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막 전 미디어데이에 나서는 사령탑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같은 말을 반복한다. “올해는 정말 모르겠습니다.” 감독들 반응은 매 시즌 비슷하다. “누가 우승해도 이상하지 않은 시즌”은 빠짐없이 등장한다. “모두가 우승후보”와 “우리를 제외한 모든 팀들의 전력이 좋아졌다” 역시 단골 메뉴이다. 누가 봐도 1강으로 꼽히는 팀 수장의 “우리 목표는 플레이오프 진출”도 빼놓을 수 없다.
워낙 비슷한 말들을 해마다 듣다 보니 팬들의 눈썰미도 날카로워졌다. 이 책을 읽고 있는 V-리그 열성 팬이라면 도발을 싫어하는 소심한 감독들의 상대를 위한 의례적인 말이라는 것을 대번에 눈치 챘을 것이다.
지난 시즌 미디어데이 분위기도 비슷했다. 하지만 6개월이 지난 현재 시간을 돌이켜보면 당시 감독들의 말은 결코 엄살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촘촘하게 늘어선 순위표와 수많은 풀 세트 승부는 ‘역대급 시즌’이라는 평가로 이어졌다. 이제 막 레이스를 마쳤지만 “다음 시즌에는 더욱 치열할 것”이라는 때 이른 예상도 흘러나온다.
더 이상 1팀 독주는 없다
남자부는 그 동안 특정 팀들이 타이틀을 나눠먹는 경향이 강했다. 이들이 여름 내내 흘린 땀을 폄하할 수는 없지만 이와는 별개로 ‘뻔한 승부로 리그를 지켜보는 재미가 반감된다’라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삼성화재는 가히 독보적이었다.
1995년 창단한 삼성화재는 모기업의 화끈한 지원을 등에 업고 수준급 선수들을 싹쓸이하며 순식간에 강호로 등극했다. 실업시절 수립한 77연승은 이들의 아성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쉽게 설명해준다. 2005시즌 V-리그 출범 후에도 삼성화재는 강했다. 2007~2008시즌부터 2013~2014시즌까지는 7시즌 연속 챔피언 결정전 우승의 금자탑을 쌓았다. 배구는 물론 국내 4대 프로스포츠(야구·축구·농구·배구)로 범위를 넓혀도 전례가 없는 일이다.
영원할 것처럼 느껴졌던 삼성화재의 아성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2015~2016시즌부터다. 계속된 호성적으로 신인 드래프트 순위가 뒤로 밀리면서 수준급 선수들을 데려오지 못한 삼성화재는 서서히 그 한계를 드러냈다.
그 해 처음 챔피언결정전 진출에 실패한 것은 추락의 시작에 불과했다. 삼성화재는 2016~2017시즌 정규리그에서 18승 18패(승점 58)로 4위에 머물면서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삼성화재가 봄 배구에서 자취를 감춘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봄만 되면 이슈의 중심에 서며 다른 팀들로부터 질투 어린 시선을 받았던 삼성화재는 차려진 잔칫상을 먼발치에서 지켜보는 익숙지 않은 경험을 했다.
신흥 강호로 떠오른 OK저축은행도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세계적인 외국인 선수 시몬과 함께 두 시즌 연속 왕좌에 오른 OK저축은행은 36경기에서 7승을 거두는 데 그치며 7개팀 중 최하위로 시즌을 마쳤다. 최초 선발한 외국인 선수 롤란도 세페다(쿠바)가 시즌 전인 지난해 7월 핀란드에서 열린 월드리그에 참가했다가 성폭행 사건에 연루돼 구상이 꼬인 것이 결정적이었다.
대체 외국인 선수의 부진과 국내 선수들의 계속된 부상은 직전 시즌 챔피언을 꼴찌로 몰아넣었다. “향후 몇 년은 OK저축은행이 리그를 주도할 것”이라는 평가 역시 결과적으로는 어긋난 예상이 됐다.
맥 빠진 경기가 사라진 것은 여자부도 마찬가지다. 흥국생명과 IBK기업은행은 막판까지 치열한 타이틀 경쟁을 벌이며 분위기를 달궜고 꼴찌 한국도로공사는 11승이나 챙겼다.
KGC인삼공사의 유쾌한 반란은 신선한 재미를 선사했다. 2013~2014시즌 3위로 플레이오프를 밟은 KGC인삼공사는 2014~2015시즌 30경기에서 8승(22패)에 그쳤다. 2015~2016시즌은 더욱 좋지 않았다. 전년보다 1승이 모자란 7승(23패)만을 올렸을 뿐이다. 3년 연속 꼴찌 후보로 꼽히던 KGC인삼공사는 올 시즌 반전 드라마에 성공했다. 서남원 감독 체제로 새롭게 시작한 KGC인삼공사는 목표로 했던 패배의식 떨치기는 물론 3위로 봄 배구까지 맛봤다.
사령탑 교체와 FA 영입, 이미 시선은 내년에
빛이 있으면 어둠도 존재한다. 이는 불변의 이치다. 성공을 거둔 팀들이축배에 젖어있는 사이, 목표 달성이 무산된 이들은 내년 시즌을 위한 체질 개선에 착수했다.
변화의 시작은 감독 교체다. 수장을 바꾸는 것이 능사는 아니지만 반전을 꾀하려는 팀들에게 매력적인 카드인 것은 분명하다.
남자부에서는 한국전력, 삼성화재, KB손해보험이 사령탑을 바꿨다. 공교롭게도 3개팀 모두 지금까지 한솥밥을 먹었거나, 과거 함께 했던 ‘내부자들’에게 지휘봉을 건넸다.
