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하게 공부했다면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뛰어들었을 24살 박정아. 그녀에게 올림픽 트라우마는 생에 가장 힘든 역경이었다. 자책감에 한참 눈물을 쏟아내던 날도 있었다. 하지만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트라우마를 견뎌내고 2016 청주 KOVO컵은 물론 NH농협 2016~2017 V-리그에서도 맹활약 중인 박정아. 크리스마스를 앞둔 12월 9일 경기도 용인시에 위치한 IBK기업은행 기흥연수원에서 별이 되기 위한 여정을 시작하는 그녀를 만났다.
신의 한 수 IBK기업은행
학원에 가기 싫었던 평범한 부산 모라초등학교 4학년 박정아는 같이 배구 하러 가자는 친구들 권유에 학원을 빠지고 친구들을 따라갔다. 처음 배구를 시작할 때는 140cm정도로 키가 큰 편은 아니었지만 배구를 할수록 조금씩 커서 남성여자고등학교 3학년이 됐을 때 185cm로 또래 중에서 가장 큰 키가 되었다.
당시 중앙여자고등학교 3학년 김희진과 더불어 고교 최대어로 불린 박정아. 이들이 신인 드래프트에 참가하는 해, IBK기업은행이 여자배구 제 6구단으로 창단하면서 우선지명으로 입단하게 되었다. 당시 심정을 묻자 박정아는 사실 당시엔 IBK기업은행이란 은행이 있는 줄도 몰랐다며 머쓱하게 웃었다.
“창단 되니 안되니 말도 많았고, 드래프트도 연기되면서, 이러다 아무데도 못 가는 거 아닌가 걱정했어요. 다행히 창단이 돼서 IBK기업은행에 오게 되었죠. 그런데 오고 보니까 숙소도 없고 체육관도 없는 거예요. 고등학생 때 품었던 프로팀에 대한 기대가…(웃음).”
박정아는 아무것도 갖춰지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낙엽만 굴러가도 웃음이 나는 어린 친구들이 한데 모여 재미있었다고 말을 이었다.
IBK기업은행은 2011년 창단 이래로 KOVO컵 3회, 정규리그 3회, 챔프전 2회 우승 등 꾸준히 좋은 성적을 내는 명문팀으로 자리잡았다. 매 시즌 시작 전 우승후보로 꼽히는 것에 대해 항상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그렇게 생각해주신 것에 걸맞게 우승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박정아는 “이곳에 왔기 때문에 신인상도 받고, 우승도 많이 해볼 수 있었던 거 아닐까요?”라며 IBK기업은행에 입단한 것을 본인 배구 인생에서 신이 내린 한 수로 꼽았다.
그늘에 피는 꽃
좋은 성적은 쉽게 따라오는 것이 아니었다. 지난 시즌만 해도 정규리그 우승까지 승점 3점을 남겨두고 GS칼텍스전(2016년 1월 30일)에서 김희진이 오른쪽 손가락이 골절되면서 연패라는 수렁에 빠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도로공사전(2016년 2월 25일)에서 풀세트 패배라는 아쉬운 결과와 함께 맥마혼까지 왼쪽 손가락이 부러졌다.
“한 게임만 이기면 우승인데 자꾸 다음으로 미뤄지고, 2등은 치고 올라오고. 걱정이 많았어요.”
그리고 이틀 뒤 맞은 현대건설전. 모두가 현대건설이 승리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IBK기업은행은 현대건설을 3-2로 꺾으면서 정규우승을 확정 지었다. 박정아는 그날 마음가짐에 대해서도 들려줬다. “경기장 가는 버스에서 다들 ‘오늘 해보자!’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저도 ‘왜 못 이기는데! 맥마혼, 김희진 없다고 지는 거 아니다!!’라고 마음을 먹었어요. 그래서 그런지 그날은 평소보다 더 잘 되더라고요.” 이날 박정아는 개인 최다 득점인 32점(종전 31득점)을 기록하며 정규리그 우승 주역이 되었다.
