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92연승 금자탑, 따뜻한 명장 김철용

정고은 / 기사승인 : 2016-09-12 09: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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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여자배구에서 이 사람 이름을 빼놓을 수 없다. 화려한 선수시절은 없지만, 늘 공부하고 연구했으며, 강한 훈련만이 최고 성적을 보장해준다는 신념을 가진 감독. 한국 여자배구에 고유 색깔을 입혀 한국 스타일 배구를 완성시킨, 그래서 1990년대 일본이 가장 두려워했던 한국감독. 이제는 일선 학교에서 학생선수를 조련하는 데 애쓰는 김철용 감독(62)을 만났다.



독사라는 별명이 주는 의미
필자가 김철용 총감독을 만나기 위해 서울 아현동 소재 중앙여중 체육관을 찾은 날은 폭염이 한창 기승을 부리던 8월 초 오후 3시쯤이었다. 땀을 비 오듯 흘리며 체육관에 도착했을 때 추계초등학교, 중앙여중, 중앙여고 선수들이 한데 어우러져 훈련 준비를 하는 모습은 필자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고등학교 선배가 막대걸레로 체육관 바닥을 청소하는 동안 후배들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삼삼오오 모여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 청소는 가장 나이 어린 후배들 차지라는 통상적인 생각은 무너졌다. 무엇보다 혹독하기로 유명해 ‘독사’라는 별명을 가진 감독이 지도하는 팀 선수들은 약간은 두려움에 넘치는 경직된 분위기일 거라고 상상했던 고정관념과는 사뭇 달랐다.



모든 스포츠 종목에 공히 ‘독사’라는 별명을 가진 지도자가 있듯이 배구에도 김철용(63)은 같은 별명으로 통한다. ‘독사’는 말을 덧붙여 설명할 필요도 없이 ‘독한 지도자’란 뜻이다. 본인도 굳이 부인하지 않는다.
‘독사’라는 별명이 붙은 지도자들에게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훈련지상주의자들이다. 훈련이라고 어슬렁어슬렁하지 않는다. 선수들이 한 눈을 팔면 여지없이 불호령이 떨어진다. 실전을 뛰어넘는 훈련만이 선수들 실력을 향상시키고 나아가 진짜 경기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다고 믿고 있다. 특히 팀 경기의 ‘독사 지도자’들은 팀 웍을 다지고 팀플레이를 위해서는 ‘훈련만이 최선이다’는 굳은 신념을 갖고 있다.



둘째는 혹독한 훈련 결과에 걸맞게 성적도 좋다는 점이다. ‘독사 지도자’들이 성적을 내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선수들이 매 게임마다 집중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아무리 불리하더라도 포기하지 않는 것이 ‘독사 지도자’들이 조련하고 있는 팀 특징이기도 하다. 실전보다 더 힘들고 어려운 훈련을 거쳤기 때문이다. 당연히 성적이 좋을 수밖에 없다. 스포츠 명언 가운데 사람이 좋으면 꼴찌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니 이를 뒤집으면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서는 ‘독사 지도자’가 있어야 된다는 말과도 통하지 않을까?



셋째는 선수 발굴이나 조련에 일가견이 있다는 점이다. 즉 지도자들 가운데는 잠재적인 대성 가능성이 있는 선수들을 일찌감치 알아보고 이들을 대형선수로 키워내는 ‘선수 발굴형’이 있는가 하면 한편으론 선수들 능력을 꿰뚫어보고 적재적소에 선수들을 기용하는 용병술에 뛰어난 지도자도 있다. 이 가운데 ‘독사 지도자’들은 대부분 전자인 ‘선수 발굴형’에 속한다.



추계초등학교, 중앙여중, 중앙여고 등 3개 배구팀 총감독인 김철용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독사 지도자’ 전형적인 모델이나 다름없다.



“군을 다녀온 남자들은 모두 알겠지만 공수특전사는 강도 높은 훈련을 거듭해 정신력이나 실력에서 최고인 강한 군인을 조련하는 곳입니다. 바로 그 특전사에서 군 생활을 하는 동안 인내력을 배웠고 잘 싸우기 위해서는 강한 훈련이 최선이라는 경험을 했습니다. 교육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땀 흘림의 결과는 보장이 된다, 모든 것은 훈련에서 결정된다는 신념도 갖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남자선수들과 달리 여자선수들은 신체조건이나 정신력에서 뒤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경기에 대한 경험 부족에서 오는 심리적인 불안을 해소하고 강한 정신력과 투지를 불러일으키는 데는 반복적인 스파르타식 훈련만이 최선입니다.”



