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학교에 희미하게 들려오는 기합소리. 체육관에서는 한겨울 추위를 잊은 채 앳된 외모의 선수들이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갑작스레 등장한 카메라를 발견하고 놀란 것도 잠시, 코트 위에 선 그들은 영락없는 ‘배구선수’였다. 코트 위에서 바쁜 건 그들의 몸만이 아니었다. 때려! 수비해!를 끊임없이 외치며 파이팅을 불어넣는다.
경기도 수원 장안구에 자리한 수일여중은 1987년 배구부를 창단한 이래 꾸준히 성장하고 있는 ‘배구 명문학교’다. 안산 원곡중학교와 경기도내 오랜 라이벌 관계로 선의의 경쟁을 펼치고 있다. 지난해 열린 제47회 전국소년체육대회(이하 소년체전) 경기도 대표 1차 선발전에서 원곡중학교에 짜릿한 역전승을 거두며 당당히 1위를 차지했다. 수일여중은 오는 3월로 예정된 2차 선발전까지 우승하면 소년체전 출전권을 얻게 된다. 2018년, 소년체전 4강을 목표로 이른 아침부터 운동에 열중하고 있는 수일여중 선수들을 만나봤다.
포기를 모르는 선수로 키우고 싶어요
수일여중 문혜숙(38) 코치가 그리는 수일여중 배구부는 포기하지 않는 팀, 끝까지 해내는 팀이다. 문혜숙 코치는 이를 위해 기술, 체력훈련과 함께 멘탈 관리에 역점을 두고 있다. 문 코치는 특히 선수들에게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라는 말을 강조한다.
“한 번 뛸 거 열 번 뛰고, 한 번 넘어질 거 열 번 넘어지면 결국 해낼 수 있다는 점을 훈련을 통해 직접 느낄 수 있게 해주고 있어요.”
코치로서 가장 보람을 느끼는 순간은 역시 선수들의 성장을 옆에서 지켜볼 때다. “아이들이 그동안 준비했던 걸 경기에서 해내면 정말 소름 돋을 정도예요. 이 맛에 계속 지도자를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우리 선수들이 신장이 뛰어난 편이 아니라서 블로킹 위주로 훈련했는데, 작년 경기에서 그 부분이 잘 풀려서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운동이 끝나고 나니 문 코치의 표정에서 엄격한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인터뷰를 어색해하는 선수들에게 “대답 잘 해. 잘 해야 다음에 우리가 또 하지”라며 장난기 가득한 말을 건네기도 했다.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문혜숙 코치가 인터뷰 하는 내내 아이들은 부담스러운 눈빛을 마구 보냈다.
문 코치는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종종 특별한 이벤트를 준비한다고 한다. “가끔씩 회식을 할 때도 있고, 직접 김밥이나 만두를 만들어 주기도 해요. 노래를 틀어놓고 코트에서 춤을 출 때도 있어요.”
아쉽게도 이 날 수일여중 선수들의 춤사위를 보지 못했다. 문 코치는 “할 땐 하고 놀 땐 놀 줄 아는 선수가 돼야 한다”라며 “그래야 프로선수가 되고 난 후에도 잘 적응하고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수일여중의 속사정
수일여중은 여느 고등학교 배구부 못지않은 탄탄한 선수층을 보유하고 있다. 선수가 17명이어서 자체적으로 연습경기가 가능하다는 게 장점이다. 그렇다고 단점이 없는 건 아니다. 문 코치는 “한 사람씩 집중 지도를 해줄 수 있는 시간은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다”라고 고민을 토로했다. “공을 한 번 때리고 나서 다음 차례까지 기다리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다방면으로 연구하고 있어요. 학기 중에는 학교 수업을 모두 듣고 오후 5시나 돼야 운동을 할 수 있어서 운동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하거든요. 앞으로는 학교 기숙사도 사용할 수 없다고 해서 고민이 많아질 수밖에 없더라고요. 가까이 사는 아이들은 그나마 낫다고 해도, 멀리서 다녀야 하는 아이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문혜숙 코치의 표정에 근심이 가득했다. “좋은 선수로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환경적인 부분에서 뒷받침이 돼야 가르치는 지도자나 운동하는 선수 모두 운동에만 집중할 수 있을 텐데, 점점 운동 외적인 것들도 신경 써야 하는 게 늘어나다 보니 머리가 아프네요.”
문혜숙 코치의 고민은 이뿐만이 아니다. “한 경기당 뛸 수 있는 사람의 수는 정해져 있는데, 우리는 선수가 많다보니 그만큼 출전할 수 있는 기회가 적을 수밖에 없어요. 연습만큼 중요한 게 실전 경험인데, 선수가 많으니까 직접 경기를 뛸 기회가 적잖아요. 수일A, 수일B처럼 두 팀으로 나눠서 대회에 참가하고 싶다고 얘기는 꺼내봤는데, 글쎄요. 아직 명확한 답변을 받지는 못했어요.”
