만 올림픽에서 활약으로 미국 프로팀에서 손길이 뻗쳐왔다. 원한다면 미국 대학에 다닐 수 있는 장학금도 주겠다는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평소에도 못다 한 공부를 하고 싶었던 그녀는 유학을 결심하지만 국내 여론은 우호적이지 않았다.


심지어 매국노라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대한배구협회 이낙선 회장은 아예 외국에 못 내보낸다고 공식적으로 천명까지 했다.



결국 유학길이 막혀 버렸고 1977년 초에는 허리부상이 심해 국가대표 강화훈련 마저 제외되는 아픔을 겪었다.


이해 말 일본에서 열리는 월드컵대회에 대비해 국가대표로 곧 복귀는 했지만 그녀 가슴에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아픔이 또 찾아왔다. 그녀가 학비를 대주며 아끼던 동생 희종이 10월 6일 한국배구 올스타전이 열리기 이틀 전에 새로 이사를 간 집에서 연탄가스 중독으로 사망했던 것. 하지만 그녀는 슬픔에 잠겨 있을 수만은 없었다. 국가대표라는 자리가 동생을 잃은 슬픔보다 훨씬 더 컸기 때문이다.



유경화는 월드컵에서 일본 쿠바에 이어 우리나라를 3위로 이끈 뒤 은퇴설에 휩싸였다. 뮌헨, 몬트리올올림픽을 거치면서 스승과 제자로 호흡을 맞췄던 전호관 감독의 소개로 만난 최인규 씨와 결혼설 때문이었다. 26살 한창 전성기이지만 이미 노장으로 치부되는데다 ‘결혼은 곧 은퇴’로 여겨지던 당시 세태도 한몫을 했다.



그녀 은퇴 소식에 배구계는 들썩였다. 이낙선 회장까지 나서 은퇴를 만류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모스크바 세계선수권 4위(1978년 8월), 방콕 아시안게임 3위(1978년 11월)를 마지막으로 1979년 1월 12년간의 선수생활을 마치고 행복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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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터 유경화가 김연경 양효진과 함께 한다면…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말처럼 배구 인이 배구 판을 그리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 두 아이 엄마가 된 유경화도 마찬가지였다. 결혼으로 배구를 떠나긴 했지만 마음은 언제나 코트가 그리웠다.


그리고 기회도 왔다. 한국도로공사 윤필용 사장과 장종술 감독 권유를 받아 81년 3월 도로공사 트레이너가 되어 코트에 돌아 왔다. 그녀는 같은 주부선수로 국가대표 출신인 권인숙과 호흡을 맞추며 이해 5월 마산 종별대회 준우승, 12월 3차 실업연맹전 3위에 이어 1982년 1월 종합선수권에서는 거함 미도파마저 격침시키며 준우승을 차지, 녹슬지 않는 기량을 과시했다.



유경화가 활약하던 시절을 함께한 많은 배구인들이나 취재기자들은 그녀는 위기에 몰리더라도 결코 서두르지 않고 초조해 하지도 않았으며 남자 못지않은 배짱에다 당찬 기개가 있었던 여자선수라고 기억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조용하고 야단스럽지는 않았지만 여성의 멋은 감추지 않고 드러내고 싶어 했다. 외국에서 유행하는 특이한 옷도 과감하게 입었고 귀고리 등 여성성을 드러내는 장신구도 달고 다녔다. 기술보다는 정신력을 강조하던 시대여서 협회나 코칭스태프의 많은 우려와 곱지 않은 시선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결코 미(美)를 포기하지 않았다.


“우리 여자배구가 지금 침체되어 있습니다. 프로 의식을 채 갖추기 전에 프로가 된 때문인 것 같습니다. 지금은 프로라고 부르기 너무 부끄럽습니다. 프로는 명성에 맞는 실력을 함께 지녀야 합니다. 모든 조건은 좋아졌지만 훈련이 적어 실력이 늘지 않고 있는 탓입니다.”


그녀는 김숙 박미금 등 은퇴선수들로 생활체육 클럽팀을 구성해 아직도 코트를 누비기도 하고 유소년 지도에도 열을 쏟고 있으며 여자 대학배구 활성화를 위한 방안 찾기에 골몰하고 있다.



고교시절에 국가대표팀 세터로 들어가 스스로 자신만의 세터 스타일을 만들어 낸 유경화. 이제 곧 다가 온 리우올림픽. 김연경 양효진에 전성시절의 유경화가 세터로 뒤를 받쳐 준다면 몬트리올올림픽 이상의 영광도 가능하지 않을까하는 기분 좋은 상상도 해본다.



글/ 정태화 한국체육언론인회 사무총장
사진/ 신승규 기자, 본인 제공


(본 기사는 더스파이크 8월호에 게재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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