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 스포츠를 즐기는 팬들에게 이적 시장은 정규시즌 못지않은 즐길 거리를 제공한다.
지난 5월 2018 유럽배구연맹(CEV) 챔피언스리그 결승이 끝난 이후, 유럽배구 이적 시장 역시 활기찬 분위기다. 발리볼네이션스리그(VNL)와 같은 국제대회에 더해 이적 시장도 활발히 진행되자 비시즌 배구계에는 화제가 풍성하다.
유럽 각지 많은 팀이 전력 강화를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 가운데, 유럽 대표 강팀들의 행보와 주목할만한 움직임을 돌아본다.
레온, 카잔 떠나 페루자로
가장 높은 곳에서 고배를 마신 두 팀이 매우 활발한 이적 시장을 보냈다. 바로 지난 CEV 챔피언스리그 남자부에서 각각 2위, 3위에 오른 쿠시네 루베 시비타노바(이하 시비타노바)와 시코마 페루자(이하 페루자)다. 2017~2018 이탈리아 세리에 A1 1, 2위를 차지한 페루자와 시비타노바는 다음 시즌 챔피언스리그 왕좌를 탈환하기 위해 전력을 보강했다.
특히 페루자는 세계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인 윌프레도 레온을 영입해 차기 시즌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정조준했다. 레온은 바로 이번 시즌 제니트 카잔(이하 카잔)을 유럽 챔피언에 올려놓은 주역이다. 강력한 라이벌팀 핵심 선수를 데려왔으니 챔피언스리그 우승경쟁에 일석이조인 셈이다.
레온은 카잔의 챔피언스리그 4연패를 이끈 일등공신이다. 2014~2015시즌을 앞두고 카잔으로 이적한 레온은 카잔의 챔피언스리그 4연패, 러시아 리그 4연패, 컵 대회 4연패까지 거의 모든 대회 우승 트로피를 선사했다. 카잔이 챔피언스리그 4년 연속 우승을 차지하는 동안 대회 최우수 윙스파이커 한 자리는 언제나 그의 몫이었다.
주축 선수 공백 역시 빠르게 메우고 있다. 주전 미들블로커 시모네 안자니가 아지무트 모데나(이하 모데나)로 이적한 빈자리는 파워 발리 밀라노(이하 밀라노)에서 지날루카 갈라시를 영입해 메웠다. 이반 자이체프와 애런 러셀이 모두 팀을 떠나 공석이 된 주전 윙스파이커 자리도 레온과 필리포 란자로 대신했다. 자이체프와 러셀로 이어진 국가대표 윙스파이커 라인업을 또 다른 국가대표 라인업으로 대체한 셈이다. 란자는 이탈리아 대표팀 소속으로 발리볼네이션스리그(VNL)에서 활약 중이다.
요안드리 리알
2017~2018시즌 준우승만 5번에 그친 시비타노바 역시 페루자 못지않게 이적 시장을 휘저었다. 시비타노바는 요안드리 리알이라는 또 한 명의 쿠바산 슈퍼스타를 영입해 다음 시즌 유럽 클럽 배구 정상 탈환을 노리고 있다.
브라질 사다 크루제이루에서 6년간 활약한 리알 역시 세계 최고로 손꼽히는 선수. 리알은 2017~2018시즌 사다 크루제이루의 정규리그, 챔피언 결정전 통합 우승을 이끌며 MVP까지 수상했다. 리알은 오스마니 후안토레나와 짝을 이뤄 주전 윙스파이커로 나설 예정이다.
시비타노바는 이외에도 주전 라인업에 변화가 많다. 우선 주전 세터가 바뀌었다. 2015~2016시즌부터 세 시즌 동안 시비타노바 주전 세터 자리를 굳건히 지켜온 마이카 크리스텐센이 모데나로 떠났다. 대신 모데나 주전 세터 브루노 헤젠지를 영입했다. 서로 세터를 바꾼 셈이다. 이탈리아 국가대표로 구성된 미들블로커 라인 역시 변화가 있다. 다비데 칸델라로가 트렌티노 발리(이하 트렌티노)로 떠났고 그 자리를 포르토 라벤나에서 이적한 엔리코 디아만티니가 대신한다. 최고의 리베로 중 한 명인 제니아 그레베니코프 역시 트렌티노로 떠났다. 그 공백은 파도바에서 이적한 파비오 발라소가 메운다. 리알 합류로 인해 입지가 좁아진 테일러 샌더는 이적을 택했다.