5개월차 병아리부터 6년 경력 베테랑까지
2018년 수일여중에 새로 입학한 새내기만 7명이다. 이 중에는 배구를 시작한지 이제 막 5개월에 접어든 햇병아리 선수도 있다. 아직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은 서예진(13)은 184cm로 팀 내 최장신이다. 그는 국가대표 미들블로커를 꿈꾸며 수일여중을 찾아왔다고 한다. 선수라는 호칭이 어색하기만 한 서예진. 코트에서 한 발 물러난 곳에서 기본기를 다지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포기하지 않는 선수가 되고 싶어요!” 서예진 선수의 당찬 포부였다.
괄목상대. 문혜숙 코치는 김보빈(14)을 이 한 마디로 설명했다. 김보빈은 배구공을 잡은 지 이제 갓 1년을 넘겼다. 하지만 선수로서의 끈기와 의욕은 여느 베테랑 못지않았다.
김보빈은 “이제 중학교 2학년 올라가요. 포지션은 미들블로커고, 키는 175cm예요”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연습할 때나 경기할 때 코치님이 말씀해주신 걸 생각하면서 공을 때리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김보빈이 느끼는 수일여중은 어떨까. “동생들이랑 만난 지 얼마 안 됐는데 금방 친해져서 너무 좋아요. 학교 다닐 때는 같은 반 친구들이랑 놀 수 있어서 재밌고 운동할 때는 언니동생들이랑 같이 배구할 수 있어서 좋아요. 둘 다 재밌어요(웃음).”
김보빈은 앞으로의 목표에 대해 “김연경 선수보다 더 멋진 선수가 되는 게 꿈이에요. 완전 멋진 국가대표 미들블로커가 되고 싶어요!”라며 환한 미소를 보였다.
부모님의 권유로 배구를 시작한 김세빈(13)은 중학교 생활에 열심히 적응하는 중이다. 김세빈의 든든한 지원군은 단연 부모님이다. 한국전력 사령탑을 맡고 있는 김철수 감독은 아버지로서, 배구 선배로서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고 한다.
기자가 자기소개를 부탁하자 “13살, 아니 이제 14살 중학교 1학년 김세빈입니다. 키는 177cm고 윙스파이커예요”라며 아직은 중학생이라는 게 어색한 듯 웃어보였다.
중학교에서의 생활에 대해 “초등학교 때 보다 운동하는 시간이 늘어나서 조금 힘들긴 해요. 그런데 힘들다고 해서 목소리가 작아지거나 기합을 안 넣거나 하지는 않아요. 다 똑같이 힘드니까요”라며 의젓한 모습을 보였다.
김세빈은 자신의 장점으로 큰 키를 꼽았다. “저는 키가 커서 블로킹을 잘해요. 근데 아직 수비가 조금 부족한 것 같아요. 매번 경기할 때마다 떨지 않고 잘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어요. 경기하다가 한 번씩 블로킹 성공하면 기분이 진짜 좋아요.”
팀의 맏언니를 맡고 있는 김가영(15)은 초등학교 4학년 때 배구를 시작했다. 높은 점프력을 무기로 에이스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3학년 윙스파이커 김가영입니다. 제 키는 172cm예요.” 팀 내 라이벌을 묻는 질문에 “1학년 세빈이도 윙스파이커인데 공격도 잘 하고 저보다 키가 커요. 경기를 뛸 수 있는 인원은 정해져 있잖아요. 그래서 저는 세빈이를 라이벌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김가영은 “운동할 때 정신력이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그래서 항상 기합도 많이 넣고 소리도 크게 지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라며 의젓한 모습을 보였다. 이런 그도 힘들 때면 부모님 생각을 한다고 한다. “솔직히 운동이 힘들 때도 있는데 그때마다 부모님 생각하면서 이겨내고 있어요. 엄마가 가끔 학교에 오셔서 안아주시는데 그럴 때마다 너무 좋아요.”
김가영은 선수로서의 목표로 “올해에는 꼭 소년체전에서 메달을 따고 싶어요. 그리고 나중에 프로선수가 되면 신인상도 받고 싶고, 돈 많이 벌어서 코치님이랑 부모님 다 여행 보내드릴 거예요”라며 가장 구체적인 대답을 했다.(옆에서 인터뷰를 듣고 있던 문혜숙 코치는 여행 말고 차를 사달라고 요구했다.)
비하인드 스토리
단체 사진촬영을 한다는 말이 나오자마자 선수들이 제각기 개성 넘치는 포즈를 취하며 사진기자를 당황케 했다. 인터뷰까지 모두 마친 후 선수들은 사진 기자의 노트북 앞으로 몰려들었다. “포토샵 잘 해주셔야 해요. 눈 꼭 키워주시고요! 아... 이 사진은 지워주세요.” 여기저기서 폭소와 비명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이제 막 오전 훈련을 마친 선수들이라고 하기엔 여전히 강한 에너지를 뿜어내 기자의 혼을 쏙 빼놓기도 했다.
이럴 땐 이들도 그저 평범한 중학생 소녀들과 다름없었다. 체육관을 나서면서도 “나중에 방탄소년단 만나면 수일여중 배구부가 엄청 좋아한다고 전해주세요”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글/이현지 기자
사진/홍기웅 기자
(위 기사는 더스파이크 2월호에 게재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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