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3월에 창단해 우승 6회, 준우승 3회라는 뛰어난 성적을 거두고 약 15년 만인 1998년 2월에 해체한 고려증권 배구단. IMF사태를 맞아 홀연히 사라진 고려증권, 짧지만 화려했던 남자 배구왕조, 그 마지막 우승 멤버들을 안산에 위치한 한 카페에서 만날 수 있었다.
제1장 전설을 기억하시나요?
고려증권 배구단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1983년 우철우 감독이 지휘봉을 잡고 류중탁, 이경석, 장윤창, 정의탁 등을 중심으로 창단한 고려증권은 제1, 2회 대통령배에서 우승을 이뤘다. 하지만 이후 스타 선수들을 대거 영입한 현대자동차써비스가 3회 연속 연달아 정상에 올랐다. 이에 1986년 진준택 감독이 새롭게 지휘를 맡았다. 고려증권은 1990년대 초반 서울시청에서 활약하던 이성희, 박삼용, 어창선을 차례로 영입하며 다시 우승 궤도에 올랐다. 고참급 선수들이 은퇴하면서 잠시 주춤했지만 이성희-박삼용 콤비를 중심으로 문병택, 박선출, 이수동 등이 힘을 내 1995~1996 슈퍼리그에서 우승을 거머쥐었다. 그러나 1997년 외환 위기로 인해 모기업인 고려증권이 부도가 났다. 배구협회가 출전비를 지원한 1997~1998 시즌을 마지막으로 팀은 해체되었다. 이날 모인 멤버들은 고려증권 마지막 우승의 주역들인 박삼용, 이성희, 문병택, 이수동이었다. 박삼용(상무 감독)은 문경에서, 이수동(개인 사업)은 대구에서, 문병택(KB손해보험 보상팀 과장)은 서울에서 각각 안산소재 원곡고등학교 코치로 있는 이성희를 찾아왔다.
명 세터를 이야기할 때 항상 빠지지 않는 이성희는 처음부터 주전은 아니었다. 고려증권 황금기를 이끈 선배 이경석이 버티고 있었다. 그러다 1993년 제10회 대통령배 최종결승전 상대인 현대자동차써비스와 경기 1차전에서 기회가 왔다. 세트스코어 1-1 상황에서 이어진 3세트, 고려증권은 3-14로 뒤지며 완전히 패색이 짙었다. 이때 이경석 대신 이성희가 교체 투입되며 상황은 극적으로 바뀌었다. 당시에는 사이드아웃제여서 서브권을 가진 상태에서 공격을 성공해야 득점을 올릴 수 있었다. 1점만 허용하면 세트를 빼앗길 절체절명 위기에서 듀스에 성공하더니 끝내 16-14 대역전극을 이끌었다. 이 경기를 계기로 이성희는 명실상부한 주전 세터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현대자동차써비스가 왕좌를 차지하던 시절, 고려증권은 팀 사정상 주전 선수들이 주 포지션이 아닌 다른 포지션으로 뛰어야 했다. 홍해천이 아포짓 스파이커, 장윤창이 미들 블로커, 정의탁이 윙스파이커를 맡아야 했다. 그러다 보니 팀 구성이 딱 떨어지는 맛이 없었다. 1991년 제 8회 대통령배 전국남녀배구대회 3차전에서 6전 전패라는 처참한 성적표를 받았다. 박삼용이 입단하며 윙스파이커 한 자리를 책임지면서 그제야 다른 선수들도 자기 자리를 찾았다. 장윤창이 아포짓스파이커로, 정의탁은 미들블로커로 자리를 잡았다. 이후 제1차 전국남녀실업연맹전에서 3전 전승을 거두며 1위로 발돋움 했다.
문병택과 이수동은 1993년에 입단했다. 문병택은 입단 첫해부터 주전으로 뛴 에이스였다. ‘흰머리독수리’ ‘백발 도사’라는 별명을 가진 이수동은 팀에 입단할 때는 백업 선수였다. 고려증권 입단 후 뒤늦게 기량이 만개하면서 파워풀한 스파이크를 꽂아내는 파이터로 유명세를 떨쳤다.
제2장 왜 강팀이냐고요?
현대자동차써비스에는 코트 위의 야생마 마낙길, 황금 손 김호철, 아시아의 거포 강만수, 임꺽정 임도헌 등 스타 선수들이 대거 포진했다. 고려증권은 개개인의 역량만 봐서는 절대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현대자동차써비스를 상대로 팽팽한 라이벌 관계를 이어갔다. 어떻게 강 팀이 되었을까?