카잔, 레온 공백 은가페로 대체
최근 4년간 유럽 클럽 배구계 꼭대기에서 군림한 카잔 역시 챔피언스리그 5연패를 위해 움직였다.
카잔은 이번 비시즌 큰 변화를 겪었다. 우선 레온이 팀을 떠났다. 카잔은 레온 외에도 막심 미하일로프, 맷 앤더슨, 아르템 볼비치까지 화려한 선수진을 갖춘 팀이지만, 그 안에서도 레온은 가장 돋보였다. 카잔은 레온이 오기 전에도 러시아 리그를 대표하는 강팀이었다. 하지만 챔피언스리그 4연패라는 위업은 레온의 합류와 함께 시작됐다. 그 비중을 무시할 수 없다.
책임이 막중한 은가페
카잔은 레온의 빈자리를 에르빈 은가페라는 또 다른 슈퍼스타로 채웠다. 은가페는 2014~2015시즌부터 지난 시즌까지 4년의 모데나 생활을 마치고 러시아 카잔에 새 둥지를 틀었다. 은가페는 2013년 잠시 러시아 쿠즈바스 케메로보(이하 쿠즈바스)에서 뛴 적이 있다. 카잔은 은가페 영입을 공식 발표한 이후, 이 영입이 이번 비시즌을 완성할 것이라고 밝혔다.
카잔은 은가페 외에도 세 개의 굵직한 움직임을 가져갔다. 우선 알렉산더 구트살류크가 떠나며 생긴 미들블로커 한 자리를 바딤 리코셰르스토프를 영입해 채웠다. 리코셰르스토프는 지난 시즌까지 러시아 파켈 노비 우렌고이(이하 파켈 노비)에서 뛰었다. 에니세이 크라스노야르스크에서 윙스파이커 알렉세이 스피리도노프도 영입했다.
스피리도노프는 이미 카잔에서 뛴 경험이 있다. 그는 2014~2015시즌과 2015~2016시즌을 카잔에서 보냈다. 하지만 스피리도노프의 카잔행은 이것보다 다른 점에서 더 주목받았다. 스피리도노프가 알아주는 대표 악동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데뷔 이후 수차례 팬을 향한 도발과 부적절한 행동, 코트 위 다툼으로 징계를 받았다. 2009년 세르게이 그란킨(디나모 모스크바)과의 싸움은 지금도 유튜브 검색을 통해 볼 수 있다.
비교적 최근 사례로는 지난 3월에 있었던 ‘타임아웃 버튼 파괴’ 사건이 있다. 스피리도노프는 디나모 오블라스트와 경기 도중 백어택이 블로킹 당하자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벤치 의자를 발로 걷어찼다. 이때 의자가 날아가 경기장에 있는 타임아웃 버튼이 고장 난 것. 스피리도노프는 곧장 퇴장당했고, 추가로 2경기 출장 정지와 벌금 900달러를 물었다. 스피리도노프는 워낙 다혈질이라 그를 둘러싼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하지만 실력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만큼, 카잔이 얼마나 스피리도노프의 성질을 제어하느냐가 관건이 된다.
카잔은 산하 2군에서 뛰던 1996년생 윙스파이커 안드레이 수르마체프스키를 승격시켜 굵직한 이적 시장 움직임을 마무리했다.
모데나가 가져온 나비효과
2017~2018시즌 이탈리아 세리에 A1 정규리그 3위, 플레이오프 4강에 진출한 모데나는 좋지 않은 그림자를 없애기 위해 노력 중이다. 지난 시즌 모데나는 팀 내부적으로 문제가 많았다. 감독 라도스틴 스토이체프와 선수들의 불화 때문이었다.
선수단과 문제가 많았던 스토이체프 감독
은가페를 비롯해 맥스웰 홀트, 헤젠지 등 모데나 소속 수많은 선수가 스토이체프 감독 지도 방식에 불만을 품었다. 지나치게 강압적이고 인간적이지 않다는 게 주된 이유였다. 시즌을 치를수록 상황은 악화됐다. 은가페는 이틀 연속 팀 훈련에 불참하며 무언의 항의를 보내기도 했다. 급기야 일부 선수는 TV 프로그램에 나와 대놓고 항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계약기간이 한 시즌 남은 홀트는 스토이체프가 팀에 남는다면 계약을 파기하고 팀을 떠날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구단은 결국 선수들의 손을 들어줬다. 모데나는 스토이체프를 경질했다.
