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오른 배구 실력에 어여쁜 얼굴, 꾸밈 없는 성격까지. 신이 있다면 이렇게 불공평해도 되는가 하는 의문이 들게 하는 선수. 팀을 옮기고 나서 주목도가 더 높아진 윙스파이커 고예림(23)이다. 2017~2018시즌을 앞두고 IBK기업은행에 보상선수로 지명된 고예림은 새 팀에서도 금세 적응을 마쳤다. 친정 팀 한국도로공사와 V-리그 첫 경기(10월 22일)를 치른 그를 지난 10월 24일 용인에 위치한 IBK기업은행 연수원에서 만났다.
새 둥지에 적응하기까지
비시즌 여자배구팀에서는 유독 선수 이동이 많았다. 염혜선(현대건설→IBK기업은행), 김수지(흥국생명→IBK기업은행), 김해란(KGC인삼공사→흥국생명), 황민경(GS칼텍스→현대건설), 박정아(IBK기업은행→한국도로공사)까지 다섯 명이 FA 자격을 얻어 팀을 옮겼다. 이들뿐만이 아니다. 다시 다섯 명 유니폼이 바뀌어야 했다. 각 팀에서 보호선수 5명(FA 영입 선수 포함) 안에 들지 못한 선수 중 1명은 보상선수로 지명돼야 했다. 고예림도 그중 한 명이었다. 박정아 보상선수로 선택됐다.
이정철 IBK기업은행 감독은 “망설일 필요 없었다. 무조건 고예림이었다”라고 설명했다. 그럴 것이 고예림은 지난 시즌 프로 데뷔 후 최고 기록을 선보였다. 출전 시간과 득점 모두 대폭 늘어났다. 29경기 102세트에 출전해 276득점(공격 성공률 34.98%)을 따냈다. 프로 첫 해였던 2013~2014시즌에 23경기 54세트에 나와 90득점(공격 성공률 36.46%)을 기록했던 것과 비교하면 뚜렷한 성장이다. 전체 2순위로 도로공사에 입단해 신인상까지 거머쥔 그는 무럭무럭 자라 지금의 고예림이 됐다. 프로 첫 발을 뗀 순간부터 쭉 도로공사에 몸담았던 고예림. 그는 그렇게 IBK기업은행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순간. 보상선수 지명 소식을 들었을 때 마음은 어땠을까. “처음에는 그냥 안 믿겼어요. 진짠가? 내가 진짜 가는 건가? 싶었어요. 실감이 안 나서 아무렇지도 않더라고요. 김천(도로공사 연고지) 숙소에서 언니들 운동할 때 저는 일주일 동안 계속 짐을 쌌거든요. 그제서야 와 닿았어요. 섭섭하기도 하고 많은 생각이 들었어요.”
동고동락하며 정든 동료들과 이별은 힘들었다. “언니들이 애써 밝은 표정으로 가지 말라고 장난쳐주더라고요. 새 팀 가서도 잘하라고 응원도 해주고요. 마지막 날 다같이 밥 먹고, 케이크에 꽂은 촛불도 불었어요. 조촐하게 송별회를 했어요. 동료들과 정이 많이 들었는데 떠나야 한다는 게 제일 마음 아팠어요.”
IBK기업은행에서 새 삶이 시작됐다. 밝은 성격을 지닌 고예림이지만 그도 처음엔 헤맸다. “적응이 안 됐어요. 너무 새로운 환경이니까요. 숙소에 있어도 우리 집이 아니라 친구 집 온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웃음). IBK에 오니 (김)미연 언니랑 (이)고은이가 도로공사에 있던 선수들이라 다행이었어요. 근데 미연 언니는 그때 대표팀에 가 있어서 못 봤어요. 그래도 동갑내기인 노란이랑 고은이가 매일 붙어서 챙겨줘서 고마웠어요(참고로 고예림과 노란은 94년생, 이고은은 빠른 95년생이다). 훈련 힘들 테니 잘 버티라고 조언도 해줬어요. 근데 진짜 운동 강도가 높더라고요. 아무래도 훈련 스타일이 달라지다 보니 적응하는 데 시간이 더 걸린 듯 해요.”