2016~2017시즌 IBK기업은행은 리시브가 뛰어난 외국인 선수 매디슨 리쉘을 영입했다. 하지만 리쉘은 신장이 184cm. 팀 내에서 가장 높은 블로킹은 신장이 187cm인 박정아 몫으로 돌아왔다. 아포짓 스파이커 역할을 윙스파이커인 박정아가 해야 한다. 그에 따른 부담감은 없는지 궁금했다.
“부담을 느끼기 보다는 제가 다른 팀 외국인 선수를 블로킹 해야 하고, 저도 외국인 선수 앞에서 공격을 해야 하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득점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상대 외국인 선수를 막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많이 하면서 하고 있어요.”
박정아는 2016년 12월 19일 기준 232득점으로 전체 득점순위 6위(국내 선수 1위)를 기록하며 IBK기업은행 공격에 큰 활약을 하고 있다.
전성기는 지금부터!
많은 이들이 궁금해 할 이야기라 올림픽 이야기를 꺼내고 싶었지만 박정아가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는지 잘 알기에 선뜻 말을 건네기가 쉽지 않았다. 한참을 머뭇거리자 박정아는 얼른 얘기해보라며 채근했다. 조심스레 쓰라렸던 기억은 어떤 것이 있었는지 묻자 박정아는 “올림픽 얘기를 하려고 물어본 거 아니냐”라며 장난스레 눈을 흘겼다.
“가장 힘들었던 기억인 거 같아요. 그래도 올림픽에 가고 싶어도 못 가는 사람도 있는데, 큰 무대에서 뛰었다는 것만으로도 정말 대단한 거잖아요. 아직 많이 힘들지만 나중에 다시 생각해보면 ‘아, 그래도 나 그때 거기서 뛰었다’라고 말 할 수 있는 좋은 기억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첫 올림픽이었고 많은 이들이 메달을 기대했던 만큼 가장 잘 하고 싶었던 사람은 박정아 본인이었을 것이다. 네덜란드전이 끝나고 한참 힘들어하던 박정아 핸드폰에는 많은 사람들이 남긴 위로 메시지로 가득했다. “다들 제가 힘들어 하며 배구를 그만 둘 거라고 생각했나 봐요. 가족은 물론 팀원, 선생님 등으로부터 메시지가 무척 많이 왔어요.”
박정아는 올림픽을 통해 ‘내가 더 잘해야겠다. 더 잘하고 싶다’라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악성 댓글 중에는 ‘수영을 해서 한국까지 오라’는 글도 있었다며 이제는 장난스레 얘기를 꺼낼 만큼 충격에서 많이 벗어났지만, 여전히 말끝에는 ‘아직 힘들긴 하다’라는 말이 이어졌다.
올림픽 트라우마가 있던 사람이 맞나 싶게 KOVO컵과 V-리그 1라운드에서 MVP에 선정되는 맹활약을 펼쳤다. 당시 기분과 상금 향방이 궁금했다.
“제가 상 받을 줄 몰랐어요. ‘어머, 세상에! 감사합니다!’라는 생각이 들었죠. 아마 더 잘 하라는 의미로 준 거겠죠? 상금은 용돈통장에 넣었는데… 어디로 다 사라졌는지… 돈이란 참… 금방 없어지네요”라고 짓궂게 웃는다. 박정아는 국가대표 차출로 인해 최근 몇 년간 제대로 쉬지 못한 것에 대해 “체력적으로 조금 힘들긴 하지만 그건 저뿐만 아니라 국가대표 모두가 다 똑같아요. 그리고 지금은 국가대표팀 소속이 아닌 IBK기업은행 소속이기 때문에 그런 것을 티 내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라고 듬직한 모습도 보였다.