그가 ‘독사’란 별명을 얻은 연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그는 이를 무기(?)로 90년대 우리나라 여자배구 전성기를 이끌었다. ‘우승 청부사’라는 별명이 따라붙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160808sks_CY11.jpg‘무명’에서 ‘무명’으로 끝난 선수 생활
전북 군산에서 6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난 김철용은 어려서부터 운동을 접할 기회가 많았다. 둘째 형이 운동을 좋아해 집에 각종 운동기구가 많았고 이 덕분에 동네 사람들도 많이 모여 함께 운동을 했다. 어린 마음에 형들이 운동하며 땀을 흘리는 모습이 좋아 함께 운동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운동에 기본 재질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전문적인 선수가 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가 배구와 인연을 맺은 것은 배구팀을 육성하고 있던 전북 군산북중 2학년 때 열린 학교체육대회 덕분이었다. 반 대항 학교체육대회 9인제 배구에 대표로 출전한 그는 중위 센터에서 점프를 하며 스파이크를 날리며 맹활약, 반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당연히 같은 또래들보다는 발군이었다. 그가 보인 볼에 대한 집착, 재빠른 몸놀림, 점프력을 유심히 지켜 본 배구 코치가 이를 놓칠 리 없었다.



이렇게 느닷없이 배구가 인생의 한 부분으로 찾아왔지만 선수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신장이 177cm로 배구 선수로는 작았고 남산공전으로 진학을 했다가 허리 연골 부상으로 1년을 쉰 뒤 부산 성지공고에 1학년으로 다시 입학을 하는 우여곡절도 겪었다.



“돌이켜보면 부산으로 학교를 옮긴 것이 인생 전환기였습니다. 오전에 수업을 하고 오후와 야간에 훈련을 했는데 키가 작다는 이유로 제대로 훈련을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대신 나는 매일 아침 새벽 5시30분에 일어나 달리기, 줄넘기를 하고 일주일에 한번씩은 10km를 달리며 체력을 다지고 하루에 1천개 이상씩 벽에다 볼을 튀기는 훈련을 했습니다. 주일에 본격적으로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 입니다”



당시 성지공고에는 뒤에 아시아 거포로 명성을 떨친 강만수가 2학년, 주전 세터였던 신치용이 같은 1학년이었다. 남산공전에서 성지공고로 옮기면서 1년을 쉬는 바람에 사실상 강만수와 동기이다. 하지만 그는 지금도 한 살 어린 강만수에게 깍듯하게 선배 대접을 한다. 이처럼 나름대로 노력은 했지만 제대로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절친한 친구이기도 한 신치용과 세터 자리다툼에서 밀린 까닭이다.



졸업이 얼마 남지 않을 즈음 마지막 부산지역대회를 열흘 가량 앞두고 손가락 부상을 당한 세터 신치용 대신 출전해 그 동안 혼자서 갈고 닦은 기량을 선보인 것이 거의 전부나 다름없다고 회상한다. 대신 그는 선배들 경기하는 모습을 꼼꼼히 기록하고 나름대로 경기에 대한 감상을 적었다. 모든 경기를 메모하는 습관이 이때부터 생겼고 먼 훗날 일신여상과 호남정유(현 GS칼텍스) 감독을 거치면서 상대 선수들 장단점을 훤히 꿰뚫어 보는 ‘비밀병기’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체육 교사’에서 ‘우승 청부사’로 변신
김철용은 선수 생활을 성균관대학교 2학년까지 이어가다 3학년부터 주무를 맡으면서 실질적 으로 막을 내렸다. 중학교 2학년 때 시작해 대학교 2학년까지 햇수로 8년이 고작인 셈이다. 그 동안 선배들과 동료들 뒷바라지하는 후보 선수였을 뿐이었다. 제대로 주전으로 뛸 기회가 없었다.



당연히 국가대표는 고사하고 청소년대표도 하지 못했다. 그가 교사를 목표로 사범대학에 입학한 것은 어차피 선수로 대성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입대한 공수특전사는 그에게 인내와 훈련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었다. 공수부대라면 어지간한 남자들도 힘든 훈련에 혀를 내두르기 마련이다. 그는 여기서 ‘반복된 강한 훈련만이 최상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게 된다. 무명의 설움­공부하는 지도자­공수특전사에서 체득한 신념, 이렇게 이어진 20대 초반 행보는 ‘우승 청부사’ 탄생을 알리는 서곡인 셈이다.



