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진화하지만 반복하기도 한다. 아래 두 장면을 보자. 4년 간격으로 열린 남자배구 한·일전에서 그 무엇을 발견할 수 있다.
S#1 - 2014년 아시안게임 준결승전 (10.2)
한국 남자배구는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 이어 준결승전에서 재회한 일본에게 다시금 패하며 결승진출이 좌절된다. 이 대회가 대표팀 데뷔무대였던 이시카와 유키(23, 주오大 1년)는 그해 4월 세이죠 고교를 졸업한 대학 신입생으로, 이 경기에서 서브 3개와 블로킹 하나를 포함해 14득점에 공격성공률 66.67%(10/15)를 기록하며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S#2 2018년 VNL 6차전 (6.3), 한·일 친선전 (7.28~29)
VNL 2주차 최종일 경기에 이어, 한달 뒤 일본 치바에서 열린 두 차례 친선전에서도 한국은 연거푸 일본에 무릎을 꿇는다. 이 세 경기에서 각각 55.17%(16/29, VNL), 68.75%(11/16, 친선 1차전), 68.95%(20/29, 친선 2차전)의 경이적인 공격성공률로 팀 승리를 견인한 니시다 유지는, 올해 카이세이 고교를 졸업하고 제이텍트 스팅스에 입단한 만 18세(2000년생)의 신예였다.
대학생 대표선수, 한국과 일본의 경우
시간과 배경을 포함해 여러가지 점에서 전혀 별개로 보이는 두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2014년의 이시카와와 2018년의 니시다는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고교졸업 직후 대표팀에 발탁되었다는 점 하나와, 첫 출전대회에서 주전을 차지했다는 점이 또다른 하나다.
물론 이는 특별한 경우라고 해도 일본에서 대학선수의 대표팀 발탁 및 중용 사례는 그리 드물지 않다. 2014년 이후로 시기를 한정해도, 야마우치 아키히로(25, 아이치가쿠엔大)와 야나기다 마시히로(26, 게이오大)등을 2014년 아시안게임에, 오타케 잇세이(23, 주오大), 타카하시 켄타로(23, 쓰쿠바大)등을 이듬해인 2015년 월드리그와 월드컵에 각각 소집해 기용했기 때문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한국의 대학생 대표A팀 엔트리(AVC컵을 제외한 최종명단 기준)는 2013년 세계선수권 최종예선 때의 전광인(27, 성균관大)을 끝으로 갱신되지 않고 있다. 그 이유로는 대표팀 운영 관련 난맥상이 우선 거론되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한국과 일본의 성인리그가 대학리그를 포함한 아마추어와 관계를 맺는 방식이 구조적으로 상이하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사진: 니시다 유지(32번)는 어린 나이부터 성인 대표팀에서 활약 중이다
그렇다면 양국간에 어떤 차이가 있으며, 또 그것이 대표팀과 리그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을까?
현행 일본 (세미)프로팀의 대학(아마추어)선수 수급방식은 ‘내정’제를 가미한 자유계약제이다. 1990년대까지 한국의 실업리그에서도 널리 쓰인 제도다. 위에서 언급한 야마우치, 오타케, 타카하시 등과 올해 샛별로 떠오른 니시다 유지 또한 이 방식을 통해 고교 3년생 신분으로 성인배구 무대에 발을 딛게 된다.
반면 한국이 채택한 선수선발 방식은 ‘성적 역순위 우선지명’을 토대로 하는 드래프트제이다. ‘유망신인을 하위팀이 우선 선발하도록 함으로서 전력 분산 및 평준화를 유도하여 리그 정상화를 꾀한다’는 취지 아래 2000년에 도입되어 현재까지 고교·대학 선수들을 실업·프로 리그에 공급하는 통로로 채택되었다.
서로 일장일단이 있기에 둘 중 어느 한 제도의 우월함을 단정지을 수는 없겠으나, 적용범위를 ‘프로-아마추어 사이의 결속력’으로 한정한다면 상대적으로 강한 인력이 작용되는 쪽은 자유계약제일 것이다. ‘하위순위가 우수선수 발탁의 유일조건’인 드래프트제에 의해 운영되는 리그의 팀에 비해, 선수와 구단의 이해관계 합치로 영입이 이루어지는 자유계약제 하의 팀이 대학(혹은 고교) 재원들에 대한 심도있는 조사와 선별, 적극적인 육성에 힘을 기울일 것은 당연하고, 그 과정에서 상호간(프로-대학-선수)에 보다 밀접한 관계가 형성될 것이기 때문이다.