박삼용은 선배들 때부터 현대자동차서비스와 라이벌 관계가 형성되었다고 기억한다. 상대가 현대라고 하면 더 이를 악물고 뛰었다고 답했다. 이성희는 “고려증권에 들어가서 처음 느꼈던 건 선수 개개인 자존심이 정말 강하다는 것이다. 다들 남의 것은 신경 쓰지 않고 본인이 해야 될 것만 정확하게 했다. 그게 조합이 되니까 강 팀이 될 수 밖에 없었다”라고 설명했다.
여기에 이수동은 “사실 (이)경석이 형과 (정)의탁이 형이 코트 밖에서는 엄청 자주 부딪쳤다. 그런데 경기에 들어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찰떡 콤비가 된다. 사생활과 운동을 별개로, 구분을 잘했다”라고 덧붙였다. 팀원 전체에 끈끈함은 없었지만 신기하게도 경기에 들어가면 본인이 할 것을 책임감 가지고 알아서 했다고. 이에 박삼용은 “그게 프로야, 프로”라며 맞장구를 쳤다. 이성희도 선배들을 보면서 많이 배웠다며 “내가 배구를 알기 시작한 게 고려증권에 와서다. 본인이 부족한 건 개인연습을 해서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걸 경기에 들어가서 해낸다. 정말 놀라웠다. ‘아, 이런 게 배구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라고 말했다.
이수동은 상무, 한국전력, LG화재(현 KB손해보험) 등 여러 팀을 전전한 경험이 있다. 그래서 고려증권이 다른 팀과 특별히 다른 점을 말할 수 있었다. “고려증권은 오직 배구에만 에너지를 쏟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서 강했던 거 같다. 어떤 팀은 아침을 먹고 운동 할 때까지 시간이 비면 그 동안 한숨 자고 운동을 하면 되는데도 잠을 못 자게 했다. 심지어 경기장에 가는 버스에서도 못 자게 했다. 운동을 잘 할 수 있게 몸을 만들어야 하는데 잠을 못 자게 하니까 피로가 쌓였다”라고 술회한다. “또 있다. 고려증권에서 기본기가 제일 좋기로 홍해천 형과 이재필 형이 손꼽힌다. 그런데 그 기본기 좋은 형들이 혼자 개인운동으로 기본기를 연습한다. 그걸 보고 이 팀이 이래서 강하구나 싶었다. 누가 안 시켜도 알아서 자기 몫을 다 하고 온다. 다른 팀은 개인운동 하라면서 코치가 따라가서 가르치더라. 그건 보충운동이지 개인운동이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고려증권이 주춤했던 때도 있었다. 1993년 이성희가 상무에 입대하고 난 직후 대회에서 준우승을 하더니 그 다음 대회부터는 4위 이하로 처지는 저조한 성적을 거뒀다. 1995년 6월 이성희가 복귀한 직후 있었던 전국체전에서 세트스코어 0-3으로 형편없이 지는 경기를 했다. 고려증권이라는 팀에 자부심이 있던 터라 이대로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팀원들과 다시 시작하자는 마음으로 의기투합을 해서 그때부터 엄청 운동했다. 고참들이 열심히 하면 후배들도 열심히 하겠지 싶어서, 아파도 참아가며 훈련했다. 특히 삼용이가 수동이를 웨이트 연습 시키고, 아프면 치료도 시키고. 그렇게 데리고 다니며 운동해서 끌어올렸다. 그때는 경기를 이겨도 내용이 안 좋으면 혼냈다. 긴장감이 필요했다. 게다가 병택이 동기들은 사고뭉치들이라 느슨해지면 안 되는 애들이었다” 이성희 말에 박삼용은 “얘들은 셀프 케어가 안돼”라며 맞장구를 쳤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고려증권은 1996년 다시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제3장 고려증권 브로맨스
이성희와 박삼용은 소문난 절친이다. 서울시청에 있을 때부터 형제처럼 함께 다녔다. 박삼용은 자신이 고려증권을 선택한 이유 중에 하나도 이성희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나하고 제일 잘 맞는 사람이 성희 형이다. 다른 사람들이 ‘너희들은 눈감고 해도 맞겠다’라고 할 정도였다. 실제로 대표팀에서 시험 삼아 눈감고 B퀵을 때렸는데 손에 정확히 맞아 들어간 적도 있다. 그 정도로 성희 형과 나는 잘 맞았다”
은퇴 후 호프집을 하던 박삼용은 GS칼텍스 감독을 제의 받았다. 처음 감독을 하는 터라 자신을 보완해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선배 이성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후배가 감독, 선배가 코치였으나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성희는 박삼용과 자신은 선후배지만 그 이상으로 친하게 지냈다며, 365일 중 300일은 같이 지냈다고 말했다.