승리에 대한 집념은 첫 교사 생활을 시작한 성도중학교(현 송림중)에서부터 시작된다. 1980년 8월 대학 1년 선배인 승호진 뒤를 이어 체육교사 겸 배구감독으로 지휘봉을 잡은 그는 불과 1년만인 1981년 1~2학년만으로 가을철 배구대회에서 우승을 일궈냈다. 그리고 1982년 일신여상으로 자리를 옮겼다.



일신여상과 특별한 인연은 없었다. 성균관대 선배인 김남성의 권유에다 어차피 체육교사로 근무하는 만큼 성남에 있는 학교보다는 서울에 있는 학교가 낫지 않겠냐는 단순한 생각에서 선뜻 승낙했을 뿐이었다.



당시 일신여상은 63연승으로 무패행진을 하던 여고 최강이었다. 그가 지휘봉을 잡으면서 일신여상은 날개를 더 단 모양새가 됐다. 그는 특유 카리스마와 지도력을 발휘하면서 대통령배 고교선수권대회 6연패를 비롯해 1987년 실업팀인 호남정유로 옮길 때까지 무려 118연승이란 신기록을 세웠다.



일신여상은 이 동안 초고교급 세터로 명성을 날린 임해숙, 컴퓨터 세터 이도희를 비롯해 심혜련 김인숙 김길순 고승미 김성민 홍석주 등 빼어난 멤버들을 배출했다. 또한 이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여자팀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을 맺게 되는 계기도 됐다.



“송림과 일신여상에서 6년 동안 감독을 하면서 중학팀에서 7번 진 기억밖에 없습니다. 1985년 마산 전국체전 서울시 예선전에서 경복여상에 1, 2세트를 내주고 3세트마저 2­14로 뒤지다가 16­14로 역전시킨 뒤 5세트까지 끌고 가 승리한 뒤 전국체전에서 우승했던 경기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고교무대이지만 팀을 무패 연승으로 이끈 남다른 지도력을 가진 그에게 실업팀에서 눈독을 들이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바로 호남정유였다. 호남정유 최국진 부장의 6개월에 걸친 간청을 받고는 1987년 드디어 지휘봉을 잡았다.



“평생 교사를 하기 위해 사범대에 진학했는데, 정말 고민 많이 한 끝에 결정을 했습니다. 지금 같으면 계약금이라도 받겠지만 그때는 그런 것도 없었고… 교사 때 받은 봉급보다 직급이 한 계단 높았고 당시 현대자동차에서 나온 소형 승용차인 프레스토를 자가용으로 받은 것이 전부였습니다. 프레스토는 4년 뒤 소나타로 바꿔 주더군요.”



1970년대에 창단한 호남정유는 이때만 해도 대농, 현대건설 양강(兩强)에 밀려 그저 그런 2류 팀이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가 호남정유를 맡으면서 팀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듬해인 1988년에는 팀을 성큼 4강으로 올려놓았고 2년만인 1989년 대통령배 대회에서는 준우승, 1991년 제8회 대통령배 대회에서는 마침내 현대건설 아성을 깨고 첫 우승까지 거머쥐었다.



이때부터 호남정유 무패신화가 시작된다. 1990년 11월부터 1995년 1월 3일 선경에게 1­3으로 패할 때까지 무려 4년 2개월 동안 92연승 신화와 함께 대통령배, 슈퍼리그를 포함해 1999년까지 9연패 위업을 이루었다. 왼쪽 공격수 장윤희 정선혜, 세터 이도희, 중앙공격수 홍지연, 오른쪽 공격수 박수정 등 그야말로 모두가 국가대표 급인 초호화 멤버가 바로 주역들이다.



그는 선수들에게 희생만 강요하지 않았다. 동기부여가 될 수 있는 당근도 함께 줬다. 그는 선수들에게 6년차가 되면 무조건 대학 진학과 함께 운전면허를 딸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 덕분에 이도희 장윤희 홍지연이 모두 대학을 마쳤다. 그리고 10년차가 되면 1천만 원 씩 보너스를 지급했다. 피부로 느끼는 혜택이 있어야 동기유발이 되고 그 동기유발이 선수들을 더욱 강하게 만든다는 것이 지도 철학이었다.