드래프트제 시행당시(2000년) , 대학과의 유리(遊離)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보완책으로 논의된 ‘연고지역(교) 우선지명제도’ 등은 연고제 기반의 프로화 전환 이전에는 현실화 될수 있는 방안이 아니었다. 애당초 프로팀 산하 연고지역 고교를 제외한 고교 및 대다수의 대학선수들의 육성문제를 언급하고 있지 않기에, 본 대책은 아마추어팀 전반의 기량향상과는 성격이 다른 안이기도 하다.
사진: AVC컵에 출전했던 한국 2군 대표팀
결국 드래프트제를 운영하고 있는 현 실정과 축구나 야구와 같은 대규모 유소년 및 2군 육성시스템을 운용할 수 없는 현실을 고려할 때, 한국에서 아마추어 특히 대학배구는 대표팀의 주요 자산이자 프로리그의 미래 가치가 될 재원들을 양성하는 가장 핵심적인 장(場)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 대학배구를 성인무대의 단순한 하부구조가 아닌 대등한 주체이자 동반자로서 인식하고 공생공존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과거 한국배구가 아시아를 호령했던 시절, 강만수-김호철을 필두로 장윤창-하종화-김세진-이경수에 이르는 젊은 학생 주역들과 그들을 배출한 학교들이 언제나 대표팀의 한 축을 떠받치고 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생각하면, 현재 한국배구의 위기는 대표팀에 발탁할만한 수준의 학생선수들을 수년째 내놓지 못하는 대학배구의 침체에서 비롯되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의 근원에는 프로와 대학 및 아마추어 배구와 소통부재가 놓여있다고 지적할 수 있다.
KVA컵 창설로 프로-아마간 단절 해소
그렇다면 작금의 프로-아마간 단절을 해소하고 교류를 증진할 수 있는 구체적 방안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실행 가능성과 용이함에 초점을 맞추어, 여기에서는 프로만을 대상으로 하는 현 KOVO컵 체제에서 학교와 실업을 모두 포괄하는 대한배구협회 컵(가칭 KVA컵)으로 개편을 제안한다.
이러한 변화를 통해 대표팀과 프로팀, 아마추어팀은 각각 다음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대표팀은 대학선수들의 현재 경기력과 미래 잠재력을 점검할 수 있다. 류중탁(2009년)이후 내내 프로출신 감독들이 대표팀 지휘봉을 잡았던 상황에서, 감독 포함 소수의 대표팀 코칭스태프들에게 전달되는 대학(및 고교)선수들의 정보는 구조적으로 제한적이고 부실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KVA컵의 개최는 그들로 하여금 현재 대학선수들의 기량과 상태를, ‘직접’ 그리고 ‘프로팀 선수들을 상대로’ 확인할 수 있게 한다. 이는 추후 가용엔트리 폭의 확대 가능성을 높이며 대표팀의 전력강화에 이바지하게 된다.
프로팀은 향후 지명하게 될 선수들의 가치를 그들 스스로 평가할 수 있고, 이 대회를 계기로 등장하게 될 유망 대학선수에게 집중될 팬들의 관심과 인기를 수년뒤 고스란히 이어받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프로배구 전체의 저변확대를 꾀할 수 있다. 또한 본 대회는 프로팀과의 수준높은 경기를 통해 대학선수들에게 기량향상 욕구를 자극하게 하여 보다 나은 재원으로의 성장을 이끄는, 요컨대 일종의 선행투자의 성격을 띄고 있기도 하다.
대학 및 실업팀들이 이 대회 참가를 통해 가장 매력을 느낄만한 요소는, 그동안 활용하기 어려웠던 미디어와 접촉이 가능해진다는 점을 우선 꼽을 수 있다. 팀 차원에서는 저비용·고효율의 홍보효과를 누릴 수 있고, 선수 입장에서는 프로무대를 향한 자기선전의 무대로 삼을 수도 있다. 그밖에도, 잦은 미디어 노출을 통해 실업과 대학리그 자체에 대한 인식을 제고할 수 있다는 점 또한 이 대회 출전의 큰 요인이 될 것이다.