여기에 이수동이 끼었다. 박삼용을 닮고 싶어서 같은 방을 썼다는 이수동. 운동할 때도, 사우나에 갈 때도, 술을 마실 때도 박삼용을 항상 따라다니며 함께 했다. “삼용이 형처럼 되고 싶어서 어디든 쫓아 다녔다. 심지어는 손도 잡고 다녔다. 친절한 삼용씨(웃음).” 박삼용이 자신이 가진 것을 친절하게 알려준 덕분일까 어느 날 갑자기 이수동은 마침내 빛을 보고 ‘백발 도사’가 되었다.
제4장 추억이 돼버린 고려증권
대한민국 남자배구의 한 획을 그은 고려증권. 그러나 IMF 외환위기에 모기업이 부도가 나면서 팀이 해체됐다. 이 얘기를 꺼내자 이수동이 “그 얘기 하자면 진짜 할말 많다”라며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고려증권 모기업에서도 배구단에 대한 애정이 컸다. 그래서 조건 없이 팀을 다른 기업에 양도하려 했다. 하지만 IMF 상황에서 팀을 양수할 기업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배구협회에서 1억 5천만 원 정도 금액을 지원해 그 해 슈퍼리그에 출전할 수 있었다. 문제는 거기서 왔다. 이후 몇몇 기업에서 인수 의사를 밝혔지만 협회에서 지원금을 양수기업에게 부담시키려 해 결국 무산됐다.
결국 팀은 해체되고 선수들은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 이성희는 독일 진출을 결정했다. 이성희는 “나 혼자 살러 간다고 오해할 수도 있지만 그 당시에 말도 안 통하는 나라에 가기가 쉽지 않았다. 내가 남아있으면 후배들 갈 길이 줄어드니까. 때마침 독일에서 제의가 와서 고심 끝에 가게 됐다”라며 그때를 회상했다.
당시 주장이었던 박삼용은 자유계약을 할지, 드래프트를 할지 결정해야 했다. “당시 협회에서 내놓은 안이 한 팀에서 2명씩 데려가는 드래프트였다. 그렇게 하면 10명은 구제할 수 있었다. 그걸 거부하면 자유계약으로 갈 수 있지만 자유계약으로 하면 다른 팀에 못 가는 선수가 많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후배들을 설득해서 드래프트를 했고, 나는 은퇴를 선언했다.”
각자 다른 팀으로 흩어지며 많은 것을 느꼈다고. 먼저 문병택은 “LG화재는 선수들이 단합이 잘 안 됐다. 고려증권은 선배들이 잡아주니까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데, LG화재는 각자 해야 했다”라고 밝혔다. 이어 이수동이 “고려증권은 그렇게 우승을 하고 잘 나가도 들뜨지 않았다. 2001년에 LG화재가 준우승을 한 적이 있다. 결승 경기가 남아있는데 이미 우승한 것처럼 들떠있더라. 솔직히 나는 결승에 안 가고 싶었다. 결승가면 안될 팀이었다. 아니나다를까 결승에서 완패했다”라고 말했다.
오랜만에 만났다는 이들은 당시를 회고하며 시간가는 줄 모르고 무용담을 쏟아냈다. 말속에는 사라져 버린 고려증권 팀에 대한 진한 애정이 담겨있었다. 팀은 비록 추억의 장으로 넘겼지만 고려증권 선수들이 가졌던 정신자세는 배구코트 곳곳에서 살아남기를 한 마음으로 바랐다.
후배들에게 전하는 말
박삼용 중계방송을 많이 하니까 요즘 선수들이 미디어를 의식해서 화려한 플레이를 너무 좋아하는 거 같다. 잘 받아야 잘 올리고 잘 때릴 수 있는데, 잘 때리는 것에만 너무 집중하지 않나 싶다. 물론 팬들이 그런 화려한 플레이를 기억하긴 하지만 화려함보다는 내실 있는 배구를 했으면 좋겠다.
이성희 프로에 있는 선수들이 좀 더 책임감 있게 운동 했으면 좋겠다. 너무 무성의하게 본인 기분에 따라 할 때가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책임감을 가지고 했으면 좋겠다.
문병택 자기가 하고자 해야 재미있게 할 수 있다. 아들이 배구를 한다. 아빠는 키가 큰데 자기는 작으니까 스트레스를 받는 거 같다. 자기 마음대로 안되면 힘드니까… 일단 키가 커야 한다.
이수동 즐기면서 하는 게 가장 좋다. 강제적으로 하지 말고 자기가 원해서 해야 한다. 실력이 없으면 즐길 수도 없지만(웃음) 나는 배구를 굉장히 하고 싶었다. 엘리트 코스를 밟은 선수가 아니기 때문에 최선을 다할 수 밖에 없었다. 본인이 의지를 가지고 즐기면서 하길 바란다.
글/ 송소은 기자 사진/ 유용우 기자
* 배구 전문 매거진 <더스파이크> 3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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