IBK기업은행 동료들은 고예림을 살갑게 반겨줬다. 고예림도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던 허전함을 서서히 잊었다. “사실 훈련 힘든 건 어느 팀이나 비슷해요. 다른 면에서 힘든 게 있었어요. 여기 언니들 진짜 좋고 엄청 잘해주거든요. 근데 도로공사 언니들은 몇 년 동안 같이 있었으니까 제 눈빛이나 표정만 봐도 제 기분을 딱 알았어요. 먼저 와서 챙겨주고 위로도 해주고 그랬죠.
IBK기업은행에서는 초반에 힘들었을 때 누구에게 마음을 털어놓고 이야기를 해야 할 지 몰랐어요. 그래서 고민이었죠. 하지만 팀도 상황도 다 바뀌었잖아요. 제가 맞춰가야 하는 부분이고요. 이겨내기 위해서 팀원들과 더 오래 대화하려 하고, 같이 있는 시간도 늘리려고 했어요. 빨리 친해지면 해결될 문제니까요. 이제는 제법 많이 친해졌어요. 아주 좋아요.”
5년차 고예림의 성장기
이정철 감독과 첫 만남에 관해 묻자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냥 너무 어려웠어요. 감독님한텐 뭔가 무서운 아우라(?)가 있어요. 엄하시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인지 더 그랬어요. 지금은 처음보다는 괜찮은데 아직도 편하거나 그렇진 않아요. 감독님이 빨리 적응해서 IBK기업은행이란 팀에 젖어 들라고 하셨어요.”
고예림이 본 IBK기업은행은 어떤 팀일까. “무척 밝아요. 평소에도 그렇고, 운동할 때도 똑같아요. 다들 자신감이 있는 것 같아요. 이길 수 있고, 우승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요. 그만큼 훈련을 열심히 하고요. 강한 팀만의 분위기 같은 게 보여요. 디펜딩챔피언다웠어요.”
시즌 초반이지만 고예림은 호평을 받고 있다. 실력이 향상됐다는 평가가 다수다. 비시즌 고예림은 얼마나 많은 땀을 흘린 걸까. “주전을 꿰차야겠단 것보다는 제 자신을 더 단단하게 만들려고 했어요. 장점은 살리고 단점은 최대한 보강해서 더 나은 선수가 되려고요. 특히 리시브를 완벽하게 하고 싶었어요. 실력은 늘었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보다는 자신감을 얻은 것 같아요. 여유가 조금씩 생기니까 좋은 플레이가 나오는 듯 해요. 그래서 주위에서 잘하고 있다고 해주시는 게 아닐까요?”
고예림이 말한 ‘자신감’의 원천에 관해 질문을 던졌다. 친정 팀이었던 도로공사 김종민 감독 이름이 나왔다. “신입생 때부터 수비가 부족하다는 말을 자주 들었어요. 마음 속에 항상 불안감이 있었거든요. 근데 지난 시즌에 그걸 극복한 계기가 있었어요. KGC인삼공사와 경기였는데요. 제가 리시브 실패를 진짜 많이 했는데도 김종민 감독님께서 저를 다른 선수로 교체하지 않으시더라고요. ‘실수하더라도 괜찮다. 지금 이겨내야 한다’라고 하시면서 저를 믿어주셨어요. 제가 진짜 못했는데도요.
그 믿음 덕분에 스스로 이겨내는 방법을 찾은 것 같아요. 정면돌파 한 거죠. 경기 중에 흔들릴 때면 그때가 생각나요. 비록 감독님은 저를 보호선수로 묶지 않으셨지만(웃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걸 알아요. 감독님을 이해해요. 서운하거나 안 좋은 감정은 없어요. 또 다른 좋은 팀에서 뛰어볼 기회가 생긴 거니까요. 긍정적으로 여기고 있어요.”
IBK기업은행은 올해 천안 넵스컵 대회에서 도로공사와 맞붙어 세트스코어 0-3으로 패했다(9월 16일). 약 한 달 뒤인 10월 22일 V-리그에서 첫 맞대결을 가졌다. 이번엔 3-2로 승리했다. 오랜만에 김천으로 향한 고예림 감회는 남달랐다.
“오로지 이겨야겠다는 생각만 들었어요. 컵 대회 때는 기분이 묘했는데 이제는 IBK 선수로 적응해서인지 친정보다는 상대 팀으로만 보이더라고요. 물론 아직도 다들 좋아하는 언니, 동료, 선생님들이지만요. 승부는 냉정하게 해야죠. 근데 확실히 IBK 유니폼 입고 김천실내체육관에 들어가니 어색했어요. 홈이 아니라 원정 대기실을 쓰는 것도 무지 낯설었고요(웃음).”