힘든 시간을 견딘 만큼 앞으로 계속 잘 하고 싶다는 박정아. 지금부터 배구를 그만 둘 때까지 계속 전성기였으면 좋겠다는 욕심을 내보였다.
남한테 관심 없는 성격?
박정아는 남한테 별로 신경 안 쓰는 성격이라고 밝혔다. 후배들한테도 그냥 못되지 않게 대하려고 한다고. 하지만 후배들이 말한 박정아는 달랐다. 후배들에게 박정아를 묻자 하나같이 ‘츤데레(툴툴 거리면서도 챙겨준다는 긍정적인 의미인 인터넷 용어)’라고 답했다.
이번 시즌 룸메이트를 정할 때 박정아는 신인 고민지와 최윤이 중 한 사람을 선택해야 했다. 박정아는 초등학생 때부터 봐온 최윤이가 자신을 어려워할 거 같아 고민지와 방을 쓰기로 했다고 한다.
그렇게 룸메이트가 된 고민지는 처음 팀에 오던 날 “언니가 ‘애기라서 애기요금제 쓸 거 아니가?’라며 개인 공유기 비밀번호를 알려주었다”라고 밝혔다. 또 욕실 용품을 어디에 둘 지 몰라서 일단 세면대 위에 올려뒀더니 박정아가 다 정리를 해 줘서 정말 고마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박정아는 “그런 건 당연히 해주는 거 아니냐? 그게 왜 츤데레인지 모르겠다”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야기가 거듭 될수록 박정아가 마냥 남한테 관심 없는 성격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 말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이었다. 프로 데뷔 초부터 박정아에게는 ‘표정이 없다’라는 이야기가 꼬리표처럼 붙어 다녔다. 배구팬들은 물론 주변 사람들도 표정에 관해 많이 이야기를 했다고. “표정이 좋으면 다른 것도 더 좋아진다면서요. 아직 많이 서툴지만 의식적으로 더 웃고, 더 좋아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라는 박정아. 확실히 예년에 비해 표정이 많이 다양해졌다고 얘기하자 더 노력하겠다며 웃는 모습은 의식하지 않아도 나오는 밝은 미소였다.
인터뷰를 마치며 박정아에게 은퇴 전에 이루고 싶은 목표를 물었다. “어디에 있든 제가 속한 팀 성적이 좋은 것, 그리고 제가 배구를 잘 하는 거요”라고 답한다.
‘아, 그리고’하면서 말을 덧붙였다. “제가 은퇴하겠다고 할 때 남들이 ‘조금 더 하지’ ‘그만 두는 게 아쉽다’라고 했으면 좋겠어요. 그만두지 말고 1년만 더 해달라고 붙잡히는 선수가 되고 싶어요.”
좋아하는 음식이요?
쉬는 날에는 보통 맛있는 음식을 먹고 숙소에서 쉰다는 박정아. 그래서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인지 묻자 쌀국수와 곱창을 좋아한다고 답했다. 그리고 덧붙여 모 프랜차이즈 주점 나가사키 짬뽕탕을 정말 좋아한다고. 같은 팀 김유리와 둘이 가서 짬뽕탕에 우동사리만 7번 정도 리필 했던 뒷얘기가 있었다고 한다. “눈치가 많이 보였지만 맛있게 많이 먹고 왔어요.”
라이벌? 우리는 동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박정아에게 김희진과 관계가 어떤지 묻는다고 한다. 박정아는 왜 사람들이 같은 팀 동료인 자신들을 라이벌로 묶는지 모르겠다고. “같은 팀인데 라이벌이 될 수 있나요? 많이 물어보시던데 사람들은 우리 사이가 안 좋다고 생각하나 봐요. 저희 사이 좋아요! 서로 의지도 하고. 제가 장난을 많이 치는데 언니가 착해서 다 잘 받아줘요.”
글/ 송소은 인터넷기자 사진/ 유용우 기자
* 배구 전문 매거진 <더스파이크> 1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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