이 사건이 남긴 후폭풍은 상당했다. 은가페는 일찍이 모데나를 떠나기로 마음먹고 카잔으로 적을 옮겼다. 개인 SNS에 ‘동료들이 힘들어하며 팀을 떠나고 있다’는 글을 남긴 헤젠지 역시 시비타노바로 이적했다.
스토이체프 경질 이후 주축 선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모데나는 빠르게 움직였다. 안자니를 페루자로부터 영입했고 폴란드 리그 SKE 스크라 벨차토프에서 활약한 윙스파이커 바르토슈 베드노도 데려왔다. 아포짓 스파이커로 뛰고 싶다며 페루자를 떠난 자이체프 역시 모데나 유니폼을 입게 됐다.
감독
선임에도 공을 들였다. 2020년까지 아르헨티나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계약된 훌리오 벨라스코를 오랜 설득 끝에 감독으로 영입했다.
벨라스코 감독은 화려한 경력의 보유자다. 특히 이탈리아에서는 전설적인 감독으로 꼽힌다. 1980년대 모데나를 4번의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탈리아 대표팀 감독으로도 두 차례 세계선수권 우승과 5번의 월드리그(VNL 전신) 우승을 차지한 바 있다.
‘큰손’으로 떠오른 신생팀
이번 이적 시장에서는 창단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생팀의 움직임도 활발했다. 특히 러시아 제니트 상트페테르부르크(이하 상트페테르부르크)와 이탈리아 엠마 빌라스 시에나(이하 시에나)가 눈에 띄는 움직임을 보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행보는 예사롭지 않다. 2017년 창단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2017~2018시즌 재정 문제가 있던 디나모 크라스노다르를 대신해 러시아 슈퍼리그에 12번째 팀으로 참가했다. 첫 시즌부터 안드레이 아쉬체프, 예브게니 시보젤레즈, 알렉산더 볼코프 등 경험 많은 선수들을 영입해 주목받았다. 곧바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놀랄만한 성과를 거뒀다. 정규리그에서 5위를 차지한 것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플레이오프에서 노바(NOVA)와 쿠즈바스를 차례로 꺾고 결승까지 진출했다. 비록 결승에서 카잔에 시리즈 스코어 0-3으로 무릎을 꿇었지만 그들이 남긴 성과는 두고두고 화제가 됐다.
알렉세이 사포노프
첫 시즌 만족할만한 성적을 남긴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전력 보강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알렉세이 사포노프를 영입해 미들블로커 진영을 보강했으며 루카스 디비쉬, 드미트리 마카렌코를 영입해 윙스파이커 진영도 두껍게 했다. 비록 지난 시즌 아포짓 스파이커로 좋은 활약을 펼친 드라젠 루부리치가 팀을 떠났지만, 러시아 23세이하 대표팀 출신 세르게이 피라이넨을 영입해 공백을 최소화했다. 리베로 젤렌코브를 비롯해 미들블로커 아쉬체프, 윙스파이커 시보젤레즈 등 기존 전력을 상대적으로 잘 보존한 만큼, 다음 시즌에도 가시적인 성과가 기대된다.
2013년 창단한 시에나 역시 공격적인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2013~2014시즌 세리에 B2에서 창단 첫 번째 시즌을 보낸 시에나는 2015~2016시즌까지 승격을 거듭해 이탈리아 2부 리그인 세리에 A2까지 올라갔다. 세리에 A2에서 세 시즌을 보내고 2018~2019시즌, 마침내 꿈에 그리던 세리에 A1 입성을 예약했다.
1부 리그 입성을 앞두고 시에나는 2017~2018시즌 터키 리그 챔피언, 할크방크 앙카라 출신 아포짓 스파이커 페르난도 헤르난데스를 영입했다. 여기에 이란 국가대표 주장이자 주전 세터인 사에드 마로우프까지 불러왔다. 시에나는 이탈리아 국가대표 윙스파이커인 가브리엘 마루오티까지 데려오며 순식간에 이적 시장 태풍의 눈으로 떠올랐다. 마루오티의 팀 동료였던 이시카와 유키도 시에나에 새 둥지를 틀었다.
시에나는 이 외에도 추가 영입을 노리고 있다. 이처럼 공격적인 ‘선수 쇼핑’을 통해 세리에 A1에서 살아남을 준비를 하는 시에나가 세리에 A1 첫 시즌 어떤 순위에 오를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글/서영욱 기자
사진/국제배구연맹(FIVB), 유럽배구연맹(CEV) 제공
(위 기사는 더스파이크 7월호에 게재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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