각 참여 주체들이 얻을 수 있는 다양한 실리들을 고려할 때, 컵대회 개편의 타당성은 큰 어려움없이 확보할 수 있다.
이제 남은 논제는 이 대회의 실현 가능성 여부에 있다. 예전 대통령배나 슈퍼리그와 같은 프로-아마추어 통합리그 형태나 일본의 ‘천황배 전일본 배구선수권 대회’처럼 출전팀을 대폭적으로 확대하는(협회에 등록된 중등부 이상 출전가능) 방식의 실행안을 채용하기에는, 장소와 예산, 소요기간 등 극복하기 힘든 제약이 따른다.
그렇다면 어떻게 구현할 수 있을까?
‘교류·소통’이라는 본 대회의 가치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도 실현가능성을 지닌 한가지 모델을 제시한다.
프로 7개팀과 실업 3(또는 4)개팀, 대학 6(또는 5)개팀으로 구성된 총 16개팀을 4개조로 나누어 조별 풀리그 방식의 조별예선을 치르게 하고, 그 결과에 따라 결선에 진출한 각조 상위 2개팀들의 토너먼트를 거쳐 우승팀을 결정하는 방식이 바로 그것이다.
프로-아마 통합대회는 이렇게
사진: 아시안게임에 나선 한국 1군 대표팀
프로팀에게는 자동출전권을 부여. 실업과 대학팀은 컵대회 본선 출전을 놓고 별도의 예선을 치르거나, 혹은 지난해 실시됐던 실업배구 연맹전/대학배구 U리그 순위에 의거하여 출전티켓을 배분할 수도 있다. 후자의 경우에는 시간과 비용을 크게 절감할 수 있는 장점과 함께, 아울러 그해 치러지는 실업과 대학 대회의 충실도를 높이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조별리그는 각조에 속한 프로팀 중 전 시즌 상위팀의 홈구장에서 열도록 하여 어드밴티지를 부여하고, 결선 라운드를 88올림픽 배구 결승전을 치렀던 잠실 실내체육관이나 장충체육관등 한국배구를 상징하는 장소에서 치르도록 정한다면, 명분과 실리를 동시에 취할 수 있다.
대회에 소요되는 총 기간은 조별예선 3경기에 요구되는 3일과 중간 휴식일, 거기에 더해 8강전부터 결승전까지 걸릴 3일을 합쳐서 총 7일로, KOVO컵의 그것과 동일하다. 따라서 출전하는 모든 팀(특히 프로구단)이 시즌 일정을 진행하는데 지장을 초래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대회운영이 가능하다.
물론 이는 한가지 예에 불과하며, 보다 합목적성과 효율성을 동시에 높일 수 있는 방안도 추후 다양하게 고안해 낼 수 있다고 믿는다.
이상, 한국의 프로-아마추어간 교류의 현실과 그 증진의 필요성을 점검하고, 그 실천방안으로서 KVA컵 개편의 당위성과 실익을 확인하며, 아울러 구체적 실행방안까지 검토해 보았다.
물론 이 대회를 ‘프로와 대학간 소통구조의 형성(또는 복원)’이란 목표 달성의 궁극적인 해결책으로 제안하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그를 향한 첫 걸음 즉 ‘계기를 마련하자’는 취지로, 이 대회 자체는 그저 일주일간의 이벤트에 불과할 따름이다. 그러나 지금 출발하지 않으면, 목적지와 거리는 언제까지고 좁혀지지 않는다.
얼마 전 열린 AVC 컵에서 대학선수들을 주축으로 삼았던 한국 대표팀은 지난 5회 대회에 이어 다시금 쓴 잔을 마셨다. 슈퍼리그 대학부 분리(2002년) 및 프로화 출범(2005년)에서 빚어진 부작용이라고 볼 수 있다. 즉시 시급한 개선조치가 없다면 머지않아 맞게 될 한국배구의 미래상이 될 수도 있다.
수확의 계절이 한층 가까워진 이 때야말로, 우리가 ‘한국배구’라는 토양 위에 어떻게 씨를 뿌리고 가꾸어가야 할 것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바로 그 시점 아닐까.
글/ 조훈희 더스파이크 칼럼니스트
사진/ 유용우 기자
(위 기사는 더스파이크 9월호에 게재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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