한국전력 새 수장인 김철수 감독은 뼛속까지 한전맨이다. 실업배구 및 V-리그 초창기까지 활약한 그는 한국전력에서만 뛰었다. 은퇴 후인 2008년부터 지난 시즌까지 코치를 맡았는데, 물론 한국전력에서다.
임도헌 전 감독과 작별한 삼성화재는 신진식 감독에게 손을 내밀었다. 현역 시절 공격과 수비 모두 완벽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던 그가 지도자로서도 삼성화재의 부흥을 이룰지 벌써부터 기대가 쏠린다.
KB손해보험의 선택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러 이름값이 있는 인사들을 후보군에 올려놓은 채 주판알을 튕기던 KB손해보험은 지난 시즌까지 수석코치로 강성형 전 감독을 보좌했던 권순찬 수석코치를 감독으로 선임했다. 앞선 두 팀과 마찬가지로 팀 내부사정에 정통하다는 것이 그 이유다.
전력 강화를 위한 또 다른 방법은 자유계약선수(FA)의 영입이다. FA는 보상선수를 내줘야 하는 출혈을 감수할 수만 있다면 전력이 부족한 포지션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가장 빠른 방법이다.
남자부 최대어는 한국전력 왼손 공격수 서재덕이다. 서재덕은 올 시즌 전광인, 바로티와 함께 삼각편대를 형성하며 팀의 봄 배구를 진두지휘했다. 36경기(152세트) 410점에서 알 수 있듯 공격력은 이미 검증을 마쳤다. 외국인 선수가 가세하면서 윙스파이커로 뛰고 있지만 상황에 따라 아포짓 스파이커로 이동 가능하다는 점은 그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이다.
우리카드 미들블로커 박상하도 매력적인 카드다. 때 마침 찾아온 V-리그의 중앙속공수 품귀 현상으로 가치가 더욱 올라갔다. 게다가 군 문제까지 해결해 전력 공백을 걱정할 필요도 없다. 두 선수가 소속된 팀인 한국전력과 우리카드는 “반드시 잔류시키겠다”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지만 실제로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일찌감치 FA시장 불간섭을 선언한 우승팀 현대캐피탈과 국내 선수 자원이 풍부한 대한항공을 제외한 나머지 팀들은 모두 FA선수 영입에 따른 전력 보강에 긍정적인 자세이다. 특히 삼성화재와 OK저축은행이 더욱 적극적이라는 후문이다.
여자부에서는 김희진 박정아(이상 IBK기업은행)가 내릴 결정에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영향력만 놓고 보면 남자 FA 선수들 이상이다. 이들이 어느 팀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리그 판도가 완전히 요동치기 때문이다. 두 선수가 IBK기업은행 잔류를 선택한다면 내년에도 지금의 흐름과 큰 변화가 없을 공산이 크다.
하지만 한 명이라도 새로운 환경으로 길을 나선다면 기존의 생태계는 완전히 무너지게 된다. 다양한 포지션 소화가 가능한 김희진의 경우 현재 최고액 선수인 양효진(현대건설)이 받던 3억 원을 훌쩍 넘어 여자부 최고 연봉 기록을 갈아치울 것이라는 게 배구계 시장에서 나오는 평가이다. 현대건설 베테랑 세터 염혜선과 흥국생명을 정규리그 1위로 올려놓은 세터 조송화, 미들블로커 김수지 또한 알짜배기 FA로 손색이 없다.
또 다른 변수는 외국인 선수 트라이아웃이다. 감독을 교체할 명분 혹은 계획이 없고, FA로 선수를 데려올 의지가 없는 팀이라면 이 대목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V-리그에서 외국인 선수가 차지하는 비중은 무척 크다. 우승팀 OK저축은행이 꼴찌로 내려앉고, 한국도로공사가 시즌 초반 연패를 거듭한 것은 외국인 선수 농사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 위협적일 것 같지 않았던 외국인 선수 대니를 앞세워 챔프전을 제패한 현대캐피탈 케이스는 결코 흔하지 않다.
상황이 이러니 각 구단 사령탑들이 5월 중순경 열리는 트라이아웃에 모든 신경을 쏟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두 시즌째를 맞는 남자부나, 세 번째 외국인 쇼케이스를 치르는 여자부 모두 지난해에 비해 트라이아웃 참여선수가 질적으로 풍성해졌다. 유럽 일부 리그의 투자가 위축되고 심지어는 월급이 밀리는 사태까지 발생하자 수준급 선수들이 한국으로 눈을 돌린 덕분이다.
명단을 확인한 한 배구 관계자는 “지난해보다 좋은 선수들이 많다. 일부는 자유계약 시절 때 뽑던 선수들과 비슷한 수준”이라면서 “하위권 팀들이 지명 우선순위를 쥐게 돼 수준급 선수를 데려온다면 전력 상승의 폭은 상당히 클 것”이라고 말했다.
새로운 감독이 불러올 새 바람, FA시장에 따른 국내선수의 이동, 수준 높은 외국인 선수들의 참여로 다음 시즌은 여느 시즌 보다 더욱 흥미로운 레이스가 전개될 것으로 보여, 2017~2018 시즌을 기다리는 팬들을 한층 기대에 부풀게 할 것으로 보인다.
글/ 권혁진 뉴시스 기자
사진/ 더스파이크
(본 기사는 더스파이크 5월호에 게재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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