이번 역은 고예림, 출구는 없습니다
도로공사 시절 고예림은 문정원, 최은지와 함께 속된 말로 ‘꼴통 3인방’이라 불렸다. 장난기가 많고 활발한 성격 때문이었다. 고예림도 부정하지 않았다. “항상 어딜 가나 ‘돌+아이’같다는 소릴 들어요. 4차원에 말도 많고 시끄러워서요. 여기서는 제 모습이 다 나오진 않았어요. 이미지 관리하는 건 아니고요(웃음). 곧 들통날 거예요. 미연 언니랑 있으면 본 모습이 나와요. 언니랑 저는 성격이 완전히 똑같아요. ‘복사+붙여 넣기’예요. (김)희진 언니랑 (염)혜선 언니도 진짜 장난꾸러기고요. 다들 밝아서 좋아요.”
고예림은 인터뷰 내내 밝은 미소가 돋보였다. 사진 촬영 때도 마찬가지였다. 손발이 오그라들 것 같은 포즈나 표정을 요구해도 서슴없이 받아들였다. 고예림만의 매력으로 소화해냈다. 그는 워낙 긍정적인 성격이라며 웃어 보였다. “전 되게 단순해서요. 가끔 기분이 안 좋거나 화날 때 있잖아요. 그럼 그게 오래 못 가요. 몇 분 지나면 제가 화났다는 걸 잊어버려요. 그래서 기분이 금방 풀려요. 운동선수는 이런 성격이 좋은 거 같아요. 제가 봐도 저는 참 밝아요.”
그는 옐림, 밀가루 공주, 고공주 등 여러 별명을 가졌다. IBK기업은행에서는 ‘옐림’으로 불린다. 닮은 꼴 연예인도 있다. 씨스타 출신 가수 겸 배우 다솜 씨다. “닮았다는 말을 진짜 많이 들어요. 최근 종영된 드라마(언니는 살아있다)에서 다솜 씨가 악역을 맡아 엄청 열연했다면서요. 그래서인지 요즘 다솜 씨 이야기를 더 자주 들어요. 저는 드라마를 잘 못 봤거든요. 예쁜 연예인 닮았다고 해주시니까 감사해요. 근데 진짜 닮았어요? 저는 잘 모르겠어요.”
‘예쁘다’라는 말. 고예림은 아마 귀가 닳도록 들었을 것이다. 그런 칭찬을 자주 들으면 어떤 기분일까. 기자는 이번 생에 느껴보지 못 할 그 기분, 고예림에게 물었다. “다들 예뻐해 주시니까 너무 감사하죠. ‘내가 진짜 예쁜가?’ 싶기도 해요. 아, 저는 샤워하거나 세수하고 난 뒤에 좀 예뻐 보이더라고요. ‘어? 오늘 좀 괜찮네?’ 싶어요. 기자님도 그러시죠? (염치 없지만..네..)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 근데 자고 일어나서 거울 보면 또 얼굴이 다 망가져있잖아요. 엄청 웃겨요.”
고예림은 싱글벙글 웃으며 ‘밀가루 공주’라는 별명에 대해서도 들려줬다. “제가 밀가루 음식을 진짜 좋아해요. 별명이 밀가루 공주인 이유가 알고 보니 피부가 하얘서가 아니었다! 밀가루를 좋아해서였다! 면 요리 정말 좋아하고요. 이정철 감독님이 처음에 저를 보시곤 살을 좀 찌우라고 하셨거든요. 라면 먹어도 된다고요. 그래서 신났어요. 옆에 지나가던 고은이가 ‘감독님 저는요?’ 했더니 바로 ‘넌 안돼~먹기만 해 아주!’라고 하셔서 다같이 웃었어요. 살 찌우는 것도 스트레스라고 하던데 저는 아무 생각이 없어서 괜찮아요. 살이 찌는가 보다~ 하는 거예요.”
평소 쉬는 날엔 무얼 하며 보낼까. 고예림에겐 취미 생활도 특별한 무언가가 있을 것만 같았다. “외출 받으면 필요한 거 사러 나가고요. 영화도 자주 봐요. 여유 있게 시간 보내는 걸 좋아해요. 한강 가서 바람 쐬는 것도 정말 좋고요. 평범하죠? 외박 받으면 항상 집으로 가요. 시즌 중엔 자주 못 가니까요. 집이 인천 송도라서 숙소에서 한 시간 정도 걸려요.”