하지만 호남정유가 사명을 LG정유로 바꾸어 9연패라는 금자탑을 쌓을 수 있었던 것은 초호화멤버여서 우승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들이 김철용이란 지도자와 함께 했기에 연승도 하고 국가대표도 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는 바로 국가대표 윙스파이커 장윤희 경우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장윤희는 전주근영여고 출신으로 실업 팀 어디에서도 눈여겨보지 않았다. 키가 작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김철용 감독은 이미 고교시절부터 장윤희가 가진 잠재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결국 장윤희는 호남정유에 입단해 김철용 감독을 만나면서 꽃을 피우며 호남정유 연승행진 일등공신이자 1990년대 우리나라 여자배구를 대표하는 주공격수로 명성을 떨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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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땀 흘리는 지도자가 필요해
김철용은 국가대표 코치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감독을 맡았다. 그만큼 대통령배와 슈퍼리그에서 지도력을 인정받은 덕분이다.



그는 1992년 스위스 BCV대회에 호남정유 단일팀으로 출전해 쿠바에는 패했지만 러시아, 미국 대표팀에게 모두 이겨 3위에 올라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이 대회가 바르셀로나올림픽을 앞두고 전초전으로 열린 대회였기 때문이었다. 비록 우리나라는 예선에 탈락해 올림픽 출전이 좌절됐지만 바로 몇 개월 뒤 열린 올림픽에서 쿠바, 러시아, 미국은 나란히 금·은·동메달을 따냈던 세계 최고 강호들이었다.



1994년 히로시마아시안게임은 진가를 더욱 빛나게 해 주었다. 높아만 보이던 중국, 그리고 일본에게 모두 3­2로 역전승을 거두며 아시안게임 첫 금메달을 따냈다. 남자가 1978년 방콕아시안게임에서 우승한 적은 있었지만 여자는 아시안게임 첫 금메달이었다.



이에 그치지 않았다. 이해 브라질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김남순 정선혜 홍지연 박수정 장윤희 등을 이끌고 1978년 러시아세계선수권 이후 16년 만에 첫 4강 진입이라는 쾌거도 이루었다.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을 시작으로 2000년 시드니, 2004년 아테네올림픽까지 올림픽 3회 연속 대표팀 감독도 역임했다. 시드니올림픽에서는 조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미국에 12­9로 앞서다 16­14로 패해 아쉽게 4강에 진출할 기회를 놓친 기억은 아직도 가슴 속에 아프게 남아있다.



김철용은 2003년 3월 16년 동안 정들었던 LG정유를 떠난다. 1999년 슈퍼리그 우승을 마지막으로 구단은 스카우트를 아예 외면했다. 그나마 장윤희 김성희 등으로 간신히 버티던 LG정유는 2003년 슈퍼리그에서 꼴찌라는 나락으로 빠졌다. 승부 세계에서 꼴찌가 되면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한다. 그 책임을 그가 졌다.



아테네올림픽을 마치고 그는 학교로 되돌아갔다. 이번에는 송원여상이었다. 교사로 감독으로 또 이중 생활이었다. 6개월 만에 열린 종별선수권대회에서 한일전산여고를 3­1로 누르고 우승했다. 백목화 이보람 이수진 문선영이 3학년 때였다.



이처럼 그는 국내에서 우승 청부사로 명성을 떨쳤지만 늘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우승 감독으로 10개월 만에 해임된 흥국생명이 대표적인 케이스다.



LG정유를 그만둔 지 3년 만인 2006년 2월 흥국생명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정규시즌 1위와 챔피언 결정전 우승을 이끌었다. 창단 36년만에 일군 첫 우승 기쁨도 잠시 그는 11월 해임되고 말았다. 선임 선수들이 주동이 돼 김철용 감독이 보인 강력한 지도 스타일과 종교적 문제를 이유로 들어 집단 이탈한 데 따른 책임을 진 결과였다.



“많은 사람들은 내가 맡은 팀에서 종교적 갈등을 이야기합니다. 이해합니다. 하지만 영혼이 살아 있어야 두려움이 없습니다. 선수들을 한 마음으로 만들고 의식과 정신이 서로 교감해야만 훈련 성과도 배가되고 강한 팀이 됩니다.”



그는 인터뷰를 하는 동안 몇 차례나 훈련 중요성을 강조했다. 성실하게 그리고 집중하고 최선을 다해 훈련을 하면 결과는 반드시 좋게 따라오기 때문에 선수들을 한마음으로 만드는 방편으로 기도를 권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현 여자배구에 대해 쓴 소리도 아끼지 않았다.



“지금 우리나라 배구는 조금씩 침몰해 가고 있습니다. 아직은 나름 힘을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언제 무너질지 모릅니다. 어느 때보다 지도자 역할이 중요한 시기입니다. 정치하는 감독보다 현장에서 땀 흘리는 지도자가 많아야 합니다.”



글/ 정태화 한국체육언론인회 사무총장


사진/ 신승규 기자



(본 기사는 더스파이크 9월호에 게재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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