‘초심’과 ‘헌신’을 말하다
누구나 한 번쯤은 슬럼프를 겪는다. 고예림은 자신만의 극복 방법을 터득했다. “처음엔 계속 ‘아, 진짜 안 된다’, ‘이제 어떡하지?’하고 불안해했어요. 나중에는 모든 생각을 내려놨어요. 제가 학생 때 배구 가르쳐주신 선생님이 ‘잘 안 될 때는 배구를 처음 시작했을 때로 돌아가라’고 하셨거든요. 오늘 막 배구를 시작한 사람처럼 작은 동작 하나도 놓치지 않는 거예요. 너무 당연하게, 아무렇지 않게 했던 자세를 일일이 신경 쓰면서 해요. 플레이뿐만 아니라 마음가짐에서도 초심을 찾으려 하고요. 그럼 점점 제 리듬을 찾게 되더라고요.”
작은 것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아서일까. 고예림은 기본기가 좋다는 평가를 자주 듣는다. 그는 “운동 신경이 좋고 센스 있다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더 노력해야죠”라며 겸손히 답했다.
올 시즌 고예림은 주전 경쟁에서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했다. 뿌듯하면서도 부담이 느껴질 법했다. “경기에 출전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진 않아요. 완전히 제 자리라고 생각하진 않거든요. 누구든 저보다 잘하면 그 선수가 저 대신 뛰게 될 거예요. 제가 못하거나 흔들리면 교체될 거고요. 또, 저 말고도 경기에 나오고 싶은 선수들이 얼마나 많겠어요. 근데 제가 들어가서 책임감 없이 하는 건 진짜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더 열심히 하게 돼요. 잘하려 하고요.”
굳건히 의지를 다진 고예림은 시즌 초반 IBK기업은행에서 박정아 공백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조화를 잘 이뤘다. 아포짓 스파이커 김희진, 윙스파이커 메디와 함께 IBK기업은행의 새로운 삼각편대로 떠올랐다. 리시브에도 힘쓰고 있는 그는 7경기 31세트를 치르며 리시브 점유율 28.3%, 성공률 49.69%로 훌륭한 성적을 냈다. 공격에서는 점유율 22.3%, 성공률 34.7%를 기록했다. 꼭 필요할 때 알맞게 득점을 보탰다.
“정아 언니만큼 잘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저는 공격에 욕심내지 않으려 해요. 저 말고도 공격할 수 있는 선수가 많잖아요. 대신 제가 뒤에서 리시브 잘 받아주고, 공 잘 올려줘야죠. 그래야 언니들이 더 공격적으로 플레이를 할 수 있으니까요. 상대 블로커가 언니들 쪽을 견제하다 보면 저한테도 공격 기회가 오고요. 수비 쪽으로 더 열심히 가담해주려 해요. 무조건 공격만 고집하는 것보다는 뒤를 든든히 받쳐주고 싶어요.”
올 시즌 우승 등 팀 성적 외에 개인적으로 달성하고 싶은 목표가 있을까. “한 번도 트리플크라운(한 경기 내에서 후위공격, 서브, 블로킹 각 3개 이상)을 못해봤거든요. 어렵겠지만 해보고 싶어요. 제일 취약한 건 블로킹이에요. 하지만 못하리란 법도 없으니까 열심히 연습해볼게요. 제가 트리플크라운 달성하면 팀도 승리하겠죠? 진짜 트리플크라운 성공하면 기자님한테도 커피 하나 딱 쏠게요! 한 잔 사드릴게요~!”
즐겁게 웃고 떠들다 보니 어느덧 인터뷰 막바지에 다다랐다. IBK기업은행 고예림으로서 각오 한 마디로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새 팀에 왔으니 더 새로운 모습 보여드리려고 노력 중이에요. 목표는 당연히 챔피언결정전까지 우승하는 거고요. 항상 성실한 마음가짐으로 임할게요. 열정적으로 최선을 다하는 플레이 보여드리겠습니다.”
글/ 최원영 기자
사진/ 문복주 기자
(본 기사는 더스파이크 11월호에 게재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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